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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17일 수요일[(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17일 수요일[(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71(70),8.23
저의 입은 당신 찬양으로 가득 찼나이다. 온종일 당신 영광을 찬미하나이다. 당신께 노래할 때, 제 입술에 기쁨이 넘치리이다. 알렐루야.

본기도

주님,
주님의 이 가족들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믿음의 은총을 주셨으니
저희가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로 영원한 유산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8,1ㄴ-8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6(65),1-3ㄱㄴ.4-5.6-7ㄱ(◎ 1)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 일들 놀랍기도 하옵니다!” ◎
○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
○ 바다를 바꾸어 마른땅 만드시니, 사람들은 맨발로 건너갔네. 거기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기뻐하네. 그분은 영원히 권능으로 다스리신다. ◎

복음 환호송

요한 6,40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리라.
◎ 알렐루야.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저희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감사하며 드리는 이 제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부활하시어 우리를 비추셨네. 당신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저희를 도우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교우 분들과 대화 중에 서울 신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서울 신학교를 나온 신부님들이 인품이 좋고, 사목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서울 신학교를 나왔기 때문입니다. 군인들 중에도 해병대, 특전사, 공수부대 출신들이 있습니다. 일반 군인들도 나라를 위해서 복무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특수한 부대에서 복무한 군인들은 나름대로 자부심과 명예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는 전역 자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난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 중에서 청년성서공부를 했다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먼 미국까지 와서 열심히 봉사 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청년성서공부를 통해서 얻었던 신앙에 대한 확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년꾸르실료를 체험했다는 분도 보았습니다. 그분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원동력은 청년꾸르실료에서 신앙의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에 근거한 교리와 신학입니다. 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토대로 교계제도를 설립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토대로 이단을 구별하였고, 세상의 논리에 대응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체계화 시킨 사람으로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확립한 분들을 교부라고 부릅니다.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는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신앙으로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에 근거한 영성과 은사입니다. 신앙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은 이성적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차원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초월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카리스마라고 이야기합니다. 카리스마에는 많은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심령한 언어를 하는 은사, 심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의 최종 목적은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 전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안토니오, 베네딕토, 십자가의 성 요한,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분들은 영성과 은사를 정립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영성과 은사를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영성과 은사가 없는 교리와 신학은 자칫 차갑고, 무미건조할 수 있습니다. 영성과 은사는 활력을 주는 기운과 같습니다. 교리와 신학이 없는 영성과 은사는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악의 세력도 영성과 은사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와 신학에서 벗어난 영성과 은사는 때로 이단으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교리와 신학이라는 그릇은 견고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서적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영성과 은사라는 활력은 충만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영적인 기운을 충전할 수 있는 신심단체들이 있습니다. 신심단체와 함께 한다면 신앙생활에 위안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 그리고 영성과 은사의 날개가 튼튼한 신앙인은 두려움 없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6,35-40

 

그날에는 더 이상 참척(慘慽)의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어르신들께서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의 느낌이 든다고 해서

천붕(天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것은 참척(慘慽)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슬픔과도 견줄 수 없는 슬픔, 참혹하고 깊은 슬픔을 일컫습니다.

 

부모는 산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참척의 고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여쁜 한 송이 꽃 같던 아이들이 차갑고도 깊은 바닷물 속으로 낙화한 지 십 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 적 이야기를 아직도 하냐?

언제까지 그 이야기 할거냐? 며 투덜거립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혈관 속에 따뜻한 피가 돌아다니는 인간으로서 그런 말을 어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남아있는 부모나 가족은 아직도 참척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잠 못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천 번 헤아려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 앞에서는 섣부른 위로의 말도 조심스럽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옆을 지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 혹독한 고통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발산하며 애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가 막히는 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이를 앞세우는

큰 슬픔에 힘겨워하는 분들을 위해 오늘 주님께서는 한줄기 위로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이 세상 어딜 가도 그 슬픔 그 고통 위로가 안되니, 어떻게든 주님 안에, 그분 말씀 안에 위로를 받으시고,

극복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이 혹독한 시절이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 모두 반드시 따뜻한 주님의 품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3. 전삼용 요셉신부님 강론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요한 6,35-40

 

결국 성체 안에 끝까지 남는 자: 두려움 속으로 한 발을 내어 디딜 용기가 있는 자

 

오늘 복음도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아드님께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떠나갑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결국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종이 됩니다.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이들은 아직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자신의 주인이요 왕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결심한 이들은 나를 포기하는 표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봉헌할 마음이 없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이끌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결국 아드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할 것인데, 아드님을 그렇게

이용당하게 두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 합니다.

