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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18일 목요일[(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일치 주간)]/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18일 목요일[(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일치 주간)]/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8,6-9; 19,1-7
그 무렵 6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8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9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2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3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4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6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7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6(55),2-3.9-10ㄱㄴ.10ㄷ-11.12-13(◎ 5ㄴ)
◎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으리라.
○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짓밟는 사람들이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르나이다. 적들이 온종일 짓밟나이다. 드높으신 하느님, 저를 몰아치는 자들이 많기도 하옵니다. ◎
○ 저는 뜨내기, 당신이 적어 두셨나이다. 제 눈물을 당신 자루에 담으소서. 당신 책에 적혀 있지 않나이까? 제가 부르짖는 그날, 그때 원수들은 뒤로 물러가리이다. ◎
○ 하느님이 내 편이심을 나는 아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주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
○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이다.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제2주간 목요일(일치주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런 심성을 시기라고 말합니다. 시어머니가 맏며느리를 예뻐했는데 둘째 며느리가 들어오자 둘째 며느리를 더 예뻐할 때 시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맏며느리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질투라고 말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비슷한 면이 있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시기와 질투를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시기는 갖지 못한 사람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고 질투는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에 대한 명언들이 있습니다. “시기는 증오보다 더욱 비타협적이다. 시기심은 살아 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죽을 때 멈춘다. 우리들의 불행을 마음속 깊이 애통해 주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지만, 우리들의 성공을 마음속 깊이 시기하는 사람은 몇 천 명이나 있다. 녹이 쇠를 좀먹듯이, 질투는 그것에 사로잡힌 영혼을 병들게 한다.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 열망이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질투는 휴일이 없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아담이 교만함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카인이 시기와 질투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범한 최초의 죄입니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는 공동체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힘이 강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다윗이 이민족의 침입을 잘 막았는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의 친구이자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은 아버지에게 다윗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울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의 시기와 질투는 사울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본당을 옮겨 다녔는데 한 번도 강남으로 간적이 없었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모두 강북에 있습니다.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되어서 간곳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성성당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대부분 강남과 강북을 오가면서 사제생활을 했는데 저는 강남스타일이 아닌 것처럼 강북에만 있었습니다. 강남에서는 지내지 못했지만 미국 뉴욕에서 5년째 지내고 있으니 저는 뉴욕스타일이 맞나 봅니다. 시기와 질투보다 약한 것이 부러움인데 그 정도는 하느님께서도 애교로 봐 주실 것 같습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원망은 오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이 생깁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 명예와 권력, 자존심과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마르코 3,7-12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특별한 관계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가질 것 다 소유한 사울 왕에게 다윗은 가장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항상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고, 전쟁에서는 승승장구했습니다.

왕으로서 박수를 쳐주고 상을 줘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큰 사람으로서의 넉넉함이 부족했습니다.

대신 그의 내면에는 뭐든 잘하는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도 반성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 더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배로서, 책임자로서 형제들의 일취월장과 장점에 대해 내 일처럼 기뻐해 주고, 박수를 쳐주고 있는가?

더 큰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지지해주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무엘기는 사울과 다윗 사이가 갈라지는데 단초가 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아직 볼이 빨갛던 양치기 소년 다윗이 어느 날 보기만 봐도 겁에 질리는 어마무시한 골리앗 장군과의

일대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게임도 길지도 않았습니다.

단 한방의 돌팔매로 속전속결로 게임을 끝내버렸습니다.

그 싸움으로 인해 풍전등화 신세였던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개선 길에 올랐습니다.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왕이 다윗과 함께 돌아오자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흥겹게 부르는 노랫 가사 한 구절이 사울왕의 폐부 깊은 곳을 찔러버렸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 사무엘 18,7)

사울은 그 노랫 가사 한 구절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했습니다.

순식간에 기분이 잡쳤으며 시기·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제대로 한번 빡친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고 인자하던 사울의 마음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수시로 솟아오르는 시기·질투심을 그때 그때, 틈나는 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잘되면 시기·질투하지 말고, 마치 내 일처럼 크게 기뻐해 줘야겠습니다.

