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25일 목요일[(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25일 목요일[(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철저히 교육받은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열정적인 사도가 되었다. 8세기부터 거행하여 온 이 축일은 10세기 말 로마 전례력에 들어왔다. 교회는 회심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일치주간'의 마지막 날로 정하였다.

입당송

2티모 1,12; 4,8 참조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맡은 것을 의로운 심판관이 마지막 날까지 지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노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복된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니
오늘 그의 회심을 경축하는 저희가
그의 모범을 따라 진리의 증인이 되고
언제나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2,3-16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1-22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21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놀라며,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수석 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차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여,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다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7(116),1.2ㄱㄴ(◎ 마르 16,15 참조)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5,1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바오로 사도를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주님의 영광을 널리 전하게 하셨으니
이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저희의 믿음도 성령의 빛으로 밝혀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도 감사송 2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갈라 2,20 참조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노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복된 바오로 사도가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교회를 돌보게 하셨으니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에도 그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바오로의 회심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남자를 키워주는 여자의 덕목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감각이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감각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감각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예전에 권투선수 무함마드 알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감각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둘째는 지혜가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평강 공주는 바보 온달을 고구려의 장군이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궁궐에서 배웠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이 잘 된다고 합니다. 솔로몬 왕은 재물과 권력을 원하지 않고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셋째는 용서할 줄 알면 좋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합니다. 비록 상대의 실수로 다툼이 있을지라도 용서할 수 있으면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의 가사를 음미할 줄 알면 좋다고 합니다. 감성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시편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부부가 같은 감성을 나눌 수 있으면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질 것입니다. 다섯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 좋습니다. 배우자가 일을 통해서 성취를 이룰 수 있으면 지친 어깨를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더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여자를 키워주는 남자의 덕목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년 동안 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신문사를 키워주는 직원의 덕목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기본이지만 신앙 때문에 잘못된 것을 감추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 사도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의 눈으로 기사를 검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직언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신문 만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직원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은 덮어주고, 상대방의 장점은 드러내면 좋습니다. 조직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외부의 원인도 있지만 내부의 원인도 크게 작용합니다. 직원들이 서로 도와주고 화목하게 지내면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저는 신문사를 키워주는 직원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회심하여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키우고, 예수님께 사랑받는 신앙인의 덕목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는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셋째는 이제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기꺼이 십자가고 지셨습니다. 회개하고, 회개하였음을 삶으로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교회를 키우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제자는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줄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복음마르 4,1-20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산전수전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의 부모는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 친히 밝힌 것처럼 그는 소아시아 지역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튀르키에 중남부에 있으며, 지중해에 인접한 천연적 항구 도시로서

오래전부터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부모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어린 시절부터 유다인으로서의 탄탄한 가정 교육과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부라고 할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뿐만아니라 바오로는 엘리트 교육을 받기 위해 당시 대스승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기록에 따르면 가말리엘은 유다 최고 법정인 산 헤드린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당대 율법교사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로 인해 최초로 ‘라반’ 영예로운 칭호까지 얻었습니다.

 

이런 조기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차근차근 이수한 바오로였기에, 그는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충실했으며, 온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겼습니다.

 

이런 바오로에세 한 가지 심기 불편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당시 정통 유다인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요 사이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출몰과 확산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유다인들이 그리로 건너가니, 바오로 입장에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정의감과 종교심으로 충만했던 바오로,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 청년이었던 바오로는

즉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유다 최고 의회에 체포영장까지 발급받아 그리스도인들의 척결을 위한 선봉장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바오로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생긴 낙마 사건입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에 그리스도인들이 집결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오로는

즉시 그리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바오로는 갑자기 엄청난 광채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동시에 그는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강렬한 빛으로 인해 그의 눈은 멀어버렸습니다.

 

그 특별한 상황 앞에서 바오로가 보여준 태도는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 난감한 상황 속에서 바오로는 주님께 거듭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꼬박꼬박 응답해주십니다.

 

그 순간 제가 바오로였다면 엄청난 두려움에 까무라쳤을 것입니다.

