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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5월 3일 금요일[(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5월 3일 금요일[(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소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는 그는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라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입당송

주님은 이 거룩한 사람들을 참사랑으로 뽑으시고, 영원한 영광을 주셨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해마다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을 기꺼이 지내게 하셨으니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히 하느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8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또는
◎ 알렐루야.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4,6.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6-14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에 드리는 이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티 없이 깨끗한 믿음을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도 감사송 1 :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4,8-9 참조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소서.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리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내 아버지를 뵌 것이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도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와 함께
성자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노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의 특성을 들어서 이야기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겸손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니 부드러움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니 유연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부드럽지만 시간을 주면 바위를 뚫으니 강인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물은 자연에 활력을 주니 생명력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물의 특성을 들어서 노자는 물을 가장 좋은 선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물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물은 잘못을 씻어주니 정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물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회개와 정화의 상징이었던 물은 이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聖事)가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물은 지난날의 죄를 사함 받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물은 은총의 성사가 되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였던 루르드는 치유의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루르드의 샘물로 치유된 사람이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하니 치유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례에 온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물을 몸에 바르면서 치유의 은사를 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물에 침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물의 예식만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고, 손과 눈에 물을 바른 후에 물을 마시는 예식입니다. 저는 루르드의 물이 아닌 다른 것에서 치유의 은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루르드에는 많은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휠체어에 의지하는 환자들을 샘물로 모셔 왔습니다. 물의 예식을 하는 곳에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음악 봉사자들이 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많은 젊은이가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는 봉사자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물에 들어가지 못했던, 그래서 치유의 은사를 받지 못했던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그렇습니다. 연못의 물이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치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 요한 14,6-14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후줄그레한 작업복 차림으로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던 저를 한 형제님이 불러세웠습니다.

“저기요! 여기 사무실이 어딘가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양신부님 만나 뵈러 왔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제가 양신부입니다.”

 

형제님은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시더니 그러셨습니다.

“설마, 그럴리가요. 농담하지 마시고 빨리 알려주시죠.”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양신부를 두고, 양신부 어디 있냐고 묻는 분들 보며,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저는 예수님의 심정을 아주 조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도 높은 정신 교육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들은 스승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는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웃기게도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복음 14장 8절)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요, 분신, 그분 자체이신 예수님을 오랫동안 뵈었으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니,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으시고, 다그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십니다.

더불어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금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예수님을 뵌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것.

 

자상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백성을 위해 ‘자! 이게 내 얼굴이다.’며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라는 필립보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듣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하느님을 아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맥락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가르침 다음에,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라고 말씀하시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필립보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느님을 보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일’, 곧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힘을 입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진정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2.목요일 성 아타나시아 주교 학자(295-373) 기념일 

                                                                                                                   사도15,7-21 요한15,9-11

                                    주님의 ‘평생 사랑의 학인(學人)’인 우리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당신의 영광을 백성에게,

 그 기적을 만백성에게 두루 알리라.”(시편96,3)

 

하느님 사랑의 영광, 사랑의 기적을 알리라는 시편 화답송 말씀입니다. 

어제 수도원에는 저녁기도후 김종훈 루가 형제의 수련착복식이 있었습니다.

역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참 선물인 수도형제입니다. 

제의실 창밖 죽어 있었던 대추나무에 푸른 싹들이 움트니 죽음의 넘어서는 생명의 의지,

사랑의 의지에 감동합니다.

 

요즘 주차장 주변에는 파스카 사랑의 봄꽃, 이팝나무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했고

어제는 김포 고촌성당의 열심한 사랑의 자매들 다섯분이 수도원 넓은 밭의 채소 모종을 해주었습니다.

또 조루시아 자매도 온종일 사랑의 주방봉사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미 읽었던 내용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

“교만은 겸손으로 싸워라.”

“모든 것은 믿음의 인내로 가능하다.”

 

이 모두의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의 인내, 사랑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의 말씀도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애틋하게 여기고, 익숙한 사이일수록 어려워하라.”

“수양의 근본은 효우(孝友;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이니, 여기에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학식이 높고 글재주가 좋더라도 흙담에 색칠하는 것이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사랑이란 두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1.“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2.“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는 사랑, 배려하는 사랑,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는 사랑, 나누는 사랑, 섬기는 사랑, 돌보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수도공동체 형제들의 신원을 저는 주님의 형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으로 세차원에 걸쳐

설명하곤 합니다.

더불어의 공동체 삶이기에 형제애, 전우애, 학우애의 균형과 조화의 공동체가 참 좋은 공동체라

정의하곤 합니다.

역시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임을 깨닫습니다.

 

온갖 정신질환의 뿌리에는 사랑 결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더불어 자존감 높은 삶이요 또렷한 신원의식입니다.

도대체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사랑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밖에 길이 없다, 사랑밖에 답이 없다 "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 역시 ‘섬김의 학교’라 하는데 사랑의 학교라 할 수도 있습니다.

평생 공부해도 졸업이 없는, 늘 공부해도 여전히 초보자처럼 느껴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능력이요 평생 보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늘 해도 늘 부족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오랜 세월 사랑을 주제로 강론해왔지만 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해도해도 끝이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없는 인생이라면 참으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일 것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사랑은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선물로 주어진 인생이요,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도 여전히 목마른, 배고픈, 못다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사랑입니다.

어제는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라” 였는데, 오늘은 사랑이 더해져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순식간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 전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슬픈 성인은 불쌍한 성인이다”라는 말마디에 공감합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충만한 기쁨, 또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사랑도 배워야 함을 봅니다.

사랑에도 기준이, 모범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처럼'이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예수님의 롤모델입니다.

마찬가지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계명을, 사랑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 아버지께 순종의 사랑을 다한 예수님은 우리의 롤모델입니다. 

 

이런 사랑의 평생 수행과 더불어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삶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가능하겠고,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데 원천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마르지 않는, 끊임없이 샛솟는 “사랑의 샘”인 주님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지치지 않는 사랑의 수행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모범이, 믿음의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알렉산드리아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정말 백절불굴의 믿음의 투사, 사랑의 투사, 성 아타나니오 주교 학자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끝까지 정통교리와 교회를 지켰고 이런 와중에 다섯 번이나

유배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 옛날에 78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신자들에게도 참으로 사랑받았던 목자였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 4대 교부에 속한 분이며

후대에 수도승들의 교과서 같던 “안토니오의 생애”를 저술한 분입니다.

사막 유배중 안토니오와 빠코미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참 각별한 성인입니다.

 

역시 이런 백절불굴의 신앙의 뿌리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하느님 백성들에 대한

목자적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타나시오를 비롯한 교회 하늘에 무수히 각양각색으로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별같은 성인들은

바로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됨을 깨닫습니다.

문득 떠오른 오래전 '민들레꽃' 자작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8.

 

지금도 옛 수도원 본원 건물 소박한 한옥 뒤뜰 마당에 눈부시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을 보며

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사랑의 성인들이요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두 인물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배웠기에 이런 사랑에 의한 지혜로운 분별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역시 명불허전, 그 스승 예수님에 그 수제자 베드로답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목자적 사랑이 하나된 베드로의 고백에, 다소 베드로보다 후퇴한 느낌이지만 

야고보가 역시 분별의 지혜로 율법의 요구를 최소화하여 매듭을 지어줌으로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참 어른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5/3(금)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되새김 구절

 

1.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예수님을 뵌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것.

 

자상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백성을 위해 ‘자! 이게 내 얼굴이다.’며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이수철 신부)

 

5/3(금)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495(125)일 기도

 

<오늘의 말·샘 기도>

 

복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5월3일(금)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