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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21일 목요일[(자) 사순 제5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21일 목요일[(자) 사순 제5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히브 9,15 참조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유산을 받도록 빌어 주시네.

본기도

주님,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 저희를 자애로이 보호하시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한결같이 거룩하게 살아 영원한 상속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7,3-9
그 무렵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5(104),4-5.6-7.8-9(◎ 8ㄱ)
◎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그분이 이루신 기적과 이적을, 그분 입으로 내리신 판결을 기억하여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

복음 환호송

시편 95(94),7.8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굽어보시어
이 제사가 저희의 회개와 온 세상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수난 감사송 1 : 십자가의 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수난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무궁한 힘으로
성자의 권능과 세상 심판이 드러났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로마 8,32 참조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 친아드님마저 아낌없이 내어 주셨으니,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자비를 간청하오니
현세에서 저희를 길러 주는 이 성사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이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물리치고
나날이 주님 계명을 지키며 더욱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댈러스로 와서 몇 가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보일러에 가스가 새어나와서 새 보일러로 교체했습니다. 음식물 분쇄기가 고장 나서 새 분쇄기로 교체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누수가 있었고, 싱크대 바닥도 새것으로 교체했습니다. 37년 전에 크라운을 했던 안쪽 어금니도 통증이 있어서 치과에 갔더니 발치를 해야 한다고 해서 발치했습니다. 다행히 맨 안쪽이라서 새로 해 넣지는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형제님들과 대화하는 중에 사제관이 나의 군기를 잡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님 중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제관이 신부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모양입니다. 덕분에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사제관이 저를 환영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습니다. 맞습니다. 세상 일, 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가 늘 걱정이 한 가득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의 짚신이 안 팔릴까 걱정이었습니다. 해가 나면 우산 장수 아들의 우산이 안 팔릴까 걱정이었습니다. 따뜻한 이웃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 장수 아들의 우산이 잘 팔리니까 좋지요? 해가 나면 짚신 장수의 짚신이 잘 팔리니까 좋고요.” 맞습니다. 생각하나 바꾸면 몸도 마음도 한결 편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들을 주었습니다. 느닷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어야 하나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저 따랐을 뿐입니다. 조카 롯과 함께 사는데 살림이 늘어나니 조카의 사람들과 자주 분쟁이 생겼습니다. 양들은 늘어나는데 땅이 좁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조카 롯은 비옥하고, 기름진 땅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척박하고, 모래가 많은 광야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조카 롯이 선택한 땅은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비록 기름지고 비옥했지만, 그곳에는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손님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가 생길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이 노래졌을지도 모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금쪽같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순종하였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군기를 잡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을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특별히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분은 결혼하고 몇 년 후에 남편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우연히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남편은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남편은 몸은 깨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깨어난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힘들게 했다고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짜증을 내는 그런 남편을 23년간 수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남편만으로도 힘에 벅찬데 시어머니께서도 쓰러지셔서 한집에 2명의 중환자를 돌봐야 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도 10년 이상 돌봐드려야 했던 그 분은, 왜 하느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원망을 참 많이 했다고 합니다. 병중에 시어머니도 세례를 받아서 함께 묵주기도를 했지만, 원망과 고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그분의 품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남편도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조금 숨을 돌리나 했는데 이제는 본인이 암에 걸려서 큰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남편 복도 없었고, 시어머니 복도 없었는데 자신까지 암에 걸렸으니 정말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컸다고 합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돌아와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십자가를 주셨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51-59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순시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들 사순 판공 성사는 보셨나요? 사순시기와 대림시기, 적어도 두 번 고해성사를 보도록

강력히 초대하는 판공성사 문화는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만이 지닌 특별한 전통입니다.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시절, 사제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지내던 교우들을 연 1~2회 정도 방문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런 전통이 정착된 것이 판공 성사입니다.

