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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28일 주일[(녹)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28일 주일[(녹)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매년 1월 마지막 주일은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해외 원조 주일'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2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고자 이 주일의 2차 헌금을 해외 원조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남미 등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해외 원조 사업에 쓰인다.

오늘은 연중 제4주일이며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스승이요 악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원자로 성자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질병과 기아, 전 지구적 기후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기로 다짐하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입당송

시편 106(105),47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대영광송>

본기도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나는 예언자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18,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16 그것은 너희가 호렙에서 집회의 날에 주 너희 하느님께 청한 것이다.
그때에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시는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 불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17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한 말은 옳다. 18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
19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20 또한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5(94),1-2.6-7ㄱㄴㄷ.7ㄹ-9(◎ 7ㄹ과 8ㄴ)
◎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
○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 ◎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

제2독서

<처녀는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7,32-35
형제 여러분, 32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33 그러나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4 그래서 그는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5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마태 4,16
◎ 알렐루야.
○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복음 말씀을 따르는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주님의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참되게 실천하며, 세상에서 약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을 먼저 보살피게 하소서.

2.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정의로우신 주님, 공직자들에게 지혜와 사랑의 은총을 주시어, 그들이 자신의 사명을 올바로 깨닫고, 국민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일에서 친절하고 정성을 다하게 하소서.

3. 해외 원조 주일을 맞아, 가난한 나라의 국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온유하신 주님,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호하시어, 생명을 지켜 주시고, 저희는 가진 것을 나누며 인류애를 실천하고 공동선 실현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4. 본당 사도직 단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저희 본당 사도직 단체들을 굽어살피시어, 각 단체들이 서로 연대하여 공동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기쁘게 봉사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1 : 파스카 신비와 하느님 백성>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이는 파스카의 신비로 이루어진 주님의 위대한 업적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31(30),17-18 참조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우리는 주님의 일보다 세상일을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처럼 주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기원한 대로 주님의 일만을 걱정하며 살아갑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를 다니기 위해서 물속에 있는 다리는 쉼 없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은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뒤에서 수고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도록 수고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81년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서울을 신청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쟁 국가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개최 도시는 나고야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1964년에 동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미 개최하기로 했던 아시안 게임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면에서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힘이 강했고, 우리의 힘은 약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올림픽 유치 위원회의 위원장인 고 정주영 회장은 유치단을 이끌고 독일 바덴바덴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88 올림픽 개최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했던 손기정 선생님도, 당시 독일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차범근 선수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함께 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 유치단은 올림픽 위원들을 만났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선진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지금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곧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여러분의 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을 도와주십시오.” 선진국의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이 개발도상국입니다. 대한민국이 올림픽 유치를 하면 이제 곧 여러분의 나라도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발도상국이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올림픽 위원들에게 일본의 기술의 상징이었던 소니 시계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올림픽 위원들의 방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당시 바덴바덴에 있는 꽃집의 꽃들을 대부분 사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은 시계로 대한민국은 으로 올림픽 위원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1981년 올림픽 위원회 사마린치 위원장은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88 서울 올림픽은 이렇게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분들의 땀과 눈물 위에서 개최될 수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 원리와 기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리와 기초입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4주일

복음마르코  1,21-28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에 베이스캠프로 유명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그 어떤 도시보다도 더 자주 들르셨으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카파르나움으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카파르나움 회당은 이미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회당 안에는 예수님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더러운 영이 들렸으니, 일단 외양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시달리다 보니 얼굴도 초췌했을 것입이다.

눈동자도 충혈되고 행동거지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다들 그를 슬슬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 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윽고 능력과 권위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말씀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심연 깊숙한 곳에 꽂힙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더러운 영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영들에게 명령하지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단 한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마르코 4,35-41

 

내 안에 잠든 예수님을 깨워라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 출신에다가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를 불안과 공포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한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다가가 당신의 그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항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지요. 그래서 제 마음은 늘 기쁘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느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또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깨워주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잠을 자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왜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배는 몹시 흔들리고 물이 들이차는 상황이라 억지로 자는 척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계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당신을 부르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것이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자아의 욕심입니다.

나의 힘만으로 무언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도 어떤 때는 명예욕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을 다 빼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우리 각자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힘이 빠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요?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한 여인을 좋아해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이 아니라 믿고

그 여자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것도 인연인지라

다시 한 번 청원해 보았습니다. 그때 수락하여 둘은 결혼하였습니다.

 

만약 그 여자를 잃는 두려움 때문에 10년 동안 쫓아다녔다면

그만큼 감정의 고통을 겪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길 줄 알았기에 10년을 평화로이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맡긴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가라앉히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겁을 내는 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잃으면 잃는 것이고 얻으면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해는 염분이 많아서 몸이 절대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해에 들어갈 때 꼭 지켜야 하는 수칙은 뜨기 위해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몸을 움직이면 얼굴이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눈에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수영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튀어 눈에 들어가면 엄청 아픕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만 그래도 신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고 말합니다(필립 1,21-24 참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 자체가 자신의 모든 힘을 뺐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십니다.

 

이 경지까지 가기는 힘들지라도 나에게 어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오늘 복음을 되새기며 주님께 더 의탁하도록 합시다.

