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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24일 수요일[(백)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24일 수요일[(백)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심시켰고,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선임되었으며, 1602년 교구장이 되었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 12월 28일 리옹에서 세상을 떠나, 1623년 1월 24일에 안시에 묻혔다.

입당송

에제 34,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본기도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 주교가 목자의 사랑을 실천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형제들을 섬기며
언제나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네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7,4-17
그 무렵 4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6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7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니던 그 모든 곳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의 매와 인간의 채찍으로 그를 징벌하겠다.
15 그러나 일찍이 사울에게서 내 자애를 거둔 것과는 달리,
그에게서는 내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17 나탄은 이 모든 말씀과 환시를 다윗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9(88),4-5.27-28.29-30(◎ 29ㄱ)
◎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라.
○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
○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나도 그를 맏아들로, 세상의 임금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리라. ◎
○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그의 후손들을 길이길이, 그의 왕좌를 하늘의 날수만큼 이어 주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3,8-12)와 복음(요한 15,9-17)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며 비오니
복된 프란치스코의 온유한 마음을 성령의 불로 타오르게 하셨듯이
저희 마음에도 성령의 그 거룩한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세상에서 복된 프란치스코의 사랑과 온유함을 본받아
하늘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성공하는 사람이 반드시 가진 세 가지는?

 

오늘은 연중 제3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의 복음이 무엇인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은총과 진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가 떨어지면 믿음의 씨앗이 자라나서 그 믿는 대로 우리 삶이 이루어지게 되겠죠. 열매를 맺게 되겠죠. 씨가 뿌려지는데 땅에서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씨는 같지만, 땅의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하고, 또 열매를 맺더라도 차이가 30배 60배 100배도 나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는 씨를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자세, 곧 의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길가는 교만을, 돌밭은 육욕을, 가시밭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삼구를 이기지 못한 밭에 떨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국의 마윈이라고 하는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이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윈은 뭐를 해도 항상 떨어졌는데,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도 IQ가 70밖에 안 되는데 엄마가 “초콜릿을 먹을 때 무슨 맛이 안에 들어있을지는 안 보인다. 그러니까 뭐라도 끝까지 해봐라. 한 번 할 때는 최선을 다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성공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마윈에게도 떨어졌고 그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할 때 자녀들에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세속, 육신, 마귀를 없애서 내가 하는 말이 단 한 톨이라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마음을 바꾸어 놓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먼저 길과 같은 마음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길은 사탄이고 교만입니다. 모든 인간의 선택은 행복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탄은 행복의 방향만 틀어 놓습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자기 연민에 빠진 이들은 그 씨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부터 행복하여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연예인이 관객에게 행복을 주어야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당신 자신과 싸우신 것처럼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돌밭처럼 쉽게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철봉을 잡으면서 고운 손바닥을 바라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밭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탐욕에 깃든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투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에 대한 투자를 아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양팔 없는 파일럿 제시카 콕스가 있죠. 이 사람은 양 팔이 없이 태어났지만, 20대 때에 이미 경 비행기 조종사가 됐습니다. 물론 자동차를 운전하고 요리하고 글씨를 쓰고 책을 읽고 수영하고 피아노를 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엄마가 뿌린 “할 수 있다.”라는 씨앗을 잘 키웠습니다. \

 