 

판공성사 때는 각 교우 앞으로 판공성사표가 배부되는데, 이는 교우들의 성사 생활 실태를 파악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됩니다. 어떻게 성사를 강요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상 모든 교우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게 되게 되어있는데,

따라서 판공성사만 빼먹지 않아도 고해성사와 관련된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족시키는 것이니,

참으로 바람직한 전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숙제나 의무로서의 판공성사가 아니라 기쁨과 축제로서의 판공성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는데...그것이

참으로 여의치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마치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고해소 앞으로 나아갑니다.

매번 똑같은 죄를 짓고, 고백하고,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구심을 품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해성사의 참된 의미와 참맛을 알게 해주는 책,

고해성사에 대한 가치와 지평을 넓혀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고해성사의 일곱 가지 비밀’(비니 플린 저, 전경훈 역, 성바오로)

 

저자의 고해성사에 대한 은혜롭고 감미로운 체험들과 가르침을 듣고 있노라니,

빨리 고해성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햇살을 비추어 빛과 열을 전합니다.

이같이 하느님은 늘 사랑하시고, 누구에게나 빛과 열을 전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과 그분 사랑에서 우리 자신을 갈라놓을 때에도 하느님은 달라지지 않으십니다.

 

달라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죄란 바로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는 나를 동굴 속으로 데려갑니다.

고해성사는 나를 동굴 밖으로 꺼내줍니다.”

 

“사제는 단지 사죄(赦罪)를 선언하기 위해 고해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영적 안내자,

스승, 교육자의 역할을 맡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풀려나고, 치유되고, 회복되고, 용서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해소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네가 고해소에 갈 때면, 내가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나는 단지 사제에게 감추어져 있을 뿐, 네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나다.

너는 내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제는 가림막일 뿐이다.

내게 쓰임 받는 사제가 어떤 사제인지 따지지 마라. 고해성사 때 내게 하듯 네 영혼을 열어라.

그러면 나는 네 영혼을 내 빛으로 채울 것이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고해소에서 나올 때, 하느님의 현존이 나를 꿰뚫었고, 나는 하느님의 세 위격이 내 안에 머무심을 느꼈다.

아니, 알아차렸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들이, 심지어 이미 고해성사를 받았음에도 계속 되돌아와

머릿속을 맴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죄가 정말로 용서받은 것인지 미심쩍어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분명히 용서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함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니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바퀴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에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20.사순 제5주간 수요일                                              다니3,14-20.91-92.95 요한8,31-42

 

                                         진리가 너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의 여정, 예닮의 여정-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9,29)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설사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다.”

 

오늘 3월20일 다산 어른의 말씀도 좋습니다.

자유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눈물이 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무책임한 자유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자유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로와 인간이고 자유로와 행복입니다. 자유가 있을 때 인격이지 자유가 없으면 인격도 없습니다.

과연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자유도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천지차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존재임을 알림이 자유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바라시는 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인 그리스의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묘비명도 특이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평생 자유를 추구했지만 자유롭지 못한 작가였습니다.

우리 수도생활을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하고 날로 자유로워지는, 자유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삶인지요?

자유를 추구하지만 세상것들에 중독되어 세상의 노예되어, 종되어 살아가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된다’라는 말마디는 저의 지론입니다.

 

광야인생 셋 중 하나 즉, 성인이 아니면 폐인, 또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된 자들 얼마나 많은지요!

잘못된 자유의 헛된 추구가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으로 괴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제 저는 얼마전 영국의 유명한 베네딕도회 출신의 바실리오 흄 추기경(1923-1999)에 대한 글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느 유다인 랍비의 흄 추기경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내가 흄 추기경을 생각할 때 나는 유다이즘의 초기 성인들의 말을 떠올린다.

그들은 묻는다: “누가 영웅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드는 이다(One who turns strangers into friends).”

 

그것이 바로 흄 추기경의 위대한 은총이었다.

그는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감정으로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들였다.

너희는 흄 추기경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너희들은 한없이 넓어짐을 느낄 것이다.

 

그는 하나의 친구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는 삶안에서, 죽음의 면전에서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했다.

흄 추기경은 참으로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든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만나는 낯선이들을 누구나 친구들로 만들었던 흄 추기경이야말로 참으로 매력적인 참 자유인입니다.