아니면 잽싸게 줄행랑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도 바오로 사도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오늘 우리에게도 바오로 사도가 온몸으로 체험했던 절절한 회심, 대대적인 삶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끊임없이 주님께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1/24(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르 4,20)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선사된 것’(datum)이요, ‘먼저 베풀어진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열매를 맺는 권능, 곧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선물인 ‘말씀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고, 우리의 소명은 그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자신이 죽어야 맺는 일이요, 또한 그 열매는 자신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매’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게 됩니다.

곧 형제들과의 관계가 열매를 맺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가 됩니다.

그러니 내 형제, 내 공동체, 내 나라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한편,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일구어집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단지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먼저 알아야 할 일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이요, 그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땅을 지배하려들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동시에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는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주님의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 
말씀이 지금 여기, 내 형제와 더불어 내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마르 4,20)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땅을 지배하지도 윽박지르지도 않으며,

하늘을 쳐다보며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며 열매를 맺어가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4.1.24.수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2) 기념일

                                                                                                                           2사무7,4-17 마르4,1-20

 

                                                           하느님 중심의 삶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하기-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결국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대서사시인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목표는

오늘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명실공히 믿는이들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은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둠의 혼란 중에 길을, 희망을 잃고 방황할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영어 한 문장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Christ is password for a happy life”

(그리스도는 행복한 삶의 암호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은 행복한 삶의 암호, 즉 열쇠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없이, 예수님 없이 참 행복은 없다는 것이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오늘 사무엘 하권의 다윗과 복음의 예수님에게,

그리고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에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전쟁으로 찢겨진 세상에서 ‘기도는 믿음의 호흡(Prayer is breath of faith)’ 이라는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위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 삶의 좌표이자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은 성인들의 삶을 대하면 늘 감동하게 됩니다.

성인들의 삶 역시 한결같이 모두가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말그대로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한평생 순교적 삶을 산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55세로 뇌일혈로 선종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마지막 임종어 역시 감동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수, 나의 하느님, 나의 모든 것!”

 

임종어가 성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의 삶에 주인공은 자신임을 밝히며

그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을 통해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렉시오 디비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장의 주어가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그 문장의 일부만 인용합니다.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결코 믿는 이들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서 하느님이 해주신 섭리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참된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주면서 다윗의 무지를 밝혀주시는 나탄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원해서 요셉 수도원에 온 듯 하지만 하느님 친히 인도해 주신 하나하나

수도형제들이 하느님 섭리의 역사임을, 모두가 대체 불가능한 “신(神)의 한 수(手)” 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요셉수도공동체요, 믿는 모든 이들 역시 깊이 들여다 보면

이와 똑같이 신의 한수같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의 해설은 늘 읽어도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삶을 엿볼수 있을뿐 아니라 우리에게 삶의 길을 환히 밝혀주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외치시며 깊이 경청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앞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그대로 예수님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를 밝혀줍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명언도 생각납니다.

환경이든, 누구든 탓하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신망애(信望愛) 삶의 자세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우보천리(牛步千里) 한결같이, 묵묵히 씨뿌리는 삶에 전력해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보여주는

예수님입니다.

 

말그대로 정주영성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결국은 어떻습니까?

짧은 안목으로 실패인 듯 하지만 주님의 긴 안목으로보면 성공인생임을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저 역시 날마다 묵묵히 말씀을 씨뿌리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참 많이도 뿌렸네요.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내고 수확될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어디선가, 언젠가는 열매를 낼 것이며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좌절함이, 절망함이 없이 항구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씨뿌리는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절망은 없다!”입니다.

지성이며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느자를 돕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후반부 내용은 우의적 해설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말씀이 아니라 토양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길바닥 같은 마음밭입니까, 혹은 돌밭, 가시덤불 같는 마음밭입니까?

이런 마음밭들이라면 오늘 복음의 후반부 해설에서 보는 것처럼 좋은 수확은 어불성설입니다.