 

    몽고에서 선교하던 이용규 선교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교육사업을 하라는 하느님의 뜻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대학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대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아주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슬람국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이때 비자에 어려움이 생겨 갑작스럽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 돌아오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아빠, 그러면 우리 몇 달 동안 학교 못 가는 거예요?”

라고 물었고, 선교사는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의 교육을 맡기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정작 제 아들과 딸의 교육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니?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생각해보니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 다시 맡겨드립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비워진 선교사의 손에 새로운 그림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아픔을 주셨고, 그래서 대학을 세우기 전에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그리스도교 학교로 정부 인가를 내주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적적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첫 사례로 그리스도교 학교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처: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채널, ‘CGNTV SOON’]

 

이용규 선교사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내려놓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려놓음’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의 핵심은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 나의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가운데 상대방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떠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맡겨드리는 것.

그리고 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급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이들은 이 내려놓음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빵을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걱정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걱정을 채워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내려놓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나로 살아가는 것,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는 삶이 아직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영화 ‘마인’(Mine)은 사막 임무에서 실패한 두 병사가 사막을 건너다 지뢰를 밟게 되며

벌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둘이 다 지뢰를 밟았고 주인공은 발을 떼지 않았지만

다른 군인은 발이 절단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무려 70시간을 추위와 더위, 동물의 공격과 모래 폭풍을 이겨내며 견딥니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그때 한 발짝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뢰가 아닌

하나의 깡통이었습니다.

 

동료의 고통을 보며 발을 뗄 수 없어 고생한 그 70시간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버리지 못했던 그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에게 끊임없이 한 발을 내디디라고 말했던 원주민은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알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두려움이 그 발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아를 밟고 움직일 용기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진 이는 도와주십니다.

 

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면 다른 나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나다.”이십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지쳐 누군가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고 싶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일로 걱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주님 것으로 맡겨드리고 싶다면,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도 다시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아를 떠나는 한 걸음의 용기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16.부활 제3주간 화요일                                                            사도7,51-8,1ㄱ 요한6,30-35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예수님을 늘 삶의 중심에 모신 삶-

 

4월16일이 되니 304명 희생자를 낸 10년전 4.16세월호 참사 사건이 생각납니다.

이날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먹먹해지며 말문을 잃게 됩니다.

 

오마이뉴스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염원 3645일, 고 박수현 군의 아버지 박종대씨>의 글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10년전 2014년은 제가 원장직을 내려 놓고 장충동 수도원에서 안식년을 지내던 중이었고

당시 이날은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 성주간에 맞이했던 상상을 초월한 비극적 재앙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상규명은 되지 않은 상태로 피해 가족들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는 성주간 이었고, 오늘은 부활 제3주간 화요일입니다.

부활의 기쁨, 신록의 기쁨중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10년전 세월호 참사요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심기일전 노력해야 할 것이며, 언젠가 반드시 가급적 빨리

진상규명도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현재의 난국을 생각할 때 저절로 떠오르는 주제입니다.

국내 상황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길을, 방향을 잃고 혼돈중에 방황입니다.

끊임없는 전쟁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입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희망을, 꿈을, 빛을 잃고 방황중이라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을 찾아야, 잡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제가 피정지도시 늘 강조하던 내용도 생각납니다.

 

1.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절대로 이 우선순위가 바꿔져선 안된다.

2.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날로 가치관 부재의 혼돈 시기에 하느님 믿음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해 갑니다.

참으로 단절의 불행과 비극의 시대, 무엇보다 신앙유산의 전수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삶의 뿌리, 믿음의 뿌리가 우선적으로 건강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에 대한 답도 하느님 믿음, 파스카 예수님 중심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돈을 필요 이상으로 쌓다가는 돈에게 사로잡힐 수 있다.

진정 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작은 일상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다산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명심보감

 

작은 일상에 만족하는 일, 재물에서 초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일치를 이루기 까지는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 뿐입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요한복음의 주제는 생명의 빵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은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 절정의 말씀이 오늘 복음 후반에 나옵니다.

