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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20일 수요일[(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20일 수요일[(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8(17),49 참조
주님, 당신은 성난 민족들에게서 저를 구하시고, 제게 맞서 일어선 자들에게서 들어 높이셨으며, 포악한 자들에게서 구출하셨나이다.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참회의 생활로 거룩해진 자녀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다니 3,52ㄱ.52ㄷ.53.54.55.56(◎ 52ㄴ)
◎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 주님,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당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영광의 성전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어좌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커룹 위에 앉으시어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하늘의 궁창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 환호송

루카 8,15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봉헌하는 이 제사를 받으시어
주님의 이름에는 영광이 되고
저희에게는 구원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수난 감사송 1 : 십자가의 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수난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무궁한 힘으로
성자의 권능과 세상 심판이 드러났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콜로 1,13-14 참조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우리를 옮겨 주셨네. 우리는 그분의 피로 속량되어 죄를 용서받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오늘 천상 신비의 영약을 받아 모셨으니
저희의 나쁜 습관을 고쳐 주시고 언제나 저희를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바라는 이 백성의 간청을 들어주시어
풍성한 자비를 끊임없이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나이를 먹으면서 하지 않아야 할 말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잔소리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지내기 마련입니다.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 심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잔소리가 늘어 가면 늘어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멀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배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자주 여세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철이 들면서부터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되었으니 저를 믿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의 침묵이 더욱 무겁게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반복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좋은 이야기도 자꾸 들으면 따분하고 귀찮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지난날의 허물을 들추어내면서 험담하고, 불평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부부간에 다툼이 있을 때라도 지금 현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예전에 있었던 일까지, 특히 친정과 시댁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꺼내면 다툼은 싸움에까지 이르고,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기도 합니다. 셋째는 나 때는이라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저도 예전에 선배들이 나 때는이라고 하면서 훈계를 하면 귀찮았습니다. 돌아보니 저도 가끔 나 때는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일 수 없다고 합니다. ‘나 때는이라는 말은 서랍 속에 깊이 넣어두고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를 경청하면 좋겠습니다. 본당 모임에서, 사목회에서 이 3가지 말만 조심하면 사목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우리 삶의 등대가 되고, 지치고 목마른 영혼에 단물이 되지만 제게 특히 가슴을 뛰게 했던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저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 상선벌악(賞善罰惡)은 문화와 문명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품성구로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로 정했습니다. 성실하게, 정당하게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사람이 득세하고, 불로소득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력을 사유화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셨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 신학교에서 강의 시간에 이 성경말씀을 들었는데 마치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본 것 같았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는 있지만 참된 자유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자유는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는 상태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희망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었지만 라자로에게 인색했던 부자는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부자청년은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비록 불가마 속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 놓았기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은 기꺼이 가진 것을 주님께 봉헌했으니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희망 때문에, 열정 때문에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면 감옥에 있어도, 병중에 있어도, 가난할지라도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8,31-42: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사순 시기에 큰 도움을 줄

명저가 출간되었습니다.

‘남겨진 단 하나의 사랑’ ‘발타사르, 예수를 읽다’ ‘세계의 심장’ 등 불멸의 저서로 유명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가 지은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가톨릭 출판사)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대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 사상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현으로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지만,

안타깝게도 수여식 이틀 전에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우리 말로 번역하신 분은 존경하는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님이십니다.

가르멜 수도자이신 윤신부님 역시 대단한 신학자이십니다.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지만, 다들 엄두도 못 내는 신학 서적들을 꾸준히 번역하고 출간하는데 진심인

신부님의 노력 앞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옮긴 이의 말에서 윤신부님은 아주 간략하고도 명쾌하게 죽음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각인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에 ‘영원’을 각인하려는 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영원’의 조각을 새기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마치 냉엄한 사형 집행인처럼 말입니다.

영원을 갈망하지만 그 시작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비극적인 존재, 인간의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성부에게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을 위임받아 이 세상에 강생하시고,

친히 우리가 겪을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써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이 아닌 영원을 향한

희망의 아이콘으로 바꿔 주신 분, 그리스도야말로 결국 한 줌의 재로 영원히 사라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선사해 주신 분이자, 인류의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

 

윤신부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

신앙인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해도, 죽음은 여전히 이승에서 우리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마감하며 해체하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에서 부정적인 측면보다 더 강한 긍정적인 의미를 봐야 하고 또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신비적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에 동참함으로써 죽음 속에서 부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긍정적인 실제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과 깊이 일치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에게 죽음은 자신을 ‘결정적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시키는

기쁨과 희망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해 깔끔하고도 명료하게 선을 그어주신 신부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 떤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 앞서 죽음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친히 죽음을 끌어안으신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이미 당신 자신 안에 우리의 죽음을 간직한 채 수난하고 돌아가셨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존재가 간직한 고뇌와 무능함

그리고 당신을 향한 열망이 부족한 우리의 내면을 제대 삼아 당신 자신을 성부께

온전히 봉헌하셨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이는 이미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으로의 초대요, 동시에 진리와 자유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듯이 그분의 생명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19.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2사무7,4-5ㄴ.12-14ㄱ.16 로마4,13.16-18.22 , 마태1,16.18-21.24ㄱ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

                                                 -성가정 교회 공동체-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로 전하리라.”(시편89,2)

 

사순시기 및 3월 성 요셉 성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3월19일은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주보성인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이 1987년 3월19일 설립됐으니 설립 37주년이 되는 날이자,

2014년 3월19일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됐으니 승격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 영예스럽고 자랑스런 성 요셉입니다.

