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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22일 월요일[(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22일 월요일[(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빈첸시오 부제 순교자

입당송

시편 96(95),1.6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7.10
그 무렵 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2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4 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 해 동안 다스렸다.
5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유다를 다스린 다음,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6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7 그러나 다윗은 시온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
10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9(88),20.21-22.25-26(◎ 25ㄱ)
◎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
○ 예전에 당신이 나타나 말씀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선언하셨나이다. “내가 영웅에게 왕관을 씌웠노라. 백성 가운데 뽑힌 이를 들어 높였노라.” ◎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
○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니, 내 이름으로 그의 뿔이 높이 들리리라. 내가 그의 손을 바다까지, 그의 팔을 강까지 뻗게 하리라.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제물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6 참조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사탄은 끝장이 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저는 성격상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편입니다. 물건을 주문했을 때, 좀 크면 큰 대로, 좀 작으면 작은 대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너무 작아서 불편하면 남을 주기도 합니다. 요즘 반품을 하면 다 받아준다는데 그렇게 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인지, 재능이 없어서인지 세심히 살피지 못하고, 틀린 부분을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편입니다. 방 안의 물건들도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진중한 편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게으른 편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전문가보다 더 세심하게 잘못된 부분을 찾아낸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문가들이 그분의 말을 수긍은 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인지 고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남들은 그냥 넘어가는 것들도 본인의 눈에는 잘 보이는 것이 때로 힘들다고 합니다. 그것을 말했을 때 상대방이 수긍을 하기 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감정이 상하는 것을 볼 때가 힘들다고 합니다. 본인의 성격과 본인이 하는 일의 특성 때문에 그리 된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격이신지요?

 

예전에 직장인들이 좋아하는 상급자의 유형을 읽었습니다. 가장 힘든 상급자는 똑똑한데, 부지런한 상급자라고 합니다. 그분들을 따라가려면 쉴 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성인 밑에 있으면 순교자가 된다.” 본당 신부님이 성인처럼 지내면 보좌 신부님과 신자들은 거의 순교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좋은 상급자는 똑똑한데 게으른 상급자라고 합니다. 똑똑하기에 일에 실수는 없고, 업적도 낼 수 있지만, 회식도 자주하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대로 좋은 상급자는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급자라고 합니다. 멍청하기에 문제는 생기지만 그런 대로 뒷감당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지만 걱정이 되는 상급자는 멍청한데 게으른 상급자라고 합니다. 아주 편하기는 한데 부서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년 동안 신문사에 있으면서 저는 어떤 유형의 상급자였는지 돌아봅니다. 팬데믹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으니 아주 멍청한 상급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실적과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니 아주 부지런한 상급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상급자인지요?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상급자를 좋아하시는지요?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자였습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이길 정도로 싸움에 능한 군인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이 하느님께 축복 받은 왕이라는 이유로 몇 번씩이나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를 탐하였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나탄 예언자의 말을 듣고 뉘우치던 왕이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는 왕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했던 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완벽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솔로몬은 하느님께 재물보다, 권력보다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은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하느님 앞에 겸손하지 못했기에 이스라엘은 분열의 길을 걷게 됩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잘못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 칠 수 있는 겸손함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걷겠다는 다짐으로 아서 휴 클러프 시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투쟁이 소용없다고 말하지 마라.’입니다. “투쟁이 소용없다고 말하지 마라. 노력과 상처가 부질없고, 적은 약해지지도, 패배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지 마라. 희망이 멍청하다면, 두려움은 거짓을 말한 것이리라, 보이지 않는 저 연기 속에서, 네 전우들은 지금도 도망치는 적군을 뒤쫓고 있다, 그리고, 너 없이도, 승리를 거두리라. 지친 파도들이 헛되이 해변에 부서지며 안간힘을 쓰며 한 치 앞을 못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먼 뒤쪽으로, 개울과 작은 만을 이루며, 바다가 소리 없이 밀려들고 있지 않은가. 동이 틀 때, 햇빛은 동쪽 창으로만 들어오지 않으며, 태양은 앞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오르지만, 하나 서쪽을 보라, 온 대지가 밝게 빛나지 않는가.”


