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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15일 금요일[(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15일 금요일[(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54(53),3-4 참조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본기도

하느님,
나약한 저희를 이 제사로 도와주시니
저희가 구원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여
그 은혜를 새로운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4(33),17-18.19-20.21과 23(◎ 19ㄱ)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
○ 그의 뼈를 고스란히 지켜 주시니, 뼈마디 하나도 꺾이지 않으리라.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4,4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하여졌으니
이 제사를 세우신 주님께 더욱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에페 1,7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었네. 그분의 풍성한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사로 저희가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갔으니
옛 악습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의 종들을 굽어보시어
주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이들을
천상 은총으로 자애로이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알다라는 말을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첫째, 아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2000년 넘게 이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것들 중에는 기억 상실증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커다란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우리는 기억력에 의지하기 보다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억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거나, 기억으로 길을 찾았는데 요즘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길을 찾습니다. 자꾸 사용하고, 만나고, 생각하면 기억도 업그레이드됩니다.

 

둘째, 아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맥가이버,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작품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인데 문제 해결 능력은 좋지 않습니다. ‘길치, 기계치, 디지털 문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쉽게 조립하는 의자도 1시간 넘게 고민하면서 겨우 조립하였습니다. 그것도 엉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바로 문제 해결의 능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해결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마귀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만, 탐욕, 분노, 시기, 식탐, 나태, 색욕의 마귀들이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소경, 듣지 못하는 사람, 열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은 본인이나, 조상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열려라)’입니다.

 

셋째, 아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요리사가 사용하면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살던 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으로 인종차별을 하였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잘 안다는 율법학자와 대사제 그리고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미가 비록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사랑으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재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억을 넘어,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요한 7,1-2.10.25-30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누군가가 이유도 없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내 목숨을 해치려 할 때

가까스로 피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작정해서 나를 폄하하고 나를 음해하고

나를 못살게 군 끔찍한 경험이 있는지요?

 

그럴 경우 통상 즉시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체로 동태복수법에 따라 처신하든지 아니면 더 센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생명의 위협 상태에 놓이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내세우다 보니,

특히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예식 등을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파기하다보니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노기등등하던지, 얼마나 살기가 번득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방보다는 위험부담이 조금은 덜한 갈릴래아 지방에서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매일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인류 구원 사업의 완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이윽고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 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명절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축제를 지내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남몰래

예루살렘 입성을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또 난리들입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떠벌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끝도 없는 불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도를 넘어선 적개심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비애와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려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하려고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끝까지 귀를 굳게 막은 그들은 절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4주간 금요일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

(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새로운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14.사순 제4주간 목요일                                                             탈출32,7-14 요한5,31-47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영적 승리의 삶-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사세요!”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어디로 가야 할 길 내게 알려주소서,

 내 영혼 당신을 향하여 있나이다."(시편143,8ㄴ)

 

올해 3월의 성 요셉성월이, 사순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4월10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을 앞두고 신자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정말 깨어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어느때 보다 항구히, 간절히 깨어 기도해야, 회개해야,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나라도 삽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상하면 저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가톨릭 기도서> 1.성호경, 2.주님의 기도,

3.성모송, 4.영광송 순서대로 기도를 바친후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로 살기위해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사랑을 담아 양팔을 활짝 펴들고 만세육창의 간절한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어제 “하”씨 성(性)의 이름을 지닌 분과 나눈 기발한 덕담에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도 하닮(하느님 닮기)의 여정을 살 수 있길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하느님과 같은 ‘하’씨 성이라 하닮의 여정을 충실히 살아내고 계시지요! 축하드립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영적 승리의 삶을 사세요!”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의 말처럼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불림 받은

유일무이한 성소자들입니다.

 

불림 받은 자로서 과연 몇%,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를 실현하며 살고 있는지요?

모세나 예수님은 제가 볼 때 100% 참나를 실현한 성소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모세의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모습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양상은 다소 달라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 모세는 역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새로운 중재자이자 우리의 영원한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때 두분께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대로 오늘날도 반복되는 인간들 모습입니다. 

