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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23일 화요일[(녹) 연중 제3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23일 화요일[(녹) 연중 제3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96(95),1.6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6,12ㄴ-15.17-19
그 무렵 12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3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4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7 그들은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18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19 그는 온 백성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모든 군중에게
빵 과자 하나와 대추야자 과자 하나,
그리고 건포도 과자 한 뭉치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 뒤 온 백성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4(23),7.8.9.10(◎ 8ㄱㄴ 참조)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그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

복음 환호송

마태 11,25 참조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예수님께서그들에게, “누가내어머니고내형제들이냐?” 하고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제물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6 참조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주간 화요일

 

교통신호등이 있습니다. 파란불에서는 이동하고, 빨간불에서는 멈추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에도 두 가지 색이 있습니다. 전화가 오면 두 가지 색이 표시됩니다. 파란색을 누르면 통화가 되고, 빨간색을 누르면 거부가 됩니다. 친한 사람, 보고 싶은 사람, 꼭 받아야 할 전화는 당연히 파란색을 누릅니다. 모르는 사람, 받고 싶지 않은 사람, 귀찮은 사람의 전화는 빨간색을 누르게 됩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전화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찮다는 이유로, 지금이 편하다는 이유로, 미안한 마음에 빨간색을 누르는 것은 아닌지! 날씨가 추워서, 비가 와서, 너무 더워서, 다른 할 일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전화를 하시는데도 외면한 적은 없는지요? 젊은 신부님이 가끔씩 어머니의 전화를 빨간색을 누르면서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어머니가 늘 귀찮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부님께는 어머니의 사랑이 귀찮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집안 어르신들이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은 이제 집안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사제가 되면 말씀도 높여서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을 축성하기 때문입니다.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을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목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을 통해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또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직을 그만 두게 될 경우에는 세상에서 잘 살면 안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평생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보속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의 헌신과 기도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사랑과 기대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일이 그리 녹녹치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의 의도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면 밭을 제대로 갈 수 없으니 오직 사제직에 충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안의 경조사나, 부모님의 생일이나, 경제적인 문제를 신경 쓰기보다는 맡겨진 일을 먼저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휴가 때도, 쉬는 날에도 집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을 따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제 동료들과 지내는 것이 더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동생 수녀님은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도 휴가 때면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쉬는 날에는 멀리 있어도 찾아뵙곤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효도를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제직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니 유혹이 다가와도 굳건하게 이겨내라는 의미였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하기 보다는 사제직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으라는 의미였습니다. 나태한 삶을 살아간다면 사제직에 머물러 있어도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강론준비를 소홀히 하고, 권위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고, 공동체에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33년간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참 많은 시간들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저 자신의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외로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가족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믿어주었던 친구를 배반하고, 거짓과 모략으로 출세라는 허황된 꿈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얻는 것은 화려한 집이고, 비싼 옷이고, 맛있는 음식이지만 그 안에는 참된 기쁨과 행복이 함께하지 못합니다.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3주 화요일

복음마르 3,31-35

 

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 구절은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짚고 넘어 가야 할 대목이 두 군데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어떤 분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반문합니다.

“아니, 성모님께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아들이?”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대목을 물고 늘어지며 성모님의 평생 동정과 관련된 가톨릭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교부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형제’란 표현은 광의(廣義)의 의미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형제라는 표현 안에는 친형제뿐 아니라 사촌 형제, 팔촌 형제, 더 나아가서

그 이상의 존재들까지도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칭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가 강조하는 예수님의 형제는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 정도로 바라보면 무방할 것입니다.

 

눈여겨 봐야 할 또 다른 대목이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당혹해합니다.

애써 찾아오신 어머니를 홀대하는 듯한 그분의 태도에서 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인 효도에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집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혈육이나 지연 같은 사사로운 정을 끊겠다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인류 역사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어 가장 충실했던 사람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홀대하거나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성모님을 극도로 칭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헤아려 보는 데 있어서는 프로요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의 구체적인 실생활 안에서 실행하는 데는 왜 그리 굼뜬지 모르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22.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이 아닌 피조물, 곧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가기 자신을 앞세우다 자칫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 당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주님!
제 완고함을 꺾으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22.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주님과 함께 영적승리의 삶을 삽시다- 

 

어제 ‘하느님의 말씀 주일’ 교황님의 두 강론 주제 머릿글이 새로웠습니다. 늘 읽어도 깊고 새롭고 아름다운 교황님의 강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희망과 사랑안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도록하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라.”

