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8일 주일[(녹) 연중 제23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35,4-7ㄴ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
○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
○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
제2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2,1-5
1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4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구원자이신 주님, 주님 나라의 상속자로 선택하신 교회를 굽어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의 말을 귀여겨듣고 바람을 들어줄 수 있게 하소서.
2. 세계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임금이신 주님, 세계의 지도자들을 주님의 자비로 감싸 주시어, 평화를 위하여 일하다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기꺼이 참아 내며, 대화와 협력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3.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애로우신 주님, 경제 발전에도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살펴 주시어, 굶주림과 질병에서 구하시며, 사회와 이웃의 관심으로 주님의 참사랑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진리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어,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힘을 얻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저희에게 참된 믿음과 평화를 주셨으니
저희가 예물을 바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합당히 공경하고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여 온 마음으로 이 신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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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3주일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의 주인공인 파흠은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어느 날 아주 싼 값에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파흠은 그 소문을 따라서 원주민이 사는 동네를 찾았습니다. 정말 원주민들은 단돈 1,000원에 원하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침 해가 뜰 때 출발해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면 그만큼의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지고 싶었던 파흠은 해가 뜨면서 걸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려했습니다. 파흠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더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방향을 돌려 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해가 지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뛰고 또 뛰다 파흠은 마을에 도착하면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파흠은 많은 땅을 원했지만 결국 파흠이 묻힌 땅은 ‘반평’에 불과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시애틀’ 추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에게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시애틀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백인 형제들이 나에게 우리 땅을 팔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땅을 팔수는 없다. 땅은 우리 어머니이며, 우리는 그 어머니의 일부분이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우리에게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잠든 곳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백인들은 땅을 소유물로 여기지만,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모든 나무와 바위, 강물, 숲의 소리조차 우리 민족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이 땅은 우리의 영혼을 품고 있기에, 그 어느 곳에도 우리 영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신성한 유산이다. 백인들은 자연을 파괴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돌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판다면, 그 대가로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달라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 백인들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의 신성함을 존중하며, 그곳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하늘과 땅, 나무와 물이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이 땅 위에 우리의 영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땅을 사려했던 주지사는 원주민 추장의 깊은 성찰을 존중하며 도시 이름을 ‘시애틀’로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파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뜻은 ‘열려라’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년 넘게 전쟁 중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땅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해가 지면 돌아와야 하는데 러시아는 2년이 넘게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는 반대로 러시아의 땅으로 진격했습니다. 1,000킬로가 넘게 진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의 땅에서 종살이 했던 민족입니다. 나라 없이 2,000년을 방황하던 민족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은 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착촌을 만들고, 이웃 사람을 내 쫓고 있습니다.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민병대는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사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에게도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에도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과 미신은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땅을 빼앗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 때문에 희생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일: 나해
복음: 마르 7,31-37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공생활 기간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손을 집어넣지?
왜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쉽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허물투성이면 허물투성이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전삼용 요셉 신부
연중 제23주일
마르코 7,31-37
꽉 막힌 사람이 뻥 뚫린 사람이 되는 방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을 더듬는 이에게 말을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방식은 당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당신 침을 손가락에 묻혀 그의 혀에 대고는 숨을 내쉬시며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열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어떤 사람이 열리지 못한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섬에, 여자 주인공은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에 타인에게 열려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가 갑갑하게 닫힌 사람인지 활짝 시원하게 열린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원작으로 한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거의 성경 말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에서 시골집으로 대피한
네 남매의 이야기를 따릅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중 루시는 우연히 그녀를 마법의 나라
나니아로 데려다 주는 옷장을 발견합니다. 결국 네 남매는 모두 나니아에 입성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마녀와 아슬란이라는 사자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나니아에 한 번 들어가 하얀 마녀를 만난 에드먼드는 마녀의 약속에 유혹받아 형제들을
배신합니다. 에드먼드는 자신이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가장 소외당하였다고 여기고
마녀의 헛된 약속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녀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녀의 약속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마녀의 손아귀에서 구해온 것은 아슬란입니다. 아슬란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에드먼드를 구합니다. 아슬란이 사라지자 마녀는 군대를 이끌고 아슬란의 군사들에게
진격하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해 희생한 자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에드먼드는 형제들과 아슬란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귀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과 진실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오직 악의 세력과만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혀도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슬란의 죽음으로 그는 해방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힘센 왕이 자기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자기를 위해 죽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닫히는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각자 안에 있는 마녀입니다. 창세기에는 뱀으로 나옵니다. 그놈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이들은
그에게 먹힙니다. 이는 마치 사막에 홀로 세워진 한 채의 오두막과 같습니다.
