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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9일 화요일[(백) 부활 제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9일 화요일[(백) 부활 제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묵시 19,7.6 참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세.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 구원을 보증해 주셨으니
저희가 충만한 새 생명을 누리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을 선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4,32-37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6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37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3(92),1ㄱㄴ.1ㄷ-2.5(◎ 1ㄱ)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주님이 차려입고 권능의 띠를 두르셨네. ◎
○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네. 예로부터 주님 어좌는 굳게 세워지고, 영원으로부터 주님은 계시네. ◎
○ 당신 법은 실로 참되며, 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서리나이다. 주님, 길이길이 그러하리이다. ◎

복음 환호송

요한 3,14-15 참조
◎ 알렐루야.
○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7ㄱ.8-15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저희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감사하며 드리는 이 제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24,46.26 참조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당신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사제는 미사 중에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을 몇 번 합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의 시작을 삼위일체인 하느님과 함께한다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복음을 봉독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봉독하는 이 시간에 주님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성체와 성혈로 변하는 그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강복을 주기 전에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를 마치고 파견되는 그 시간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열정이 없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두려움이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세상의 일들에 빠져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 교회는 두 가지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창조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상반되는 이론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생명과 지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태초에 시작된 우주와 이 우주의 끝이 어떻게 될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론만이 태초에 시작된 우주와 이 우주의 끝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운동의 시작이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과관계의 시작이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우연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이며,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것의 기준이며, 하느님은 모든 목적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 모든 창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가슴 아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용서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병이 치유되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에 이르는 표징일 뿐입니다. 구원은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준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회개의 길입니다. 그 길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 부활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3,7-15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들에게서 볼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 외 여타 대상들이 희미해지고 존재감을 상실합니다.

빛도 바래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만이 눈에 띄고 빛을 발합니다.

여러 존재들 가운데 오직 그만 보입니다.

오직 그만 바라보고, 그에게 몰입하며, 그를 위해 헌신합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도 그러한데 하느님과의 사랑은 얼마나 더 강렬하고

더 각별하고 뜨거운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가장 잘 나가던 유다 지도층 인사였던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의 진의를 묵상해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깨닫는 작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인식하는 것,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 생명조차 바치심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들 사이에서도 상대방을 향한 헌신과 사랑이 깊어지게 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결국 생명조차도 내어놓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게 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사방이 온통 꽃천지입니다. 하느님께서 고달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화사한 위로의 선물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한송이 청초한 꽃 안에 굳게 현존해 계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내 안에, 그리고 동료 인간 안에도 굳건히 현존해 계십니다.

위로부터 태어나게 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지긋지긋하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지루하고 고달프게 만들었던 일상생활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이상 멀고 먼 옛사람, 이천 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분명 죽었는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요한 3,7)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에서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중심적인 ‘나’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fiat)’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

(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영에서 태어난 이”

(요한 3,8)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8.월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사7,10-14; 8,10ㄷ 히브10,4-10 루카1,26-38

 

                                          순종과 비움의 여정과 순교영성

                                                 -마리아 성모님의 삶-

 

"예수님이 내 운명이자 사랑이듯이

 강론 또한 내 운명이자 사랑이다."

 

새벽 강론을 쓴후 저절로 나온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저뿐만 아니라 성모님은 물론 모든 성인들의 운명이자 사랑이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로 불렸던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 12월25일 9개월전 3월25일이 대축일인데 올해는 이날이 성주간이라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져 오늘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부활시기와 겹쳐

더욱 풍요로운 느낌입니다. 

 

우선 돋보이는 점은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입니다.

교회는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아하즈에 대한 신탁을 예수님 탄생의 예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예언후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온 인내와 겸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인내와 겸손으로 표현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받는 우리 하나하나의 이름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임을 깨닫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 이름이 감명깊게 드러나는 성구는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깨닫게 하는 참 은혜로운 구절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제가 고백성사 보속시 말씀처방전으로 많이 써드리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 방문시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의 일성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은총이 가득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 보속 처방전 말씀을 받았을 때 환호하던 어느 수녀의 응답도 잊지 못합니다.

이 예화 또한 제가 참 많이 인용했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

살아있는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이와 더불어 독일에서 선교사로 파견되어 오랫동안 살고 계신 현익현 바로톨로메오 신부님의

기발한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이 예화 또한 재미있어 수 차례 인용했습니다.

