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7일 토요일[(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본기도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4,6ㄴ-1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6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한 가르침을 나와 아폴로에게 배워,
저마다 한쪽은 얕보고 다른 쪽은 편들면서
우쭐거리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7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11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12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13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4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15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의 소망을 채우시고, 그 애원을 들으시어 구해 주시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지키시고, 죄인들은 모두 없애 버리시네. ◎
○ 내 입은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리라. 모든 육신은 그 거룩하신 이름 찬미하리라. 영영 세세에.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마태 5,9-1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https://blog.kakaocdn.net/dn/buvdSs/btsJveft7AI/XYRXnpu7k3VLDUZTwHQoM0/img.png)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바둑에서 중요한 부분은 ‘형세판단’입니다. 형세판단을 잘 하는 사람은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은 ‘맥락’입니다. 맥락을 잘 아는 사람은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형세판단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자성어로 “견지망월(見指忘月)”이 있습니다. 견지망월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까막눈임에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혜능은 어느 날 한 비구니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글을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안다는 말씀인지요?’ 그러자 혜능은 ‘진리는 저 하늘의 달과 같고,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답했습니다.” 깨달음은 능력의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배움의 순서대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직책에 따라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햇빛이 비추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도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본과 물질의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익과 풍요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폭력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태계의 파괴와 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의 원리에는 인간의 생명과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요의 나라,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에서 매년 총기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부유한 나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된 물을 바다로 방출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되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물질과 자본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새 부대는 욕망과 탐욕이 아닙니다. 새 부대는 십자가와 나눔입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6,1-5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따뜻한 아버지로 다가가신 예수님이었지만,
율법 지상주의에 깊이 함몰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분이 또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언제 들어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들을 셀수도 없이
많이 만들고 나서는,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만 가차없이 잣대들 들이대며 단죄하고 처벌했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극히 사소한 일도 절대 금지였습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단묶기, 타작, 키질, 선별, 분쇄, 체질, 반죽, 굽기, 글쓰기, 건축, 이사, 점등, 소등 등등.
너무나 웃기는 부분도 수두룩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것은 금지되지만,
촛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손수건을 옷에 달고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땅에 침을 뱉는 것도 금지요,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금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같은 규정입니까?
안식일에는 약 1킬로 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상 걷은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엿새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편안한 몸과 마음을 쉬라는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 날 편안한 복장으로 호젓한 산길 3~4킬로 천천히 걸으면 그 얼마나 편안한 휴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밀이삭을 추수하는 규정도 꽤나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웃집 밀밭에 심어져 있는 밀 이삭을 그 자리에서 잘라 먹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대는 것을 금지되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잣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관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신명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습니다.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5-8)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수는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 정신>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는 단식 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인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곧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루카 6,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사실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노동’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오히려 '해야만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혹 '해야만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5)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6.연중 제22주간 금요일 1코린4,1-5 루카5,33-39
축제의 때, 단식의 때
"분별의 지혜"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엊저녁 식사시 알레르기 비염으로 요동치던 심신이 자고 일어나니 씻은 듯 정적의 평화입니다.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지혜이자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새벽 일어나 강론 쓰기전 대략 일별해 보는 인터넷 뉴스입니다.
예전에는 수천명이 보던 굿뉴스 묵상란이 요즘은 백명 안팎입니다.
아마도 유투브에 몰려가 있는 듯 합니다.
시골이 소멸해가고 수도권이 번성하는 이치와 흡사합니다.
블랙홀 같은 유투브는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끝없는 심연입니다.
정말 분별의 지혜와 절제가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9월2일부터 9월13일까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4개국에 제45차 해외 사목 순방길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고 기뻐하는 사진과 더불어
몇 메인 뉴스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감히 형제애를 꿈꾸도록 하자!”
“여러분의 최고의 환영과 믿음에 감사한다.”
“인도네시아는 내적믿음의 대화에서 모범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향한 도상의 순례자들로서 우정을 키워가도록 하자.”
“여러분은 삶의 올림픽에서 사랑의 챔피언들이다.”
제목들도 영감과 꿈을, 생명과 빛을 제공합니다.
시대의 현자, 영원한 청춘, 88세 고령의 가톨릭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현자의 말씀도 분별의 지혜에 도움이 됩니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안다. 부끄러움은 어른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다산>
부끄러움을 아는자가, 하나 덧붙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야한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맹자>
어제 읽은 노자도덕경 16장 한 말마디가 너무 좋아서 게시판에 써서 붙여 놨습니다.
“스스로 비우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라(致虛極 守靜篤;치허긋 수정독)”
이런 이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입니다.
자기를 몰라 남을 심판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결코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들 역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종이자 하느님의 신비의 관리인임을 자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묻습니다.
이 물음에는 심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물론 인간 현실을 모르는 어리석고 교만한 이들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사랑이 절대적 가치의 분별의 잣대라면 단식은 상대적 가치에 불과합니다.
아무 때나 단식할 것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축제의 때는 단식할 수 없다 합니다.
아무 때나 단식으로 고해인생을 자초하지 말고 축제의 때는 기쁘고 즐겁게 축제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단식한다면 과시가 아닌 이웃에게 숨겨진 단식, 하느님께 열린, 사랑의 단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주의가 만연한 세상, 곳곳에 맛집들이 넘치고 먹는 재미로 살아가는 이들이 넘치는 시절,
자발적 단식이 유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부끄러울 정도로 정말 너무 많이 잘 먹습니다.
밥을 배불리 먹고 카페에서 또 빵과 커피를 먹고 마십니다.
먹는 것 역시 빈부의 양극화가 뚜렷합니다.
때로 넘치는 식단을 대할 때는 “먹기도 힘들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많은 사람들이 먹는 재미(식욕), 성(性;sex) 재미(성욕), 돈맛(물욕)이란 기본적 욕구로 살아갑니다.
욕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탐식, 탐애, 탐욕이 문제인 것입니다.
공자의 군자 삼락(三樂)이라는 “배움의 즐거움, 친구와 만남의 즐거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 초연한 즐거움”에다 하느님 찾는 맛의 즐거움을 더한다면 정말 이상적이겠습니다.
밥맛이, 성(sex)맛이, 돈맛이 아닌 하느님 맛, 말씀의 진리 맛으로 사는 이들이 정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건강한 이들이겠습니다.
이래서 영적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며 축제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발상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유연한 단식,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수행에 유연할 것을 촉구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렇게 묵은 포도주가 상징하는 옛 것에 습관화, 보수화되어 꼰대가 되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유연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새삼 부단한 내적혁명의 회개가 절실함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좋은 분별의 지혜를 지니고 늘 “새 포도주에 새 부대”의 현실을
살게 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시편37,27). 아멘.
9/7(토) [(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조재형 신부)
2.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5)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9/7(토) [(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78일차 기도
복음<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5)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7일(토) 8시10분 -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4년 9월 9일 월요일[(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4) | 2024.09.09 |
---|---|
[매묵]2024년 9월 8일 주일[(녹) 연중 제23주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4.09.09 |
[매묵]2024년 9월 6일 금요일[(녹) 연중 제2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4.09.06 |
[매묵]2024년 9월 5일 목요일[(녹) 연중 제2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4.09.05 |
[매묵]2024년 9월 4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3) | 2024.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