2.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결국 성령의 선물을 원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도 원치 않게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 감기인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신자 분이 운영하는 작은 병원입니다. 수액이라도 맞으면 빨리 나을 것 같아서 놓아 달라고 했지만, 그분은 수액은 약을 입으로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나 맞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터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소화제나 감기약은 그냥 내가 약국 가서 사면 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뒤에 코가 막히고 목에 가래가 끓었습니다. 열도 없고 몸살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말에 미사를 드릴 때 목소리도 안 나고 콧물도 흐른다면 곤란할 것 같아 다시 병원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사무원님이 예약해주는 바람에 그 병원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매우 친절하게 다 해 주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신 선물도 주셨습니다. 영양제와 방향제까지 있는 모든 것을 한 꾸러미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저를 믿어주셨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난번에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돌아간 것이 그분도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여기서 삼위일체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려준 처방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약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병원에 갈 일도 처방전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내가 가서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는 약들을 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의사가 처방해 준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병을 고칠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약에 대한 희망이 믿음이 없다면 처방전도, 의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의사를 만나게 되고 처방전도 받게 됩니다. 
    제가 살면서 바랐던 것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였습니다. 죽으면 구원될 수 있다는 의로움,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없이 살고 싶어서 기쁨과 평화를 원했습니다. 행복을 원한 것입니다. 성당을 다니며 어느 정도는 이런 것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읽으며 더 큰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 책을 읽을 때 나에게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베푸시는 성령의 맛으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십니다. 그러나 행복이 성령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가겠습니까? 약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처방전을 주는 의사도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사는 욕해도 약은 욕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는 산초를 시켜 자신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알돈자에게 전해줍니다. 알돈자는 사실 둘시네아, 곧 자기 나라의 공주란 내용입니다. 알돈자는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산초를 믿지 않더라도 그 편지 내용 만이라도 믿는다면 그 편지를 보낸 돈키호테를 믿게 됩니다. 하지만 편지를 믿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온 산초도 믿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그 편지를 산초에게 보낸 돈키호테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하느님 아버지, 산초는 성자, 편지는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을 거부하면 다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를 원합시다. 그러면 성령을 만나게 될 것이고 성령을 만나면 그분께서 오시는 원천인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을 만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가 의미를 잃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게 전부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21. 연중 제3주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오늘은 연중 제 3 주일입니다.
 
한편, 1월 21일인 오늘은 성녀 아녜스 축일입니다. 저희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있어, 오늘은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1313년, 지금으로부터 710년 전에 이탈리아의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도시 시에나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심오한 열정에 사로잡혀” 늦깎이 40대 귀족청년들 3명이 고대의 수도승들이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아 사막으로 떠났던 것처럼, 약 35km 떨어진 아꼬나 계곡으로 떠나와 기도와 고독 속에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습니다.”(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 그로부터 6년 후에는 감명을 받은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고, 교황으로부터 파견된 조사관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레쪼 교구장의 인가를 받아 1313년 3월 26일에 <몬떼 올리베또의 성 마리아 수도원>이 창설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급속도로 성장하여 31년 후에는 15개의 공동체가 창설되었고, 그리하여 1344년에 1월 21일 교종 클레멘스 6세에 의해 <베네딕도회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congregatio)>회”로 인준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703년 전,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그래서 미사 후에는 마침성가 대신 “사은찬미가”(떼데움)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제2독서> 말씀도 바로 이 하늘나라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회개와 믿음에 대한 요청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바로 이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셋째>는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시고 줄곧 준비해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이요, 목표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이 “나라”는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와 있다’는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루가 11,20 참조).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회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곧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바꾸되,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곧 ‘~어디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와 함께, ‘~어디에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결국,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회개”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 역시, “하늘나라”라는 “복음”을 ‘믿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임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듯이, 이제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당신께로 부르신 이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당신께 “오너라.”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서 “떠나” 당신께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가는 길을 “따라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함께 데리고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데리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을 준비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 있던 것, 의지하고 있던 것, 배도, 그물도, 삯꾼도, 아버지도, 모두 버려두고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바로 이 ‘따라나서는 것’이 회개의 실천적인 모습이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 “버림”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큰 가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위한 배나 그물보다도, 또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아버지보다도 더 값지고 중요한 “그분”을 향하여 믿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려야 하는 이유, 곧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버리는가?’ 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향하여 있고,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따라 나선 ‘자신을 따르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지’,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 와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나라’ 꿈과 실현-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자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20일에 매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낼 것을 선포하였고, 교회는 이날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1월18일부터 1월25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 우리 가톨릭교회는 일치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일치주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고백하지 않습니까? 바로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가난도 아닌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빛인, 영원한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말씀공부와 실천뿐임을, 평생 주님의 학인이, 말씀의 학인이 되어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정의하면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오늘 말씀의 주제도 회개가 중심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꿈도 실현되며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꿈이 없으면 살아있다 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이 있어야 힘도 샘솟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꿈을 희망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꿈중의 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꿈이요, 예수님이 평생 추구했던 바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하느님의 꿈쟁이였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꿈은 예수님의 평생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겨울철 1월이 되면 생각나는 26년전 써놨던 “봄꿈”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화장실에 들렸다가 창문밖 하얀 눈덮인 언덕을 보며 떠올라 쓴 글입니다. 이 시를 써놓고 그해 겨울은 참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봄꿈이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꿈,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와 더불어 24년전 “별꿈”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꾸며 잠못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을 상징하는 별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화두이자 평생꿈이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회개를 통해 실현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예수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현재성을 띄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오늘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될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 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tual...the more real)”란 말마디입니다. 하늘 높이 나뭇가지들 올라갈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참으로 진짜 꿈과 희망의 이상주의자일수록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시한 참된 영성가들은 모두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 나라가, 결코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 또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심으로 현실화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나라 꿈의 현실화입니다. 