길을 가는 지친 손님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도둑질하거나 그 집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젊으셨을 때 돈이 아주 많았는데
그것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며 살다가 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부를 자랑해 왔는데 망하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겁냈습니다. 점집에도 갔다가 결국 성당으로 돌아와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사랑한다.”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그녀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창피한 게 없어졌습니다.
성당으로 가서 바로 화장실 청소부터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게 되기 때문에
더는 내가 무언가를 잃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명동성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의 집은 자기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들이 열리게 되는 원리입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7.연중 제22주간 토요일 1코린4,6ㄴ-15 루카6,1-5
비움의 사랑, 비움의 여정
“주님은 분별의 잣대”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새벽 일어나자 마자 인터넷을 열어 보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대략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깊게 전개되는 양상입니다.
새삼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안에 확고히 자리잡고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교황님 기사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변두리의 교황은 드디어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45차 해외 사목 방문중 3일간 일정으로 두 번째로 오세아니아주 파푸아뉴기에서
여행이 시작되었다.
파푸아뉴기니는 바티칸으로부터 19,047km 떨어진 곳이다. 비행기로 가장 멀리 여행중인
교황 프란치스코이다.
참으로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나는지, 그가 얼마나 많이 배려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세계 중심부의 바티칸에서 변두리 파푸아뉴기니까지 미치는 교황님의 넓고 깊은 시야가 경탄스럽습니다.
교황님의 비움의 사랑, 사랑의 절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보는 듯 합니다.
날로 자신을 비워가면서 내면을 넓혀 주님을 닮아감이 겸손이자 지혜이니 이 또한 은총입니다.
비움의 사랑, 사랑의 절정은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집없이 떠돌아 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된 비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요, 파푸아뉴기니 사목여행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케노시스 즉 하느님의 비움의 절정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움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고난과 시련, 고통을 비움의 계기로 삼아 날로 겸손해지면서 주님을 닮아감이 지혜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눈과 귀가 끌리는 곳보다 마음의 중심이 원하는 바를 잘 살펴보라.”<다산>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논어>
마음의 중심이 원하는바 하느님이요, 덕을 사랑하는 자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가로 질러 지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자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오?”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 예수님입니다.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의 법으로 분별하는 예수님입니다.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의 잣대로 보면 배고픈 현실에서 밀이삭을 뜯어 비며 먹은 제자들은 무죄입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가면서 제자들을 옹호하는 예수님입니다.
다윗 또한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기에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이런 제사 빵을 나눕니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예수님이었기에 이런 용기와 분별의 지혜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되었기에 이런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을까?” 물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비움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의 일치를 깊이해 주며
올바른 분별의 지혜를 지니게 합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ㄱ). 아멘.
9/8(일) [(녹) 연중 제23주일], 79일차 기도
1. 신앙과 미신은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땅을 빼앗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 때문에 희생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조재형 신부)
2.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쉽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허물투성이면 허물투성이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양승국 신부)
3. 우리가 세상에 닫히는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각자 안에 있는 마녀입니다. 창세기에는 뱀으로 나옵니다. 그놈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이들은
그에게 먹힙니다. (전삼용 신부)
4.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된 비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요, 파푸아뉴기니 사목여행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케노시스 즉 하느님의 비움의 절정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움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고난과 시련, 고통을 비움의 계기로 삼아 날로 겸손해지면서 주님을 닮아감이 지혜입니다.
(이수철 신부)
9/8(일) [(녹) 연중 제23주일], 79일차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신앙과 미신은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땅을 빼앗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 때문에 희생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아멘.
- 2024년 9월9일(월) 1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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