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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22일 금요일[(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22일 금요일[(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1(30),10.16.18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짓눌리나이다.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본기도

주님,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나약한 탓에 저지른 죄의 사슬에서 저희를 인자로이 풀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또는>
하느님,이 사순 시기에 교회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그리스도의 수난을 경건히 되새기게 하시니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저희가 외아드님이 가신 길을 충실히 따라마침내 구원의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소서.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8(17),2-3ㄱ.3ㄴㄷ-4.5-6.7(◎ 7 참조)
◎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 ◎
○ 주님은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시옵니다. 찬양하올 주님 불렀을 때, 저는 원수에게서 구원되었나이다. ◎
○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삼키며, 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 ◎
○ 곤경 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 ◎

복음 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제대에 나아가
이 영원한 제사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수난 감사송 1 : 십자가의 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수난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무궁한 힘으로
성자의 권능과 세상 심판이 드러났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1베드 2,24 참조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우리가 죄에 죽고 의로움에 살게 하셨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병이 나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를 보호하시어
온갖 해로운 것에서 언제나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이 종들을 은혜로이 지켜 주시어
모든 악에서 풀려나
평온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언론은 제2의 신이다.(Mass Media is the second God.)'이란 말이 있습니다.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언론이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언론이 사회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크고 중요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언론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견을 형성하고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언론은 권력과 통제의 수단으로도 작용할 수 있으며, 이는 언론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력에는 부정적인 면도 존재합니다. 언론이 편향적이거나 왜곡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거나 잘못된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언론이 권력에 의해 조작되거나 통제되는 경우도 있어서, 그 영향력이 악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언론은 제2의 신이다"는 표현은 언론이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그 영향력과 책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편식과 과식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언론에 의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론에 따라서 맹목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는 편향된 언론은 아닌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그렇게 보입니다. 파란색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권력에 의해서 사유화되는 언론이 가지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권력과 야합한 언론에 의해서 단죄되었고,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의 힘에 의해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매카시 광풍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증거도 없이 매카시는 우리 사회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언론은 그것을 공개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언론의 힘에 의해서 사람들의 거룩함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언론도 권력과 야합했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폭도들이 소요를 일으켰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과 균형 잡힌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편식과 과식을 피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옳은 길로 인도하였지만 권력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거짓 예언자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이 단죄를 받고, 악인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는 세상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권력에 야합한 언론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거룩하신 분이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언론의 선동에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깨어 있는 시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언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 10,31-42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즘 계속 봉독되는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입니다.

이제 지상에 머무실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는데, 끝까지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죽이려고 돌까지 손에 드는 동족을 향한 예수님의 비애감은 혹독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에 초막절 축제를 성대하게 벌이는데...이 축제 후에

또 하나의 축제가 남아있습니다.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봉헌 축제입니다.

점령군들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을 유다 마카베오가 독립 항쟁을 벌여 탈환한 뒤 실시된

성전 정화작업의 결실로 새롭게 건립한 제단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존경하는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님 표현에 따르면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때는 겨울이었는데,

예수님의 생애에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불신과 거부의 찬바람이 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달아

내년 봄 파스카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아레오파고스, 즉 토론의 장소라고 할수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자

유다인들은 즉시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끌어내어 로마에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 정체를 말씀하실 때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정체에 대해 처음부터 무시하고 불신한 것입니다.(송봉모, 요한복음 산책. 제3권,

바오로딸 참조)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는 거듭거듭 밝히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다. 나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손에 돌까지 들었습니다.

눈앞에까지 다가온 구원과 영생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저 그런 예언자 중에 한 사람입니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역사 속의 한 인물입니까?

나의 창조주요 구원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십니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5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요한 10,35)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21.목요일 사부 성 베네딕도(480-547) 별세 축일     

                                                                                                                 창세12,1-4 요한17,20-26

                                                        떠남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니,

 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시편92,13-14)

 

수십년 전 어느 목사님의 “신부님의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대해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라는

즉각적 대답에 내심 만족했고 지금 또한 그러합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남의 죽음입니다.