특별히 후배들, 젊은 세대가 떠오르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큰마음으로 넘겨주고 내려서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찬 미워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 같은 경우 수도 공동체 내 동료 자매들로부터 엄청난 시기·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시기·질투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상냥히 대했습니다.

더 기쁘게 냉대를 열심히 참아냈습니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동료 자매를 더 깊이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락 시간이면 일부러 가장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자매 곁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손에 못을 박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하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믿는 이들 누구나의 공통적 신원은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성서와 사막수도자들의 전통은 믿는 이들의 삶을 영적전쟁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은 제가 수도사제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강론 주제로 인용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인용할 주제입니다.

 

“신부님, 오늘 아침 강론 중에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공부와 사랑,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이라는 말씀을 깊이깊이 간직하고 곰곰이 묵상하며 오후 5시경 시점에 살고 있는 저도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제 새벽 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린 강론을 보고 즉시 저에게 카톡메시지를 보낸 70대 후반의 형제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영원한 현역으로 주님의 전사다운 삶을 사는 형제입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전투를 치러야 할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영적전투 치열한 하루의 삶이었군요! 오늘 하루 영적승리의 삶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시며 만족해 하십니다.”

 

하루 치열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산 형제에게 예수성심상 사진과 더불어 보낸 위로와 격려의 덕담 메시지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서 최선을 다해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형제자매들의 삶이 참 고귀하고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제 경우는 날마다 밤 12:30분쯤 일어나 영적전투에 돌입한후 하루를 마감하는 끝기도후 오후 8:30분 잠자리에 들 때가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하루의 영적전쟁을 끝난후의 휴식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끝기도시 독서도 기도도 참 적절하여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1베드5,8-9ㄱ)

 

역시 불퇴전의 주님의 전사, 베드로 사도가 영적전쟁중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격려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참 아름다운 마침기도후 잠깨어 일어나 강론을 쓰며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주님, 자비로이 이 밤을 비추어 주시고, 밝아오는 아침에 당신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 건강한 몸과 기쁜 마음으로 새날 빛을 볼 수 있도록, 오늘 평화 속에 쉬게 하소서,”

 

영원한 빛이신 그리스도의 빛속에 시작된 새날입니다. 오늘은 사막수도자들의 아버지요 영적전투의 달인이자 주님의 전사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105세까지 장수를 누리셨으니 아마 성인중 가장 장수한 분임에 속할 것입니다. 그 치열한 영적전투에 주님의 전사로 빛나는 공훈을 세우며 장수했다는 사실이 참 불가사의입니다. 

 

이분에 대한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저서인 ‘성 안토니오의 생애’는 수도자들의 교과서와도 같았습니다. 그분을 회심으로 이끈 말씀에 즉각 순종으로 응답한 성인의 삶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복음의 부자청년은 실패했지만 안토니오는 곧장 실행으로 옮김으로 성공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21)

 

성 안토니오가 우유부단한 수도자들에게 주는 깨우침이 참 큽니다. 이어 삶의 지혜가 가득 담긴 마르지 않는 샘같은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중에는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안토니오 아빠스에 관한 주옥같은 일화도 참 많습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1.“사막에 살던 거룩한 안토니오 압바가 ‘권태accidie’에 사로잡혀 있었고, 무수한 죄스런 생각들에 공격을 받던중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구원받고자 하나 이런 나쁜 생각들이 저를 홀로 놔두지 않습니다. 저는 이 고통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요?’ 

잠시후 일어나 나가려했을 때 안토니오는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앉아 일하다가 일어나 기도하고 그 다음 앉아서 밧줄을 꼬고 그 다음 일어나 다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바로 안토니오를 교정하고 격려하고자 보낸 주님의 천사였다. 그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 ‘이대로 하라, 그러면 너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기쁨과 용기로 가득차서 이대로 행하였고 구원을 받았다.”