    자이온 클락이라는 허리 밑부분이 없이 태어난 사람도 카일 메이나드라는 손발이 없이 태어났지만, 엄청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책 ‘변명은 없다’를 읽고는 크게 변했습니다. 처음엔 자기 연민에 쌓여 살았지만, 자신도 메이나드처럼 남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벌써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다음은 육체와의 싸움이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두세 배는 더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는 돌밭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계발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였습니다. 가시밭도 극복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워렌 버핏도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 그러면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든 사람도 1. 이웃 사랑이 행복임을 알고, 2. 자기를 죽여야 함을 알며, 3. 탐욕에서 자유로워야 함을 압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법칙이나 같습니다.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듭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게 될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작년에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성지미사를 많이 봉헌했습니다. 여행사와 현지 안내를 맡은 분이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성당을 미리 예약하였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가 많았습니다. 성당은 규모만큼이나 이야기도 많이 간직하였습니다. 그 성당에서 살던 분들이 성인이 되었고, 그 성당에서 기도하였을 때 많은 치유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성지순례에 함께 한 교우들은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순례의 의미를 돌아보았습니다. 순례 중에 예기치 못하게 성당이 아닌 곳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버스 안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버스가 성전이 되었고, 버스의 좌석이 신자석이 되었고, 운전석 옆에 임시로 세워든 박스는 제단이 되었습니다. 해가 지는 오후에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광야에 있던 바위가 제단이 되었습니다. 햇살을 머금은 언덕은 감실의 등이 되었습니다. 시나이 산의 정상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은 제단을 환하게 비추는 성당의 조명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주님의 사랑은 미사가 봉헌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정성과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의 진심이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곳에 투자하면 높은 수익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몫이 좋은 노른자 땅에 투자를 하면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노른자 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개발계획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맹지에 투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수익이 떨어지게 됩니다. 싼 맛에 손님이 없는 가게를 인수하면 더 큰 손해를 감수하고 되팔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였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의 수가 늘어나면 좋은 씨가 뿌려져 열매 맺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은 성당 분할계획을 발표하기도 하고, 성전 신축을 잘 하는 사제를 능력 있는 사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붉은 빛의 십자가와 예배드리고 나오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교구장님은 ‘2020’을 선포하기도 하셨습니다. 2020년에는 인구대비 신자비율이 20%가 되게 하자는 취지의 말씀이셨습니다. 본당 사제의 인수인계에도 숫자는 중요합니다. 영성체 수, 세례자 수, 교우 수, 교무금, 헌금, 본당 재정도 모두 숫자로 표기됩니다. 많으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고인이 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예수님의 비유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기에 위기가 생기고, 기도와 전례에 대한 미지근한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선교를 등한시 합니다. 참된 개혁은 내적인 각성, 불타오르는 마음에 관한 문제로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 대해 확실히 깨닫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의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각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는 것은 밀물과 썰물처럼 변하기 마련입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어서 교회가 사라진 것 같이 보였지만 말씀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교회는 다시 세워지고, 공동체는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계몽주의와 자본주의가 우리 시대를 압도할지라도 말씀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해서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변하면 그만큼 세상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4-35)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받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엄청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시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 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 중심의 한가정, 참가족, 참사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합시다”-

 

어제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저를 감동하게 한 것은 따뜻한 친절이었습니다.

서비스업, 섬김의 직무는 우리 믿는 이들의 공통적 직무입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최우선적 조건은 친절한 환대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법정스님의 책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나의 종교는 친절함이다. 가능할 때마다 친절하도록 하라. 그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씀입니다.

 

“친절하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플라톤의 말입니다.

 

“친절함이란 작은 행동은 ‘사소함이 만드는 위대한 성공 법칙’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알려줄 것이다.”

톰피터스 말입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입니다.

 

종교의 진수는 친절로써 표현됩니다.

친절한 인품 자체가 치유의 시작입니다.

어제 만났던 두분의 의사가 참 친절했습니다.

한분은 순환기 내과 여의사로 거의 10년을 치료해주는 분이고, 한분은 26년동안 치과치료를 해주는

치과의사로 두분다 한결같이 친절하고 실력 좋은 분들입니다.

 

“약 먹으면 됩니다. 하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양호합니다. 몇년전보다 콩팥기능도 아주 좋아졌습니다.”

혈액검사의 결과와 더불어 순환기 내과의사의 칭찬과 친절한 말에 순간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약으로 산다는 것은 은총으로 산다는 것이니 약먹고 죄짓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새로이 합니다.

새삼 병의 치유에 약보다도 더 좋은 우선적 치유제는 친절, 희망, 기쁨, 감사임을 깨닫습니다.

 

치과병원에서는 의사와 더불어 네분의 간호원들이 신들린 듯 일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복음선포의 현장이요 영적전투 치열한 전쟁터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서비스업, 섬김의 직무에 열심한 아름다운 모습들은 늘 감동을 선사합니다.

월요일이라 이렇게 환자분들이 많으냐 물으니 늘 그렇다 했습니다.

참으로 1.사람좋고, 2.실력좋고, 3. 환경좋은 서비스업의 3대 요소를 지닌 분으로,

매일 제 강론을 읽으며 꼭 답글의 메시지를 보내는 하느님의 뜻을 한결같이 실행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서비스업에 충실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하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종교 유무에 관계 없이 온힘을 다해 이웃을 배려하며 한결같이 친절히 사는 분들,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어제 저녁식사전 뜻밖에 보여준 수도형제들의 형제애가 저를 감동케했습니다.

제 오른쪽 볼 옆에 있는 검은 둥근 반점에 세분의 형제가 동시에 병원에 가보라고 했고,

한 형제는 ‘오상’이라 하며 웃었습니다.

“오상인 줄 몰랐습니다.”

대답하면서 혹시 오상일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쨌든 저에게는 순간적 형제애의 진한 체험이었습니다.

 

어제 강론시 원고에 없던 서두에 나눴던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제입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입니다.