문득 이 말마디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라.”

아름다운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수도자들에게 하루중 가장 해방감을 느끼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은 아마도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전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찬미가와 강복은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지 평생 삶을 요약하는 하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찬미가2절

“전능하신 하느님, 이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날마다 평생 끝기도후의 강복의 은혜로 선종의 죽음도 맞게 되리라는 예감도 듭니다.

 

어제 하느님의 말씀 주일 강론시,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말씀이라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부득이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전쟁이라고 말입니다. 어디선가 읽은 구절도 잊지 못합니다. ‘청년기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기에는 일하고 싸우고, 노년기에는 병마(病魔)와 싸운다.’는 말마디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인류의 염원과는 역설적으로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된 전쟁이요 흡사 인류사는 전쟁사같습니다. 지금도 안팎으로 계속되는 다양한 전쟁입니다. 어느때 보다 한반도는 전쟁위기라 합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치는 만세육창중 세 번째 만세가 “대한민국-한반도 만세!”입니다.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전쟁이요, 일상의 모두가 정지되고 상처의 치유와 회복도 요원케하는 전쟁의 폐해입니다.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이구동성 말합니다. 

 

우리 수도승 영성에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영적전쟁입니다. 제가 수도생활초부터 참 많이 주의깊게 다뤘던 주제이며 강론중에도 다음 같은 요지로 얼마나 많이 나눴는지 모릅니다. 

 

“우리 수도자는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적전투를 치러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전사, 말씀의 전사, 기도의 전사, 평화의 전사, 찬미의 전사이다.”

 

얼마나 멋진 주님의 평생 전사들인 우리 수도자들의 신원인지요!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이 전사들입니다. 그래서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의 영적훈련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요 온갖 수행들입니다. 특히 하루의 영적전투에서 영적승리를 위한 매일미사은총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문득 요한복음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더불어 우리를 격려하는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아래 바위판 글자도 생각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주님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전사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이 영적전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적수들인 율법학자들의 집요한 공격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영적승리를 폄훼하여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왜곡합니다. 말그대로 가짜뉴스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들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을 밝힙니다. 악의 동맹이 얼마나 강고한데 영리한 사탄들이 결코 갈라서는 분열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수 있다.”

 

바로 여기 힘센 자 사탄을 제압하는 더 힘센 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불세출(不世出)의 영적 전사인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지 강조합니다. 너무나 자명하고 뚜렷한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 악의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고의적, 악의적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래서 성령께 마음을 열고, 성령에 따라 겸손하고 유연하게 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닫아거는 완고함앞에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말그대로 스스로 자기감옥에 갇힌 무지의 수인(囚人)들이 바로 성령을 모독한 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하권은 하느님의 전사로서 다윗의 최종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평생 전쟁터에서 지낸 다윗은 마침내 모두를 평정하고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니 온전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이런 평생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결정적인 분은 하느님이심을 마지막 구절이 분명히 합니다.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사무하5,10)

 

다윗이나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참으로 천하무적 주님의 전사가 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사로서 다윗과 예수님은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평생 전투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피를 흘렸는지요! 반면 예수님은 아무의 피도 흘리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온전히 사랑과 섬김, 겸손과 평화의 영성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믿음과 사랑,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 말씀과 기도로 일치를 이룬 주님의 전사들의 공동체라면 부패도 분열도 없을 것이니, 바로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공동체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무장시켜 당신 성령의 전사, 평화의 전사, 복음의 전사로 세상 삶의 전쟁터에 파견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1/23(화) 연중 제3주간 화요일 , 되새김 구절

 

1.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헤아려 보는 데 있어서는 프로요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의 구체적인 실생활 안에서 실행하는 데는 왜 그리 굼뜬지 모르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주님!
제 완고함을 꺾으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성령을 모독하는 고의적, 악의적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래서 성령께 마음을 열고, 성령에 따라 겸손하고 유연하게 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닫아거는 완고함앞에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말그대로 스스로 자기감옥에 갇힌 무지의 수인(囚人)들이 바로 성령을 모독한 자들입니다.(이수철 신부)

 

1/23(화) 연중 제3주간 화요일 , 제395(제25)일 기도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 2024년 1월23일(화) 5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