저절로 3월 성 요셉 성월에 자주 부르는 “성 요셉 찬양하세” 성가 280장이 생각납니다.

3절까지 가사가 다 좋지만 1절만 인용합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 

 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 

 언제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교회 수호자가 된 요셉 성인을 생각하면 저는 늘 하는 “만세육창”에다

오늘은 “성 요셉 만세!”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교회 위기때 마다 큰 빛을 발한 성 요셉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교회가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도움이 됐던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 성 요셉입니다.

 

1870년 교황 복자 9세는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889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보호자이자 가장의 모범으로 공포했고,

1920년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 요셉을 노동자와 임종자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요셉을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55년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는 5월1일 노동절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정했고,

1961년 교황 성 요한 23세는 성 요셉 축일에 회칙을 발표하고 성인에게 공의회를 보호해 달라고 청했고,

198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요셉이 ‘구세주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고,

2020년 교회가 코로나 19펜데믹으로 혼란을 겪을시, 교황 프란치스코는 ‘보편교회의 수호자 성 요셉 선포

150주년’을 맞이하여 그해 12월8일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발표하고 다음해 2021년 12월8일까지

1년을 ‘성 요셉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참으로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 마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셨던 성 요셉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가득 지니게 됩니다.

성가정 공동체하면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이 생각나듯,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하면 참 좋은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자작 애송시 두편의 불암산이 상징하는바 성가정 공동체의 배경인 성 요셉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하나 침묵에 잠긴 저녁 불암산을 보며 쓴 짧은 자작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바로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같은 성 요셉입니다.

세 측면에 걸쳐 성인의 위대한 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요셉 성인은 참 큰 분이십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분, 한마디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성인의 자비롭고 지혜로운

신속한 처신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고 감동스럽습니다.

자비와 분별의 지혜는 함께 갑니다.

 

다음 구절에서 성인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럽납니다.

 

‘마리아의 남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성 요셉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기가 아니라

마리아의 안위요 마리아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자비하고 지혜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성 요셉입니다.

 

둘째, 요셉 성인은 참 깊은 분이십니다.

참으로 잘 들으시는 경청의 겸손한 성인이십니다.

귀기울여 주님 천사의 말을 겸손히 경청하는 성 요셉입니다.

 

깊은 산이 좋은 산이듯, 겸손의 깊은 사람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고 있는 경청과 겸손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속내를 당신 천사를 통해 소상히 성 요셉에게 드러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성 요셉의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예수란 이름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2독서 사무엘 하권의 예언자 나탄의 다윗을 향한 예언이 흡사 요셉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존재가 오늘 복음의 다윗입니다.

그대로 우리 구원자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사실 나탄의 이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2000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톨릭 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셋째, 요셉 성인은 참 고요한 분이십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바로 요셉의 고요한 믿음이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버금가는 요셉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브라함에 대한 고백은 요셉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요셉의 믿음,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아브라함의 믿음, 요셉의 믿음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에서

요셉의 순종과 믿음이 통쾌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일하시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믿음의 순종의 협조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이요 요셉의 믿음의 순종이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을 것입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이신 성 요셉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참 사람의 모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성 요셉이요, 자비와 지혜, 경청과 겸손,

순종과 믿음의 성 요셉입니다. 그대로 이런 양부 성 요셉을 보고 배웠을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날로 주님을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삶을, 

1.자비와 지혜의 삶, 

2.경청과 겸손의 삶, 

3.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아멘.


3/20(수)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성경 말씀은 모두 우리 삶의 등대가 되고, 지치고 목마른 영혼에 단물이 되지만 제게 특히 가슴을 뛰게 했던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저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 상선벌악(賞善罰惡)은 문화와 문명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품성구로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로 정했습니다. 성실하게, 정당하게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사람이 득세하고, 불로소득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력을 사유화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셨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자유는 상태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희망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었지만 라자로에게 인색했던 부자는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부자청년은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비록 불가마 속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 놓았기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은 기꺼이 가진 것을 주님께 봉헌했으니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희망 때문에, 열정 때문에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면 감옥에 있어도, 병중에 있어도, 가난할지라도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2. “만일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 떤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 앞서 죽음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친히 죽음을 끌어안으신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이미 당신 자신 안에 우리의 죽음을 간직한 채 수난하고 돌아가셨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존재가 간직한 고뇌와 무능함

그리고 당신을 향한 열망이 부족한 우리의 내면을 제대 삼아 당신 자신을 성부께

온전히 봉헌하셨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을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삶을, 

1.자비와 지혜의 삶, 

2.경청과 겸손의 삶, 

3.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아멘.

(이수철 신부)

 

3/20(수) 사순 제5주간 수요일, 452(제82)일 기도

 

복음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

성실하게, 정당하게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사람이 득세하고, 불로소득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력을 사유화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셨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었지만 라자로에게 인색했던 부자는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부자청년은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비록 불가마 속에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 놓았기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은 기꺼이 가진 것을 주님께 봉헌했으니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자유는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희망 때문에, 열정 때문에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다면...

감옥에 있어도, 병중에 있어도, 가난할지라도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경우, 자존감에 손상을 입는 경우, 

그 모든 것에는 '나'라는 틀이 작동돼 마음의 불꽃, 화가 일어납니다.

이 틀을 부숴버릴 때, 상대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비로소 연민이 생기며,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상대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인정 할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됩니다.

 

- 2024년 3월20일(수) 9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