대하는 이들을 누구나 무장해제시켜 본연의 편안하고 자유로운 참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참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역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또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자유 역시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참 다양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참 자유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참 자유의 비결은 이 하나뿐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서울대 교표인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란 말마디도, 하버드 대학교의 로고중

 "진리(VERI TAS)" 란 말마디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저절로 자유가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의 제자로 사는 선택이 우선입니다.

바로 이때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이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진리의 자유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혼자 격리된 자유가 아니라 더불어 주님안에 머물러 제자들로 살 때 비로소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떠나서는, 더불어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참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의 여정은 우리 각자 날로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알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불간분의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진리없는 자유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라 물으니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은 침묵뿐이었을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함께 갑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협조자”라 불리길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

역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진리에 몸바치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불가의 고 성철 대선사 역시 익명의 크리스천이자

대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참 자유를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교회에서 죄의 종으로 머문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때 정녕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님과 일치를 깊이해주는 미사은총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진리자체이신 예수님을 떠나 자유의 추구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은 행위일뿐입니다.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함이 참 자유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이 참 자유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자유로이 거니는 세 청년들 참 자유인의 상징입니다.

 

세 청년이 ‘이슬 머금은 바람 서늘한’ 불가마 속에서 한 일은 오늘 독서에서 생략됩니다만

단 하나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드리며 찬미하였다.’

 

새삼 불가마 같은 공동체 생활 중에도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는데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 찬미에 전념할 때 온전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기절초풍하여 그 사유를 묻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입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참으로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온전한 자유인들의 공동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귀신이 곡할 기적에 놀란 임금의 하느님 고백이 감동입니다.

 

“사르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내셨다.”

 

참 자유는 섬김의 자유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섬김의 삶에 충실할 때 천하무적의 진리의 용사로서 참 자유인의 삶이겠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진리이신 당신 안에서 섬김의 삶에 충실함으로

날로 자유로워지는 예닮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6,10). 아멘.


3/21(목)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네가 고해소에 갈 때면, 내가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나는 단지 사제에게 감추어져 있을 뿐, 네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나다.

너는 내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제는 가림막일 뿐이다.

내게 쓰임 받는 사제가 어떤 사제인지 따지지 마라. 고해성사 때 내게 하듯 네 영혼을 열어라.

그러면 나는 네 영혼을 내 빛으로 채울 것이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고해소에서 나올 때, 하느님의 현존이 나를 꿰뚫었고, 나는 하느님의 세 위격이 내 안에 머무심을 느꼈다.

아니, 알아차렸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분명히 용서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바퀴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에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영국의 유명한 베네딕도회 출신의 바실리오 흄 추기경(1923-1999)에 대한 글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느 유다인 랍비의 흄 추기경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내가 흄 추기경을 생각할 때 나는 유다이즘의 초기 성인들의 말을 떠올린다.

그들은 묻는다: “누가 영웅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드는 이다(One who turns strangers into friends).”

 

그것이 바로 흄 추기경의 위대한 은총이었다.

그는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감정으로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들였다.

너희는 흄 추기경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너희들은 한없이 넓어짐을 느낄 것이다.

 

그는 하나의 친구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는 삶안에서, 죽음의 면전에서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했다.

흄 추기경은 참으로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든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만나는 낯선이들을 누구나 친구들로 만들었던 흄 추기경이야말로 참으로 매력적인 참 자유인입니다.

대하는 이들을 누구나 무장해제시켜 본연의 편안하고 자유로운 참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참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이수철 신부)

 

3/21(목) 사순 제5주간 목요일, 453(제83)일 기도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고해소에서 나올 때, 하느님의 현존이 나를 꿰뚫었고,

나는 하느님의 세 위격이 내 안에 머무심을 느꼈다.

아니, 알아차렸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지 않게 하소서!

나의 죄는 용서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없어졌음을 알게 하소서.!

하느님의 사랑이 무량광대함을 알게 하소서.

 

- 2024년 3월21일(목) 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