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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12일 금요일[(백) 부활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12일 금요일[(백) 부활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묵시 5,9-10 참조
주님, 주님은 당신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저희를 속량하시어,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가 되게 하셨나이다.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성실한 사람들의 희망과 빛이시오니
간절히 비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맞갖은 기도와 찬미의 제사로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5,34-42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4.13-14(◎ 4ㄱㄹ)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 환호송

마태 4,4
◎ 알렐루야.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가족이 드리는 제물을 자비로이 받으시고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로
저희가 받은 것을 잃지 않고
영원한 선물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로마 4,25 참조
우리 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자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2주간 금요일

 

1991년 사제서품을 받고 33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대부분 지금은 없거나, 다른 것들로 바꾸었습니다. 자동차는 르망, 엑셀, 아반테, 코란도, 소나타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에 오면서 소나타는 필요한 분에게 주고 지금은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마련해준 산타페를 타고 있습니다. 서품식에 축성 받았던 성작은 교구청에서 근무하면서 복음화 학교에 기증했습니다. 컴퓨터는 데스크 탑을 쓰다가, 2000년부터는 노트북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볍고, 휴대하기에 편하기 때문에 노트북을 선호합니다. 지금은 노트북 3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관에 하나는 집무실에 하나는 여행 갈 때 사용합니다. 노트북은 제게는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강론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핸드폰은 1995년부터 사용했습니다. 30년 동안 11개의 핸드폰을 사용했습니다. 책은 읽으면 원하는 사람에게 드리기도 하고, 대부분 놓고 왔습니다. 2번 이상 읽는 책은 성경 말고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33년 동안 제 곁에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서품식에서 입었던 서품제의입니다.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랬지만, ‘서품제의 만큼은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 입고 갈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없거나 바뀌었듯이 저의 외모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모하면 좋겠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조금씩 익어가고 있습니다. 염색을 했던 머리카락은 팬데믹을 지나면서 하얀 머리카락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백발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2006년부터 안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은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33년 전의 모습을 앨범에서 보면 새 사제의 모습입니다. 열정과 패기는 있지만 멈춰야 할 때를 몰랐던 젊음이 보입니다. 지금 핸드폰에 저장된 모습을 보면 열정과 패기는 줄었지만 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구분하는 원숙함이 느껴집니다. 거룩한 변모는 아니지만 이 시간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33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하느님께서 제게 숨을 불어 넣어주신 마음입니다. 때로는 유혹에 몹시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마음입니다.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물속으로 빠져들었듯이,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늘 그렇듯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백성에게 존경 받던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명예롭게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질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의 욕망이라는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욕망 때문에 전쟁과 폭력이 벌어지고, 그 욕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이 죽어가기도 합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저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고, 풍족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기에 영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좁은 문은 아닙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겸손과 인내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섬김과 상생입니다. 그 깃발 아래 있으면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습니다. 사탄의 깃발아래 있으면 모두가 먹고도 충분히 남을 보리떡이 있어도 10억 명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2024년 나해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세례의 상징이라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대그룹 장가 아들을 참교육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아버지까지

죽게 된 박새로이가 3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아버지의 꿈을 이룰 15년 목표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꿈은 작은 가게 하나 갖는 것이었습니다. 박새로이는 장가 그룹을 파괴하고 자신에게

오히려 무릎 꿇게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마음의 문을 열어서 동료들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위해 헌신한 한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됩니다. 

 

이 드라마는 복수의 이름으로 박새로이의 성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아를 복종시키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란 결론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에 도전하게 만드는

힘은 누군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박새로이는 대기업을 무너뜨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전의 객기만 있던 청소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계속 무너지는 것만으로는 자존심만 강해질 뿐입니다. 자존심은 성장하며 자존감으로 바뀝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성장의 시험대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의 사람들이

먹지 못하고 배고파하는 것을 보시며 필립보를 시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시험하는 것일까요? 

“나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널 위해 죽을 거야. 그러면 넌 나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겠니?”

 

그러나 제자들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들을 먹일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어도 그럴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다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면 이제 이러한 사람이 됩니다.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그곳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님은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3실링으로 고아원과 병원 등을 전 세계에 수백 개 지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나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그것 아니면 이기지 못할 자아와의 싸움이 중요합니다.

참 자유는 주님과 함께 꿈을 이뤄나가는 데서 얻어집니다. 

 

얼마 전에 『더 높은 기도』 책 홍보 행사를 했습니다. 북콘서트라고도 하고 출판기념회라고도

합니다. 많은 분이 오셔서 그 짧은 시간에 1,300권의 책을 사 주셨습니다.

저는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홍보하고 주인공 역할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튜브 생방송을 하는 중에 노래도 세 곡씩이나 했습니다. 그러면서 느꼈습니다. 

‘많이 성장했구나!’

 

잘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긴장도 했습니다. 아침에 고춧가루를 팍팍 넣고 끓여 먹은

라면 때문인지 속이 쓰려왔습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 앞에서도 노래를 못 하던 저였습니다. 자아가 강했기에 실수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봉사자분들과 함께 세 시간 동안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습니다.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그냥 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은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 할 모습입니다.

그러며 주님과 함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겠다는 꿈이 저의 자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감이 ‘세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배고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꿈속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결단이 있은 다음의 삶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삶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주님과 함께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십시오.