 

내 안의 잠든 예수님을 깨웁시다. 하도 자주 깨워서 예수님만 깨어있고

나는 편안히 잠자는 사람처럼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주간 토요일

 

-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지난 저녁 수도형제에게 떼제공동체 마르코 수사님이 향년 92세로 1월19일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사셨던 분이고 여기 요셉 수도원을 참으로 사랑했던 분이시며 특히 동정녀 공통 저녁 성무일도중 셋째 후렴을 참 좋아했던 분입니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자리잡았도다.”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고 한결같은 정주의 믿음을 살아가는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자들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어떻게 사는가 묻는 다면 저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 대부분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말할 것입니다. 저는 이에 덧붙여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말할 것입니다. 흡사 첩첩산중 하루하루 산을 넘는 듯, 살아 갈수록 힘든 것 같습니다. 특히 평생 매일 강론을 쓰며 갖는 느낌입니다. 

 

바로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면 하루하루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뿐일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조금씩 보이는 듯 합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였습니다. 이래서 몇해전부터 많이 피정강의나 매일강론중 강조해온 말마디가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인생여정을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있느냐의 확인입니다. 

 

이런 시도가 하루하루 깨어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2014년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지 벌써 10년째입니다. 그동안 참 많은 강론 주제가 “-여정” 이었고 오늘 강론 제목도 주저없이 “믿음의 여정-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으로 정했습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희망도 사랑도 모두가 배움의 대상입니다. 육신은 날로 노쇠해가도, 믿음은 날로 보고 배워 살아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성장 성숙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참 좋은 교과서가 바로 오늘 복음과 제1독서 다윗의 일화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걷잡을수 없이 일어나는 풍랑의 현실이 우리 주변이나 내 마음 상태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요즘 시국을 보면 총선을 앞두고 얼마나 치열한 경쟁인지 흡사 내전상태를 방불할만큰 혼란스럽고 뜨겁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이런 거센 풍랑속에서도 배 고물에서 태연자약(泰然自若),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얼마나 깊은 믿음의 표현인지요! 제자들의 안절부절 못하는 혼란한 반응과 예수님의 침착한 대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흡사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한 장면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이 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물론 그대로 믿음 부족한 우리의 모습같습니다. 정말 늘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이 있었다면 차분하게 대응했을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권위있는 말씀으로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명령하시니 그대로 하느님의 전능하신 모습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바람은 멎고 고요해지니 얼마나 통쾌한 장면인지요! 제자들의 충격에 이어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제자들은 믿음 부족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의 다음 반응은 오늘 우리가 하루 내내 품고 묵상해야할 화두입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참으로 이런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이라면 천하무적의 믿음일 것입니다. 새삼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제자들 역시 이런 사건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크게 믿음을 배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여정에 참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됐을 것이며 우리 역시 믿음의 여정에 항구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의 승승장구하던 믿음의 여정에 급제동이 걸리는 충격적 장면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범죄는 불가능함을 배웁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밧세바의 남편을 제거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로 취한 다윗의 사악함이, 잔인성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이 유혹에 빠지면 얼마나 악해질수 있는지, 그렇게 믿음 좋다는 다윗인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참으로 방심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다윗의 범죄에 하느님의 실망이 얼마나 컷겠는지요! 주님은 나탄을 통해 적절한 비유를 들면서 다윗의 죄상을 폭로하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할지 길게 열거합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런 큰 죄를 지었는지 다음 말씀이 주님의 실망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죄를 저질렀느냐?”

대죄를 지었지만 즉각적인 회개가 역시 다윗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아마도 이 대사건은 다윗의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좌초하여 무너지기 보다는 심기일전 겸손한 믿음의 계기로 삼아 분투의 믿음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을 다윗입니다. 문득 인도의 성자 간디는 “I was wrong!(내 잘못했다!)의 명수(名手)였다”는 일화가 생각나네요. 정작 공동체내 관계에서 “고맙다, 감사하다”란 말마디보다 더 필요한 말마디가, 앙금을 말끔히 씻어내는 “미안하다, 잘못했다, 죄송하다” 란 회개의 말마디라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의 제자들처럼 다윗의 믿음의 여정은 다시 시작됩니다. 죄는 용서받았지만 치뤄야할 보속은 첩첩산중이요 다윗의 위대한 점은 앞으로 보겠지만 이 죄과로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죽을 힘을 다해 믿음으로 버텨내고 견뎌내면서 잘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끝까지 보속을 다한 다윗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이런 고난과 시련을 통해 더욱 겸손하고 순수하고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새삼 삶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어려움을 믿음의 여정중 믿음 성숙(成熟)의 계기로, 겸손과 비움의 계기로 삼는다면 전화위복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51장 다윗의 통회 시편은 다윗이 지은 대죄에 아파할 때 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평생 기도로 바쳤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도, 평탄대로의 믿음도 없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중에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처방보다는 예방이 백배낫습니다.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 회개하는 마음으로 온힘을 다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공동전례기도보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죄없는 의인’보다 ‘회개한 죄인’을 더 사랑하십니다. ‘부패한 성인’은 없어도 ‘회개한 성인’은 많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인생 부패해져 아무 쓸모도 없어집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우리 안팎의 풍랑을 고요하게 하시어 성공적 인생항해여정중 마침내 천상 고향에 이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1/28(일)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되새김 구절

 

1.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조명연 신부)

 

2.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영들에게 명령하지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단 한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 복음을 되새기며 주님께 더 의탁하도록 합시다.

내 안의 잠든 예수님을 깨웁시다. 하도 자주 깨워서 예수님만 깨어있고

나는 편안히 잠자는 사람처럼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전삼용 신부)

 

4.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중에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신부)


 

1/28(일)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제400(제30)일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오늘 내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게 하소서.

내가 사용하는 말이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하게 하소서.

 

- 2024년 1월28일(일)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