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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16일 토요일[(자) 사순 제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16일 토요일[(자) 사순 제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8(17),5-7 참조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저승의 올가미가 나를 휘감았네. 곤경 중에 나 주님을 불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본기도

주님,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오니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1,18-20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2-3.9ㄴㄷ-10.11-12(◎ 2ㄱ)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 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 ◎
○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
○ 하느님은 나의 방패, 마음 바른 이들을 구하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신 심판자, 하느님은 언제든 진노하시는 분. ◎

복음 환호송

루카 8,15 참조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화해의 제물을 받아들이시어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저희 마음을 자비로이 주님께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1베드 1,18-19 참조
우리는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사로 저희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온전히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의 백성을 보살피시고 천상 은총을 풍성히 베푸시어
다가오는 거룩한 신비를 올바로 준비하며
보이는 위로로 도움을 받고
보이지 않는 선을 향하여 달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아침 산보 길에 뉴스와 강의를 듣는 것이 저의 일상입니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늘 하던 대로 뉴스를 들으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먹통이 되었습니다. 핸드폰을 꼈다 켜면 되곤 했기에 그렇게 했는데도 여전히 먹통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에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산보를 마무리 했습니다. 다행히 사제관에 설치된 와이파이 덕분에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 핸드폰에 문제가 있어서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핸드폰 문제인줄 알았습니다. 통신사 대리점엘 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리점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핸드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신사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정부는 그것이 사이버테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핸드폰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통신사에 있었는데 애꿎은 핸드폰만 탓했습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새벽에 자고 있는데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문자를 하거나, 전화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일의 전후 사정을 잘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열심히 살았는데 고난과 멸시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잘못 판단하셔서 악인들에게 힘을 주고, 악인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닌지 살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탄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한국에서라면 소비자들의 민원도 빗발치겠지만, 통신사도 오전 중에 문제를 해결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은 나라가 커서 그런지 소비자들의 민원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통신사도 아예 대리점 문을 닫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도 워낙 바쁘시기에 자신의 고난과 아픔을 미처 모르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께 민원을 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사람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권력으로, 재물로, 업적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습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행복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니코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요,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예언자요, 메시아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만이 율법과 계명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듣지도 보지 못했던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박해하려했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잘못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일의 종류나 일의 가치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장소와 일을 하는 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자세입니다. 아무리 누추한 곳이라 해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은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그곳에 탐욕과 분노가 있다면 그곳은 악취가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이 오면 어두운 땅 속에서 파란 새싹이 나올 것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저 풀과 꽃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더욱 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 4주간 토요일

요한 7장 40-53절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끝까지 거부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를 기점으로 인해 예수님은 인간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을 기점으로부터 서양 역사의 기원인

서기(西紀, Anno Domini-A.D)를 세기 시작합니다.

 

역사 시간에 기원전 이란 말로 통용되는 "B.C" 역시

Before Christ,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인류 역사 안에 한 획을 긋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찾은 사람,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분으로 인해 인생 쫄딱 망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분으로 인해 인생 종치고 죽음의 길로 접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자유 의지를 무척이나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인간 측의 자유의지에 일임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존재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사람,

괜한 똥고집을 잘 부리는 사람,

뭔가 특별한 것만 찾는 사람,

대단한 것들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쉽게 쉽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님으로 기꺼이 고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술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분의 일생을 내 삶 안에 깊이 각인시키겠다는 맹서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4주간 토요일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6개월쯤 전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휩싸이어 급박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리라.”

(요한 7,37-38)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여러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섰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은 그들을 보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라고 말합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분의 말씀은 어째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변화되는 것일까?

대체 그 신비로운 힘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온전히 하느님을 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권위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지만, 바로 그 안다는 사실에 걸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칫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말씀을 거부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르면서 알 뿐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사실, 지적 정보의 한 파편, 아니 한 파편의 한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저 1미크론(1/1000 mm), 아니 1나노(10억분의 1)만큼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믿어버리는 이 어리석음의 ‘선입견’이 때로는 하느님의 계획까지도 거부하고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자칫 ‘안다’고 믿어버린 ‘선입견’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으로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알아듣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께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15.사순 제4주간 금요일                                           지혜2,1ㄱ.12-22 요한7,1-2.10.25-30

                                                             참 자기 인식

                                                    -하느님 탐구, 참나의 탐구-

 

“주님, 당신은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니,

 가슴 깊이 슬기를 가르치시나이다.”(시편51,8)

 

하루하루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기도하라, 회개하라,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3월 성요셉성월에 3월31일 부활대축일을 앞둔 지금의 사순시기는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참으로 하루하루 선물에 감사하며 힘껏 살아야 할 참 소중한 때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입니다.

성인은 수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고 성인이 있는 곳 어디나 성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신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그러니 어디에나 하느님이 계신 성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꽃자리 성지입니다.

어제 어느 형제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감동했고 다시 배웠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요즘 아버지께서 성서 40주간에 참여하십니다.

연세가 89세이신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침 5시에 일어나셔서 묵주기도와 작은 성무일도를 바치시고,

평화방송에서 하는 미사에 참례를 하십니다.

그리고 저녁에도 성무일도를 바치시는 아버지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영원한 현역의 형제입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한 일상의 성인입니다.

믿음생활에는 제대가 없고 졸업이 없습니다.

 

죽어야 제대이고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전사이자 학생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이자 죽을때까지 공부해야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89세 고령에도 성서공부에 열중하시니 참 놀라운 주님의 평생학인입니다.

이렇게 보고 배울 노령의 아버지를 둔 형제님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싸움입니까? 무지와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참나로 살기위한 영적전쟁입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참나를 알기위한 공부입니다.

참나를 알기위한 평생전투요 참나를 알기위한 평생공부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이라 했습니다.

주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이자 이런 이들이 의인이요 현인입니다.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악인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제 신원을 새로이 확인할 때 마다 읽어보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고백 기도중 한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교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삼중신원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되겠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형제들과의 날로 깊어지는 전우애(戰友愛)와 학우애(學友愛), 그리고 형제애(兄弟愛)가

내적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참 자기인식도 참나의 삼중 신원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의인이요, 주님도 참나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 악인입니다.

의인을 시험하는 무지한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는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대한 처방은 단 하나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알아가는

삶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서서히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도 무지의 악인들에 포위되어 있는 의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 지혜서의 반복같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영원히 지속될 무지의 악과의 전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 압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참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의인이자 현인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아야 참나의 신원을 알게 되고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 또한 우리의 평생과정입니다.

 

무지의 치유,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날마다의 미사전례보다 평생교육에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

“더불어,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아멘.


3/16(토) 사순제4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이제 곧 이 오면 어두운 땅 속에서 파란 새싹이 나올 것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저 풀과 꽃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더욱 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조재형 신부)

 

2. 쉽게 쉽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님으로 기꺼이 고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술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분의 일생을 내 삶 안에 깊이 각인시키겠다는 맹서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복음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 압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아멘.(이수철 신부)

 

3/16(토) 사순제4주간 토요일, 448(제78)일 기도

 

복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아멘.

 

- 2024년 3월16일(토) 2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