진짜 성공은 그 과정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나의 성장과 자유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어'(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11.목요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1030-1079) 기념일 

                                                                                                                           사도5,27-33 요한3,31-36

                                                         어떻게 살 것인가?

                                                            -예닮의 여정-

                                               “주님을 믿어라, 주님을 사랑하라”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그 찬미가 항상 있으리라.”(시편34,1)

 

어떻게 살 것인가? 강론때 자주 인용했던 물음입니다.

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라 닮아갈 때 비로소 참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물음만 있고 답이 없어 도저히 사람이 될 길이 난망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파스카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유일한 통로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36년동안 성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봤던 게 아마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일 것입니다.

 

‘하늘과 산’은 제가 참 많이 인용했던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은 파스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하늘과 산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 관계를 상징합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과연 날로 계속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관계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에 관한 묵상 내용이 우리의 신원 이해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바로 위에서 오시는 분이,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이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반면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의 일치의 여정이, 날로 위에서 오시는 하늘이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참여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을 살아도 욕망따라 살다보면 자기를 잃고 괴물도 야수도 악마도 될 수 있고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다” 라는 말마디는제 지론이기도 합니다.

역시 오늘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삶에서 무엇을 추구했느냐에 따라 죽음의 무게도 달라진다.

태산과 같은 죽음이 있고, 깃털과 같은 죽음도 있다.”

 

하느님을 추구했느냐 세상 것들을 추구했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열사(烈士)는 명예를 위해 죽는다”

 

어제 읽는 어느 초대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거룩한 몸은 영적이며 빛이라, 당연히 위로 향합니다.

세상의 몸은 무겁고, 언제나 아래로 처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영적인 것들을 붙든다면, 그것들은 여러분을 위로 데려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것들을 붙든다면, 그것들은 여러 분을 아래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위에서 오시는, 하늘에서 오시는 파스카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하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도 고무적이요 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위에서 오시는, 하늘에서 오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땅위에 살지만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로 이미 땅위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이들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요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최고회의에서 대사제가 심문할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하는 사도들은

땅에서 살지만 천상에 사는 신원임을 드러냅니다.

땅위에서 이미 천상의 하늘나라를 체험하며 살기에 사도들의 샘솟는 용기에 확신에 찬 힘찬 증언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이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들의 핵심 선포내용이요 짧은 요약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친교관계에 있는 사도들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가능한 자발적 사랑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는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폴란드의 수호성인인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성인은 1030년에 태어나 1079년에 순교하셨으니 49년 생애를 사셨습니다.

저는 성인들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반드시 성인들의 생몰연대를 들여다 보며

제 나이와 비교해 보며 분발의 계기로 삼곤합니다.

 

저는 성인보다 무려 26년을 더 살고 있네요.

스타니슬라오는 ‘국가와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후에 주교가 된 스타니슬라오는 잘못됨이 있으면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두려움 없이 책망하고,

신자들이 종교적 생활에 열심토록 했으며, 먼저 솔선수범해 좋은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성인은 열심히 기도하며 재를 지키고 엄한 고행을 행하고 자선사업에 힘쓰며 성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므로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의 덕에 감복해 감히 그의 말에 거역하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주교는 뛰어난 언변으로 왕과 농민들의 죄악, 특히 역사상 폭군으로 유명한 블레슬라우 2세 왕의

부도덕한 행동과 불의한 전쟁을 꾸짖었고, 왕은 스스로 사과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다시 과거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합니다.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반역죄로 사형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개적인 반대를 계속했고

마침내 왕을 파문합니다.

이에 1079년 5월8일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성 미카엘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왕은 부하 병사들과 잠입하여 창검을 휘두르며 주교를 직접 살해 합니다.

 

백성들은 주교의 용감한 순교의 태도를 보고 성인으로 공경하고 왕을 부당한 자로 낙인찍어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합니다. 

 

헝가리로 도망갔던 블레슬라우 2세는 아마도 헝가리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남은 일생을 보냈던 듯 합니다.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시성된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자

수호성인이 됩니다.

순교하기 까지 예언직에 충실했던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역시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로 땅에서 살았지만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하늘나라를 사셨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중, 날로 깊어가는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지상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 하시고,

 넋이 꺾인 이들을 구원하신다.”(시편34,19). 아멘.

 


4월12일(금)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되새김 구절

 

1.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겸손과 인내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섬김과 상생입니다. 그 깃발 아래 있으면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습니다. 사탄의 깃발아래 있으면 모두가 먹고도 충분히 남을 보리떡이 있어도 10억 명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조재형 신부)

 

2. 주님과 함께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십시오.

진짜 성공은 그 과정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나의 성장과 자유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반역죄로 사형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개적인 반대를 계속했고

마침내 왕을 파문합니다.

이에 1079년 5월8일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성 미카엘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왕은 부하 병사들과 잠입하여 창검을 휘두르며 주교를 직접 살해 합니다.

 

백성들은 주교의 용감한 순교의 태도를 보고 성인으로 공경하고 왕을 부당한 자로 낙인찍어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합니다. 

 

헝가리로 도망갔던 블레슬라우 2세는 아마도 헝가리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남은 일생을 보냈던 듯 합니다.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시성된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자

수호성인이 됩니다.

순교하기 까지 예언직에 충실했던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역시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 하시고,

 넋이 꺾인 이들을 구원하신다.”(시편34,19). 아멘.(이수철 신부)

 

4월12일(금) <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475(105)일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오늘의 말·샘 기도>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4년4월12일(금) 4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