일상의 궤도에 충실함이 구원의 첩경이라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귀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2.“성인은 또 말합니다. ‘유혹을 체험하지 않은 자는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유혹없이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니 유혹을 없게 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유혹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3.“안토니오 압바는 악마들이 세상 곳곳에 쳐놓은 무수한 덫을 보며 ‘무엇이 이 덫들을 통과하게 할 수 있나?’ 탄식합니다. 그때 들려온 음성입니다. 

‘겸손(Humility)’”. 

참으로 모든 덕의 어머니인 겸손을 지닌자만이 악마의 덫을 벗어날 수 있음을 봅니다. 말그대로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4.“압바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을 금욕생활로 자기 몸을 괴롭히고 있는데 이들은 바로 분별(discernment)이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 

새삼 영성생활에 분별의 지혜가 얼마나 필수 덕목인지 깨닫게 됩니다.

 

5.“해마다 세 제자들이 안토니오 압바를 찾아 토론도 하며 자기 생각을 펼쳤는데 그중 하나만은 언제나 침묵을 지켰고 자기에 관해서도 일체 함구할뿐이라 안토니오 압바가 물었을 때 다음 그 제자의 답변입니다. 

‘사부님, 저에게는 당신만을 뵙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It is enough for me to see you, Father)’. 

문득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무엇이 부족한가 물을 때 마다 ‘Enough(인어프;충분하다)’ 한마디로 끝냈다는 일화입니다.

 

참 매력적인 사막교부들의 인품입니다. 참으로 명랑하고 지혜롭고 평화로우면 유머감각도 뛰어났던 영성대가들이 안토니오를 비롯한 사막교부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다윗이야 말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입니다. 사울이 지는 해라면 다윗은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주님의 용사, 소년 다윗의 다음 상대방의 거인 골리앗을 향한 호통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나왔다...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과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주님의 용사, 믿음의 전사로서 다윗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요 역시 결과는 거인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로 끝납니다. 결국은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다윗의 승리야말로 영적승리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오늘 복음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불세출의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이 또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적대자들에 대한 또 화려한 승리를 보여줍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공동체 한 가운데 세우시고 일언지하로 적대자들의 말문을 막으시니 예수님의 승리요, 역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미 질문안에 답이 있으니 이들은 묵묵부답이요 이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며 주님은 재차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말씀하시니 그 손이 성하여집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니 적대자들과의 영적전쟁은 계속되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죽을 때가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될 영적전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그라든 손을 활짝 펴 주신 하느님의 전사인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주시고,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를 완전무장시키시어 우리 모두 당신 믿음의 전사로 오늘 하루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아멘


1/18(목) 연중 제2주간 목요일(일치 주간), 되새김 구절

 

1.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 명예와 권력, 자존심과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수시로 솟아오르는 시기·질투심을 그때 그때, 틈나는 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잘되면 시기·질투하지 말고, 마치 내 일처럼 크게 기뻐해 줘야겠습니다.

특별히 후배들, 젊은 세대가 떠오르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큰마음으로 넘겨주고 내려서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찬 미워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영원한 빛이신 그리스도의 빛속에 시작된 새날입니다. 오늘은 사막수도자들의 아버지요 영적전투의 달인이자 주님의 전사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105세까지 장수를 누리셨으니 아마 성인중 가장 장수한 분임에 속할 것입니다. 그 치열한 영적전투에 주님의 전사로 빛나는 공훈을 세우며 장수했다는 사실이 참 불가사의입니다. (이수철 신부)

 

1/18(목) 연중 제2주간 목요일(일치 주간), 제390(제20)일 기도

 

복음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수시로 솟아오르는 시기·질투심을 그때 그때, 틈나는 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잘되면 시기·질투하지 말고, 마치 내 일처럼 크게 기뻐해 줘야겠습니다.

특별히 후배들, 젊은 세대가 떠오르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큰마음으로 넘겨주고 내려서야겠습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게 하소서.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게 하소서.

미워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게 하소서.

 

- 2024년 1월18일(목) 8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