 

저는 말을 바꿔, “미사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제입니다.” 단연코 말하고 싶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웬만한 병은 “하느님 이름을 간절히 부름으로 나았다”는 일화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부의 다음 말씀도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큰 위로였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입니다.”

 

여기에다 성 치프리아누스의 한 말씀도 추가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래서 교부학이 소중합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성염 전 교황청 대사의 설명에 의하면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서사시인 성경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붙여 들려주는 것이 교부학, 성전’이라 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문가인 성염 대사의 업적 역시 불가사의입니다.

지난 30년간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열다섯 권을 라틴어-한글 대조본으로 분도출판사의

교부문헌 총서로 편찬했고, 열권 가량을 더 펴낼 계획이라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83세의 노령인 지금도 하루 열시간 번역하며 공부한다 하니 말그대로 하느님에 취해 사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이란 말마디도 떠오릅니다.

10여년전 성염부부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교수님이 좋다하여 써드렸던 시도 생각납니다.

 

“새벽 숲 

 온갖 새들 맑은 소리

 임의 찬미에 

 밝아오는 아침, 잠깨는 숲

 새로 시작하는 하루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2001.5.29

 

오늘 마르꼬 복음의 장면이 그대로 미사를 연상케하는 분위기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닌 세례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공적 사명은 참으로 유일하게 하느님의 뜻에 인도되었음을 봅니다.

 

시편40장을 인용한 히브리서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전삶을 요약합니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복음의 주고 받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문답이 너무 생생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신후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또 참사람이 되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수행자로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가?

아주 단순명료합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한결같이 따르고 섬기고 닮아가는 분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고 우리는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은혜로운 미사전례를 통해 통감하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한가족’을 이뤄주는 미사보다 더 큰 하느님의 선물은 없습니다.

1인가구가 날로 늘어나는 위기의 시대에 이제 많은 외로운 이들이 하느님의 한가족을 이루는

미사전례를 찾을 거란 예감이 듭니다. 

 

하느님의 인류를 위한 사랑의 대 서사시가 성경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최고의 시인이라 할 수 있고, 우리가 늘 노래하는 시편 성무일도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시이자 노래이자 기도인 시편을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고백할 때

우리는 최고의 시인인 하느님을 닮아 저절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시, 노래, 기도에다가 춤까지 결합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니 바로 제1독서의

샘솟는 열정의 다윗이 그 모범입니다.

 

다윗은 싸움도 잘하고, 시도 잘짓고, 기도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또 여기에다 오늘 제1독에서 보다시피

춤도 잘 춥니다.

주님의 궤를 모시니 너무 좋아 춤을 추는 모두를 갖춘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주님을 위해 온힘을 다해 춤을 추었듯이 온힘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실행했을 다윗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사랑이란 시입니다.

 

“사랑을 

 글로 써내면 시가 되고,

 사랑을 

 색깔로 그리면 그림이 되고,

 사랑을 

 소리로 부르면 노래가 되고,

 사랑을

 몸으로 풀면 춤이 됩니다.”-1998.5.5

 

기도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그대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됩니다.

온힘과 온마음의 사랑으로 봉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한가족 공동체를,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아멘.


1/24(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든 사람도 1. 이웃 사랑이 행복임을 알고, 2. 자기를 죽여야 함을 알며, 3. 탐욕에서 자유로워야 함을 압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법칙이나 같습니다.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듭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게 될 것입니다.(전삼용 신부)

 

2. 씨 뿌리는 이의 비유의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각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는 것은 밀물과 썰물처럼 변하기 마련입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어서 교회가 사라진 것 같이 보였지만 말씀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교회는 다시 세워지고, 공동체는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계몽주의와 자본주의가 우리 시대를 압도할지라도 말씀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조재형 신부)

 

3.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법정스님의 책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나의 종교는 친절함이다. 가능할 때마다 친절하도록 하라. 그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씀입니다.

 

“친절하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플라톤의 말입니다.

 

“친절함이란 작은 행동은 ‘사소함이 만드는 위대한 성공 법칙’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알려줄 것이다.”

톰피터스 말입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입니다.

 

종교의 진수는 친절로써 표현됩니다.

친절한 인품 자체가 치유의 시작입니다.(이수철 신부)

 

1/24(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396(제26)일 기도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법정스님)

“나의 종교는 친절함이다. 가능할 때마다 친절하도록 하라. 그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

“친절하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플라톤)

“친절함이란 작은 행동은 ‘사소함이 만드는 위대한 성공 법칙’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알려줄 것이다.”

(톰피터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도 바오로)

 

종교의 진수는 친절로써 표현됩니다.

친절한 인품 자체가 치유의 시작입니다. 아멘.

 

- 2024년 1월24일(수) 12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