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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5월 5일 주일[(백)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5월 5일 주일[(백)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해마다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오다가,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며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자는 데 생명 주일을 지내는 뜻이 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시고, 성자를 통하여 참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성자의 사랑을 본받아,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입당송

이사 48,20 참조
환호 소리 올리며 이 일을 알리고 전하여라. 땅끝까지 퍼뜨려라. 주님이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기쁜 날, 저희가 정성된 마음으로 축제를 지내며
부활하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오니
지금 거행하는 이 신비를 언제나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0,25-26.34-35.44-48
25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44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8(97),1.2-3ㄱㄴ.3ㄷㄹ-4(◎ 2 참조)
◎ 주님은 당신 구원을 민족들의 눈앞에 드러내셨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1-16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14,2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인도자이신 주님, 남녀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을 굽어살피시어, 인간적, 사목적, 영성적, 공동체적 양성을 통하여 자신의 고유한 성소를 키워 나가게 하시고,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며 복음의 믿음직한 증인이 되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평화의 주님, 다양한 종교와 문화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인류를 굽어보시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소통하고자 노력하며 화합을 이루고 평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3. 생명 주일을 맞아, 생명 수호 봉사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생명이신 주님, 이 땅의 생명 문화 건설을 위하여 애쓰는 이들에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주시어 지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모두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생명의 지킴이가 되게 하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은총의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의 모든 이를 보살펴 주시어, 그리스도를 본받고, 저마다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여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이 제물과 함께 바치는 저희 기도를 받아들이시고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이 큰 사랑의 성사에
언제나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부활 감사송 4 <파스카 신비로 새로워진 세상>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이제 죄와 죽음은 사라지고, 타락하였던 만물이 새로워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 생명이 온전히 회복되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4,15-1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는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뽑아 세우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친구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파티마와 루르드에서 매일 묵주기도와 행렬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오기 때문에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성지에서는 순례자들에게 신청을 받아서 묵주기도를 진행합니다. 이번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도 루르드에서도 한국말로 묵주기도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파티마에서는 영광의 신비 4단을 하였고, 루르드에서는 환희의 신비 2단을 하였습니다. 시작은 한국어로 하지만 후렴은 모두 자신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체험으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계층과 세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 주신다.” 그렇습니다. 선한 마음이 있으면 진흙탕 속에서도 예쁜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악한 마음이 있으면 예쁜 장미 밭에도 가시가 돋기 마련입니다. 성모님의 전구함으로 가정과 본당에 사랑의 꽃이 활짝 피면 좋겠습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을 지내면서 지난 5주 동안 있었던 복음 말씀의 주제를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부활 제1 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무덤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갈망을 아셨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저의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주권을 신청했고, 2년 전에 나왔습니다. 주교님께 보고를 드렸고, 주교님께서는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미사에 함께 하는 것도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토마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아야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만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검증과 사실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음과 신비의 차원입니다. 제가 지난 2 14일에 이곳에 왔을 때, 여러분은 제게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스 교구와 서울대교구에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제가 선하게 생겨서 일수도 있습니다.)

 

부활 제3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안토니오 가우디가 시작한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탄생의 문과 고통의 문이 있습니다. 이제 곧 영광의 문이 완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문 정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 대신 성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성경에 다 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경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려 주셨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시편 126장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목자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는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한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소경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방인 여인과 백인대장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싱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서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세탁기도, 냉장고도, 텔레비전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도 구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심단체들도 본당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사목회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 관계의 중심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미사입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오늘 성서말씀을 미리 읽고 오셨거나 귀담아 들었다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성서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온갖 심오한 진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6주일
복음: 요한 15,9-17

우리 각자와 친구 맺기를 신청하시는 예수님!


저희 집 근처에 저희 공동체와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들의 집이 있습니다.
피정 센터 큰 행사 때도 초대하고, 여름 겨울 캠프 때는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마음껏 뛰고 즐기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희 할아버지들은 그저 마음이 흐뭇할 뿐입니다.