 

주님은 어제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라 힘쓰라 하신후,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인 당신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의 주님께 대한 청은 구도자들인 우리 모두의 궁극적 소망이요 이에 대한 주님의 통쾌한 응답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늘 이런 생명의 빵을 모셔야 비로소 충만한 삶,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뿐 답이 없습니다.

 

바로 얼마전 교황청 사순시기 첫째 강론 주제도 이 성서 구절이었습니다.

일부 핵심적 내용을 나눕니다.

 

“우리는 어디서 이 빵을 발견할 수 있나?

미사와 성서이다.

고대 교회는 성사와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인정했다.

오직 후대에 서방에서 그리스도교의 분리가 있었다: 가톨릭 측에서 성체성사적 해석이 우세함으로 끝나자,

루터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명의 빵인 하느님의 말씀편에 섰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말씀과 성사간의 원래적 종합으로 회귀해야 한다.

바로 최근 일어나는 종교일치 운동도 이런 분위기다.

때로 성서와 성사가 신학에서 대립될지라도 그들은 전례 안에서 늘 ‘평화로이’ 공존해 왔다.

교회의 맨처음부터, 미사(Mass)는 ‘말씀과 성체(the Word and the Eucharist)’ 둘을 포함해 왔다.”

 

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싸 추기경의 명쾌한 설명이 참 고맙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날마다 미사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사도행전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입니다.

순교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스테파노의 임종어를 보십시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대로 예수님의 임종어를 닮았습니다. 예닮의 여정에 완성에 이른 스테파노입니다.

과연 우리는 몇% 예수님을 닮아있는가 묻게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스테파노의 대를 잇는 사도 바오로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테파노 순교시 그의 겉옷을 곁에 놓고 스테파노의 순교장면을 보면서 충격과 더불어

깊이 배우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새삼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임을 깨닫습니다.

 

잘 살고 싶습니까?

유한한 인생 여정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내 인생여정 압축할 때, 일년사계로 내 인생여정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지요?

 

이를 생각하면 잠자는 시간도 때로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사랑하기도, 회개하기도, 기도하기도, 공부하기도 턱없이 짧은 세월,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예닮의 여정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임종어나 묘비명을 좌우명 삼아 써놓고 이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있습니다.

예전 써놨던 “내 묘비명은”이란 글도 생각납니다.

 

“그는 욕심이 없었고,

 평생 하느님만을 그리워했으며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의 깊이와 넓이, 맑음만을 

 어둔밤 빛나는 별, 깨어 있음만을

 하늘 떠도는 흰구름 자유만을

 산의 한결같은 인내와 침묵만을 부러워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연은 또 하나 그의 종교였다”-2005. 5

 

수도원이 한참 어려움을 겪던 시기 자신을 정리해봤던 묘비명이 생각나 나눴습니다.

어제 문득 수도원 방문시 집무실을 찾아 강복을 받던 수녀님에게 수도명을 물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의 이름 앞에 말마디 라이너 수녀입니다.

독일어로 라이너 뜻은 ‘맑은’이라합니다.”

 

맑은 수녀 모습대로 조촐하고 맑아보였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예닮의 여정중 날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맑고 향기로운,

충만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4월17일(수)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되새김 구절

 

1. 교리와 신학이라는 그릇은 견고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서적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영성과 은사라는 활력은 충만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영적인 기운을 충전할 수 있는 신심단체들이 있습니다. 신심단체와 함께 한다면 신앙생활에 위안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 그리고 영성과 은사의 날개가 튼튼한 신앙인은 두려움 없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조재형 신부)

 

2.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이 혹독한 시절이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 모두 반드시 따뜻한 주님의 품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면 다른 나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나다.”이십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지쳐 누군가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고 싶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일로 걱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주님 것으로 맡겨드리고 싶다면,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도 다시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아를 떠나는 한 걸음의 용기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십니다.(전삼용 신부)

 

4.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늘 이런 생명의 빵을 모셔야 비로소 충만한 삶,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이수철 신부)

 

4월17일(수)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480(110)일 기도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자아를 내려놓게 하소서.

그리스도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오니...

성령이여!

나를 이끌어주소서. 아멘.

 

- 2024년 4월17일(수) 5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