 

복음의 네 제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공동체인 여기 수도공동체도, 우리 신자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도 역시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의 내적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이들 형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이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 중심의 제자공동체, 하느님 나라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예수님의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바야흐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할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제1독서의 요나입니다. 요나의 회개에 선포에 즉각 응답하여 살아난 니네베 주민들입니다. 이들의 전격적 회개가 회개의 모범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부였다가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이들이 전격적으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이 그대로 니네베 사람들을 연상케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응답보다 더 좋은 회개의 표현도 없습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갈릴레아 호숫가에 살던 네 어부들이,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삼 부르심의 은총은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만약 세례로 부르심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은 정말 부질없는 상상인 것이지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회개는 바로 전격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전환을 뜻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여정중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충실히 한결같이 따를 때 하느님의 나라 꿈도 더욱 현실화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제가 즐겨 일컫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회개의 시스템같은 하루 일과표의 중요성 강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의 시스템 같은 기도와 일이 균형을 이룬 일과표에 충실함이 우리의 성소를 굳건히 하면서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하는지 요즘 깊이 깨닫습니다. 비단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공동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기도와 일이 균형잡힌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의 준수입니다. 참으로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꿈의 현실화에 이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가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여기 지상의 장소가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잠정적으로  지상에 머무르는 순례여정중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보면 회개의 여정이자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중인 순례자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실현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와 더불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고맙습니다. 회개의 여정에,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지상 삶에 집착하지 말고 참으로 초연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래야 참으로 너그럽고 관대하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처럼” 살자는 것입니다. 솔직한 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니 담아둘 것은 담아둬야 합니다. 이건 위선이 아니라 고귀하고 품위있는 삶의 절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아파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슬퍼도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자취없이, 흔적없이, 가볍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매임없이 자유롭게 무공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쓰레기도 훨씬 적게 내고 살것입니다. 바로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것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라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맑은 의식으로 깨어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수렁에,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니 지상의 순례자로서 회개의 여정에, 귀가의 여정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 나라의 꿈을 현실화하며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1/22(월) 연중 제3주간 월요일 , 되새김 구절

 

1.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잘못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 칠 수 있는 겸손함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아파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슬퍼도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자취없이, 흔적없이, 가볍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매임없이 자유롭게 무공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쓰레기도 훨씬 적게 내고 살것입니다. 바로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것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라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맑은 의식으로 깨어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수렁에,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이수철 신부)

 

1/22(월) 연중 제3주간 월요일 , 제394(제24)일 기도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잘못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 칠 수 있는 겸손함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 2024년 1월22일(월) 1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