한번은 거룩한 부활 성야 미사 때였습니다.
막내가 꽤 만만치 않았는데, 그 긴 전례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주례하는 저는 하나도 괴롭거나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 존재 자체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저희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똑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리저리 좌충우돌하고,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고,
그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로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아무리 큰 허물과 상처투성이어도, 하느님께서는 그저 넉넉한 미소와
너그러운 가슴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 맺기를 신청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는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 중의 친구, 진정한 친구, 절친을 의미합니다.
절친의 의미에 대해서 과거 인디언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절대로 그냥 맺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함을 통해 진정한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함을 통해 우정은 깊어갑니다.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이의 모든 벽이 허물어집니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됩니다.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 강점, 경쟁력, 건강 등등 긍정적인 측면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
고통과 결핍, 실패와 좌절까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물의 창조주, 자비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부당한 죄인,
결핍투성이인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부활 6주일입니다. 

그리고 ‘생명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모든 선물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선물로 받습니다. 

제1독서는 그 선물이 ‘성령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베풀어지는 선물임을 보여줍니다(사도 10,44-46). 

제2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1요한 4,10)을 말하며,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1요한 4,7)임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다락방에서의 유언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먼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의 선포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이는 첫째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다는 선포요, 둘째는 그 사랑의 원천이 아버지의 사랑임을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랑을 받아먹은 존재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미 받은 사랑인,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하나 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요한 15,11 참조)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본보기로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성부에 대한 지고의 사랑의 표현이면서(요한 14,30), 동시에 당신의 친구로 삼으신 이들에 대한 사랑의 절정(요한 13,1.13)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동시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 그것은 친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고 흘러들게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제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바탕이며 규범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요한 15,13-14) 

그런데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가 적이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곧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를 그레고리오 교종은 이렇게 해설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때,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도 우리의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말씀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불러 뽑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 15,15-16)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당신께서 목숨까지 내어주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며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요,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친구가 되어주라’ 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어 ‘친구가 되라’ 하십니다.

 

그래서 단지 우리를 친구로 뽑은 것만이 아니라, '뽑아 세웠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세웠다'라는 원어의 뜻은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도까지 보장하면서 어떠한 책임을 지워 내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사랑을 실천하고 선포할 책임을 맡겨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5,1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4.5.4.부활 제5주간 토요일                                                                사도16,1-10 요한15,18-21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우리의 존재 이유-

 

“온 누리 반기어 주님께 소리쳐라.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시편100,1-2)

 

오늘 복음은 짧지만 초대교회같은 박해상황이 아니기에 이해하기도 어렵고 좀 불편합니다.

현재 우리 교회가 제대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은 우리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과연 교회가 세상과 동화(同化)되어 점차 세상과 하나되어 부패(腐敗)되어 가는 경향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교회가 세상에 속화(俗化)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역할을 상실한다면

존재이유의 상실일 것입니다. 

세속화로 무디어져 교회 감각을 많이 상실한 현대 교회가 아닌가 생각될 때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또 세상 한복판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속에서 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의

고백을 통해, 말그대로 총체적 위기의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참 막막하게 생각됩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보려해도, 부정적이, 비관적이 됩니다.

각자도생의 사회, 국내의 정치현실, 사회현실, 교육현실, 군대현실, 모두가 소리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같습니다.

 

다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교회는 과연 책임이 없나 묻게 됩니다.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자의 현실 진단에 공감했습니다.

 

“위기의 본질은 가치와 지향, 비전과 신뢰의 상실에 있다. 그려면 남는 것은 눈먼 탐욕뿐이다.”

다음 독일의 문호, 괴테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무한한 욕망따라, 한계없는 삶이 지옥이라는 것이며 오늘의 현실에 대한 진단같기도 합니다.

 

자주 묻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교회가 과연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함은 물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는지 묻게 됩니다.