제가 신부님을 수도원의 보물이라 하셨을 때 웃으며 즉각적으로 주신 답변입니다.

 

“나는 보물(寶物)이 아니라 고물(古物)입니다!”

 

불교의 사찰에서 자산 둘이 절의 역사를 증언하는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라 하는데

가톨릭 수도원 역시 노목과 노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노승이 고승(高僧)이 되면 더 바랄나위 없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어느 사찰이나 수도원을 찾든 우선 확인해 보는 것이 노목과 노승 둘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나자렛 시골의 마리아를 찾아온 하느님의 겸손이 놀랍습니다.

임마누엘 탄생 예언후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랜동안 기다려온 하느님이요, 희망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한없는 기다림입니다.

언젠가의 마리아의 출현에 희망을 걸고 기다려온 하느님의 인내입니다. 

 

기다림하니 해마다 파스카의 봄철이면 놀라운 신비로 와닿은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어김없이 거기 그 자리에서 몇날 동안 피고자 일년 열두달을 꼬박 기다리며 인내해온 봄철의

무수한 봄꽃들입니다.

이 감격을 노래한 “기다림”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반갑고 고마운 만남있으랴

 언제나 거기 그자리

 꼬박 일년 기다렸다 피어난 

 파스카의 봄꽃들이다

 꼭 일년만의 만남이구나!

 산수유, 개나리, 매화, 매실, 벚꽃, 수선화, 민들레...

 모든 봄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 되려면

 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4

 

참으로 장구한 세월 인내하며 기다렸다 마리아를 발견한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참으로 눈밝고 귀밝은 하느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온 것이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기대를

충족시켰습니다.

마리아의 깊은 믿음은 침묵과 경청의 관상으로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흡사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임마누엘 탄생의 신탁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내심을 속속들이 밝히는 하느님에게서 마리아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사랑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의 재차 물음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자신의 속내를 명쾌하게 자상히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마지막 천사의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 때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전 존재가 담긴 답변입니다. 인류 역사에 결정적 전환점(터닝포인트;turning point)이 되는

시점(時點)입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설득이 주효했고 깊은 침묵중에 경청한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도 일방적으로 혼자서는 일하지 못합니다.

마리아의 자발적 순종의 믿음의 응답을 필요로 했던 하느님이요, 이 응답이 나오기전 온누리가 쥐죽은 듯

침묵에 잠겨있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부분에 관한 주석도 생각납니다. 

 

마리아의 응답에 온 인류의 구원이 달렸기 때문에 하느님 역시 참 초조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무조건적 “예스(Yes)”, 순종의 응답에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점은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이런 자발적 순종의 응답에

있음을 봅니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입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무려 두 차례 반복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예수님 삶의 본질이요 핵심이자 우리 믿는 이들 역시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둔 어머니, 성모님을 부러워한 여인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복되도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루가11,28)

 

그대로 성모님과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게세마니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로 간절히 바쳤던 예수님의 기도도 생각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 말씀이 절정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남김없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중에 100% 자신을 완전히 비운후의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It is finished) 라는 고백이며 바로 이 말씀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아, 끝났다!(It is finished!)", 얼마나 고달픈 삶에 최선을 다한 삶이었는지 참 홀가분한,

해방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모전자전, 어머니 성모님의 순종과 비움의 여정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잉태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실 때까지

시종여일 한결같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셨던 성모님처럼,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모자분에게 다시 새롭게 배우는 순종과 비움의 여정이요 순교영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남은 인생, 자발적 사랑의 순종과 비움의 순교영성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4월9일(화)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구원은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 준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회개의 길입니다. 그 길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 부활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조재형 신부)

 

2.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이상 멀고 먼 옛사람, 이천 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영에서 태어난 이”

(요한 3,8)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모전자전, 어머니 성모님의 순종과 비움의 여정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잉태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실 때까지

시종여일 한결같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셨던 성모님처럼,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모자분에게 다시 새롭게 배우는 순종과 비움의 여정이요 순교영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남은 인생, 자발적 사랑의 순종과 비움의 순교영성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이수철 신부)

 

4월9일(화) <부활 제2주간 화요일>, 472(102)일 기도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이상 멀고 먼 옛사람, 이천 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나'를 위로부터 태어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의 매사를 예비하시는 야훼이레 하느님! 감사합니다.

모든이의 모든 것 되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 2024년 4월9일(화) 6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