잘 떠남의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선물같은 삶에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이 참으로 현명하고 중요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이 청춘이면 몸도 청춘이 된다. 꿈과 열정이 사라지면 죽음이다.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소극적인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노령에도 뇌세포는 증식한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 확실히 늙음은 나이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사는 동안 하루하루 진실히, 성실히, 절실히 살아야 하겠지만, 늘 떠남을 염두에 두고

늘 준비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잘 떠나는 뒷 모습은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추억으로 길이 남습니다.

 

이런 잘 떠남의 선물보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오래전 “꽃마다 반갑고 아름다운 것”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꽃마다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폈다지기 때문이다.

 일년내내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인생이

 그리도 반갑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살다 떠나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는 인생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아,

 꽃지므로 꽃 좋은 줄 알겠다

 죽음 있어 삶이 선물인 줄 알겠다.

 짧은 인생

 날마다 꽃처럼 반갑고 아름답게 살다 떠날 일이다.

 내 영원한 고향 

 주님의 집을 향해”-2006.4

 

또 하나 “떠남의 여정”을 노래한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한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폭으로 또 넓은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떠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2012.9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을 지냅니다.

성인의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고 우리들 또한 보고 배웁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평생 삶은 “떠남의 여정”으로 요약할 수 있고, 마지막 죽음의 떠남은

아름다운 떠남의 절정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거룩한 죽음이 아니라, 평소 하느님을 향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한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제37장은 전부 성인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죽음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한 단락만 인용합니다.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병세가 날로 심해지자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았기에, 주님의 전사답게 하늘 향해 기도중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어디로 떠날지 모른다면 어찌 이런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이 가능하겠는지요.

어느 분이 아름다운 수의를 입은, 믿지 않았던 죽은 친구를 떠나 보내며 탄식했다는 일화가 문득 생각납니다. 

 

“옷은 잘 입었는데 갈데가 없구나. 어디로 가나?”

 

오늘 성인의 별세 축일 미사전례중 말씀 배치도 떠남의 여정에 잘 맞춰져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인도하에 하느님의 복이 되어 떠나는 아브람의 모습이 정말 멋집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둔 아브람의 떠남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러면 너는 복이 될 것이다...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의 복이 되어 길을 떠나 떠남의 여정에 오르니

이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니 제 나이와 같네요.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떠남의 사람, 아브람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고별기도는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오늘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세상을 떠나기전 아버지께 바치는 유언과도 같은 느낌의

장엄한 예수님의 고별기도가 소개됩니다.

1.자신을 위한 기도, 2.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3.믿는 이들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오늘 복음의 고별기도를 요약하면 믿는 이들 모두가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떠나 보내시며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인 이 미사를 우리 인류에게 남겨 주심으로

아드님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성체를 영할 때 마다 속으로 불러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 177장 2절입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아멘.


3/22(금)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거룩하신 분이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언론의 선동에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언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조재형 신부)

 

2.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불신과 거부의 찬바람이 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달아

내년 봄 파스카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아레오파고스, 즉 토론의 장소라고 할수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자

유다인들은 즉시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끌어내어 로마에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는 거듭거듭 밝히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다. 나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손에 돌까지 들었습니다.

눈앞에까지 다가온 구원과 영생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저 그런 예언자 중에 한 사람입니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역사 속의 한 인물입니까?

나의 창조주요 구원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십니까?(양승국 신부)

 

3.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8)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요한 10,35)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래전 “꽃마다 반갑고 아름다운 것”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꽃마다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폈다지기 때문이다.

 일년내내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인생이

 그리도 반갑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살다 떠나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는 인생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아,

 꽃지므로 꽃 좋은 줄 알겠다

 죽음 있어 삶이 선물인 줄 알겠다.

 짧은 인생

 날마다 꽃처럼 반갑고 아름답게 살다 떠날 일이다.

 내 영원한 고향 

 주님의 집을 향해”-2006.4.(이수철 신부)


 

3/22(금) 사순 제5주간 금요일, 454(제84)일 기도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언론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을 따라야 할 신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론'을 추종하지 않게 하소서.

'언론'에 따라 사람을 응징하고 판단하고 비난하지 않게 하소서.

'언론'의 힘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순명하며 살게 하소서.

 

- 2024년 4월22일(금) 9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