참으로 “말씀의 평생 학인”이 되어 말씀수행과 실천에 항구했던

참 좋은땅의 마음밭을 지닌자들의 수확은 얼마나 경이로운지요!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말씀을 받아들여, 어떤이는 서른배, 어떤이는 예순배, 어떤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정말 이런 이들이 렉시오디비나의 달인들이자 대가들이요, 예수님을 위시한 성인들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특히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공부하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17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인들중 가장 위대한 최고의 성인이라 합니다.

그는 1665년 교황 알렉산더 7세가 성인품에 올렸고 187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언론인과 저술가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온유함의 성인’, ‘신사성인’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평온과 온유는

본래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밝은 마음, 그리고 친절함이 일상적 행동 양식이 되기까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고의 수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인은 “나는 내 과격한 성격을 극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고백하는데,

말그대로 은총에 협력하여 지칠줄 모르는 항구한 노력으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척박한 마음밭을 20년동안의 노력으로 옥토의 마음밭으로 바꿨다는 것이니 정주영성을 사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경청해야할 성인의 삶입니다. 

 

그의 불후의 작품이 ‘신심생활 입문’, ‘신애론’, ‘영적담화’중 평신도들을 위한 신심생활입문은

수도자들이 애독했던 준주성범과 쌍벽을 이룬 작품이라 합니다.

성인은 무엇보다 성성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습니다.

모든 이가 성인으로 불리었다는 보편적 성소는 400년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천명됩니다.

성인의 영적 가르침이 참 유익하고 심오합니다.

 

첫째는 애덕입니다. 

완덕에 이르는 최고의 길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며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사랑입니다.

 

둘째는 온유의 덕입니다. 

성인은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마디로 남겨주신 중요한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본받으시오. 이것이 모두입니다.

이웃에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며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는 경건한 생활입니다. 

참된 신심은, 영성은 비상한 은총이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이들은 준엄한 생활을, 절식을, 자선을, 묵상기도를 덕행이라 생각하고,

어떤이들은 수동적이고 탁월한 관상기도에, 무상으로 받은 특은을 덕행이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결과를 원인으로, 개울을 샘으로, 가지를 뿌리로 그림자를 실물로 착각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완덕을 알지 못한다.”

 

넷째는 영성의 다양성입니다.

영성의 다양성이 신심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완덕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고

하느님께 가는 길도 여러 가지라 했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세상을 떠난 수덕하는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달성해야할 목표임을 강조했습니다.

 

다섯째, 성인은 감정을 다시 일깨움으로 지성에 치우친 신심행위가 좀더 따뜻한 정감을 되찾도록 노력했습니다.

 

여섯째, 경건한 인문주의 신심운동의 고취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실재에 대하여 과도한 엄격함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엄격함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영적발전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성대가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요 성인의 영성을 계승한 요한 돈 보스코 성인이 설립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수도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인들처럼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1/25(목)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되새김 구절

 

1.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오늘 우리에게도 바오로 사도가 온몸으로 체험했던 절절한 회심, 대대적인 삶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끊임없이 주님께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마르 4,20)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땅을 지배하지도 윽박지르지도 않으며,

하늘을 쳐다보며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며 열매를 맺어가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이영근 신부)

 

4.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공부하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17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인들중 가장 위대한 최고의 성인이라 합니다.

그는 1665년 교황 알렉산더 7세가 성인품에 올렸고 187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언론인과 저술가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온유함의 성인’, ‘신사성인’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평온과 온유는

본래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밝은 마음, 그리고 친절함이 일상적 행동 양식이 되기까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고의 수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인은 “나는 내 과격한 성격을 극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고백하는데,

말그대로 은총에 협력하여 지칠줄 모르는 항구한 노력으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척박한 마음밭을 20년동안의 노력으로 옥토의 마음밭으로 바꿨다는 것이니 정주영성을 사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경청해야할 성인의 삶입니다(이수철 신부)

 

1/25(목)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제397(제27)일 기도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하느님께서는 나를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멘.

 

- 2024년 1월25일(목) 9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