 

정말 계속되는 전쟁에, 악순환의 반복에, 눈먼 자본주의 문명의 야만시대(?)에 과연 무지한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인간성의 진보가, 영성이 바탕되지 않은 인공지능의 결과는 어떠할지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다산 어른과 논어의 공자의 말씀이 감로수처럼 삶의 지표가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가장 어른스러운 태도는, 사람에 대해 미리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다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희망이기에 사람에 절망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이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남이 나를 속일까,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지 마라.

다만 먼저 깨달아 아는 사람이 현명하다.”-논어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깨달음은 빛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서서히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만일 제1독서 탈출기에서 중재자 주인공 모세가 빠져 버린다면, 역시 요한복음에서

중재자 예수님이 빠져 버린다면 상황은 캄캄한 어둠일 것입니다.

두분의 찬연한 빛이 무지와 허무의 심연의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는 현실입니다.

 

정말 탈출기의 모세는 참사람의 원형이요 섬김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을 100% 발휘하는 모세의 삶이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무지한 백성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같은 처지로 참으로 진퇴양난의 위기입니다. 

 

답은 위의 하늘 향한 기도뿐입니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배은망덕의 무지한 못난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한 모세의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와 기도가

결국 하느님을 움직여 심판을 멈추도록 합니다.

참으로 목숨을 걸고 하느님과 담판하는, 애원의 기도를 바치는 모세입니다.

백성들의 배은망덕에 진노한 하느님을 만류하는 모세의 애원이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고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하느님 답지 못하다’며

하느님의 약점을 들먹이는 이런 목숨을 건 애원의 기도가 가능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둘도 없는 파트너 모세처럼 기도하는 부모가, 지도자가, 어른이 교회뿐 아니라

각계 각층에 참으로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킨 마지막 애원이 절정입니다.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겠다.’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정확한 사실(facts)에 근거한 모세의 설득에 감동한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던 재앙을 거두니

하느님과 영적전쟁에 승리한 ‘기도의 사람’ 모세입니다.

새삼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영적 승리를 위해서는

모세처럼 성서의 하느님 말씀에 정통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다음은 요한복음에서는 유다인들에게 사면초가의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위한 증언을

명명백백하게 밝힘으로 이들과의 영적전쟁에 승리합니다.

1.세례자 요한이, 2.아버지께서 완수하라 맡기신 일들이, 3.아버지께서.

4.성경이 예수님 당신을 증언함을 밝히시며 이들의 부족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며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과연 무엇이, 누구가 오늘의 우리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인가 묵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우리를 증언해 줄 것이며 이웃도 우리를 증언해 줄것입니다.

만세육창을 바치는 저로 말하면 하느님이, 예수님이, 나라가, 교회가, 성모님이, 수도원 공동체 형제들이,

또 매일 삶을 담아낸 강론들이 저를 증언해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음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흡사 우리를 향한 충고 같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이들의 성서말씀 공부 부족과 믿음 부족을 맹렬히 꾸짖는 예수님입니다.

기도의 싸움에서 하느님을 이겨낸 영적 승리의 모세요, 유다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

예수님의 영적 승리로 대미를 장식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고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로, 하느님의 지혜와 힘으로 무장했을 때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구원을 가지시고, 저를 찾아 주소서.”(시편106.4). 아멘.


3/15(금) 사순제4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억을 넘어,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조재형 신부)

 

2.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예수님을 향한

살의(殺意)는 더해갔고, 더 이상 드러내놓고 다니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당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하는 세 명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명절은 오늘날 추수감사제 비슷했습니다. 그 해 수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보낸 오랜 체류 기간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일주일간 지속된 이 명절기간에 유다인들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매일 아침 봉헌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제물을 바치며 사람들은 하느님께 풍부한 비를 내려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에 따르면 유다 사회 안에서 이 명절은

1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명절이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숱한 배신과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물겨워 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당신을 핍박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희망, 더 큰 사랑을 위해 꿋꿋이 그리고 당당히 뚜벅뚜벅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0)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다산 어른과 논어의 공자의 말씀이 감로수처럼 삶의 지표가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가장 어른스러운 태도는, 사람에 대해 미리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다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희망이기에 사람에 절망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이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남이 나를 속일까,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지 마라.

다만 먼저 깨달아 아는 사람이 현명하다.”-논어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깨달음은 빛입니다.(이수철 신부)

 

3/15(금) 사순제4주간 금요일, 447(제77)일 기도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3월15일(금) 9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