 

세상과 사이좋게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지 묻게 됩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신자 정치가들이요 정당이라면 교회의 가르침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에언자적 교회라면 세상과의 적당한 불편은 필수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박해도 받고 때로 순교자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세상과 하느님의 적대적인 대립은 구원 역사의 근본적인 면을 이룹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배경을 이루는 박해시대에는 세상의 미움의 대상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데

현재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으로 사랑한다 말씀하시는데 과연, 하느님께 속한 우리 삶인지,

또는 세상에 속한 우리 삶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무서운 것은 외부의 박해하는 적이 아니라, 내부의 배신과 변절, 분열의 적임을

역사를 통해 배우고 현재에도 목격하곤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따라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내적일치의 공동체가 우선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에, 하느님께 속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상의 사랑을 받는다면 뭔가 문제가 있음에 분명합니다.

정말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의 삶이라면, 세상을 떠난 삶이 아니라 세상 속의 삶이라면,

때로 세상과의 불화와 불편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현상일 것입니다. 

 

정말 영향력있는 정치가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찾았을 때 용기있게 쓴소리를 낼 수 있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지요.

예전 김수환 추기경은 달랐습니다. 명실공히 시대의 어른이었고 추기경의 발언은 큰 반향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당시 시국이 어려울 때는 추기경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요즘 교회의 눈치를 보고 교회를 어려워하는 정치가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좌파나 우파가 아닌 진정 용기있고 정의로우며 평화를 사랑하는 예수님파 참된 교회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대로 세상과 불편해야하고 불편할 수뿐이 없는 우리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신원이 드러납니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의 존재로 예수님 친히 뽑아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불편해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의 창조한 본연의 좋은 세상에서 아니라 악으로 날로 부패해져가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과 운명공동체일 수 뿐이 없겠습니다.

주인이자 스승인 예수님따라 살다보면 예수님이 겪었던 박해와 고통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요,

이는 바오로 사도는 물론 초대교회 지도자들이나 무수한 순교자들이 그 좋은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행적을 보면 그 고난의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참 자유로워 보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님께 속한

그 자유로움일 것이며 박해를 받거나 순교한 분들 역시 예수님께 속했기에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이들 바오로 일행의 행로를 보면 성령의 인도에, 예수님의 영에 따른, 또 주님의 환시에 따른 삶이

바로 자유로운 삶의 비결이었음을, 또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의 선교가 자유로운 하느님의 섭리이자

주님의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께 속한 자로서 우리 역시 성령께 귀기울이고 성령에 따라 살 때

참으로 자유로운 삶임을 봅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을 찾아야 할 절박한 시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을 알지 못한 무지에서 기인한 박해였음을 봅니다,

역시 무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았더라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정말 열린 눈으로보면 예수님의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이신데 무지에 눈이 가려

예수님도 하느님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음 한 마디로 정의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말씀을 믿어야 무지의 어둠에서, 미궁(迷宮)에서 벗어나 흔들림없이 예수님의 길을 통해

진리이자 생명이신 아버지께 이를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되어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문득 개신교 칼바르트 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잊지 않고 명심하는 말마디입니다.

 

“성서를 읽듯이 신문을 읽고, 신문을 보듯이 성서를 본다.”

 

성서를 읽는 마음으로 깨어 신문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매일 미사라는 거울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며 미사를 봉헌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 너희는 알라,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 백성이어라, 기르시는 그 양 떼이어라.”(시편100,3). 아멘.


5/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되새김 구절

 

1. 부활 제1 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 부활 제2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부활 제3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관계입니다. ...부활 제6주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조명연 신부)

 

2.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 강점, 경쟁력, 건강 등등 긍정적인 측면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
고통과 결핍, 실패와 좌절까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성서를 읽듯이 신문을 읽고, 신문을 보듯이 성서를 본다.”

 

성서를 읽는 마음으로 깨어 신문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매일 미사라는 거울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며 미사를 봉헌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 너희는 알라,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 백성이어라, 기르시는 그 양 떼이어라.”(시편100,3). 아멘.(이수철 신부)

 

5/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497(127)일 기도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5월5일(일) 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