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15일 주일[(녹) 연중 제24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0,5-9ㄴ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 나는 주님을 사랑하네. 애원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 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
○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네. 나는 주님의 이름 불렀네. “주님, 부디 이 목숨 살려 주소서.” ◎
○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네. 주님은 작은 이들을 지키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
○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
제2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2,14-18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7-35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빛이신 주님,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세상 것을 좇아 주님을 헛되이 섬기는 잘못에서 벗어나, 주님의 진리를 찾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이 땅의 정치인들을 주님의 정의로 이끌어 주시어, 자신과 정당의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모든 이가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올곧게 판단하고 실천하게 하소서.
3. 안전사고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저희 삶의 터전을 살펴 주시어, 안전사고로 몸과 마음을 다친 이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더 이상 일터에서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희망이신 주님, 주님만을 믿고 바라며 성가정의 모범을 따르려는 저희 가정을 굽어보시어, 신망애 삼덕을 굳건히 지키고 실천하며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예물기도
이 제물을 너그러이 받으시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가 드리는 이 제사가
모든 이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
<또는>
1코린 10,16 참조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며, 우리가 나누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먹는 것이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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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4주일
구역 모임에서 ‘복음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그날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피와 내 몸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과 성공을 원했습니다. 현실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가치와 다른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데, 저희가 어디로 떠나겠습니까?” 구역 모임에 참석한 교우들은 성경 말씀 중에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서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저는 그날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게 천주교는 손에 있는 ‘지문’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유한 지문이 있듯이, 천주교는 제게 운명처럼 주어졌습니다. 친척들은 세례명을 불렀고, 주일은 당연히 성당 가는 날이었고, 기일에는 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편안하듯이, 사람은 공기를 마셔야 숨을 쉬듯이 천주교는 제게 물과 같고 공기와 같았습니다. 천주교라는 신앙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천주교라는 신앙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인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저는 천주교라는 신앙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회의를 느낀 적이 없습니다. 형제 중의 한 명은 사제가 되기를 바라셨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저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무엘이 형제 중에 다윗을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형제 중에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가브리엘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1982년에 104명이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신학교의 규칙과 기숙사 생활 따르지 못해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떤 친구는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의 길을 따르지 못해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떤 친구는 신학과 철학이 어려워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40여 명은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주는 음식이 좋았습니다. 신학교의 도서관도 좋았고, 나의 책상이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이 어려웠지만, 사고의 깊이와 폭이 넓어져서 좋았습니다. 방학 때는 본당에서 지냈습니다. 주일학교의 일을 도와주고, 성당의 일도 도와주며 지냈습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그만큼 피곤했습니다. 개학이 되어 신학교로 복귀하면 몸도, 마음도 편했습니다.
33년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브리엘아!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처음 10년은 ‘질풍노도’와 같이 지냈습니다. 예비자 교리, 성경공부를 하였고, 청년 단체를 맡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청년 레지오, 청년연합회와 함께하였습니다. 아쉬운 점은 영적인 동반자가 되어야 했는데, 친교와 나눔의 동반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다음 10년은 ‘영신수련’과 함께하였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영신수련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신학교에서 영신수련 지도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왕복 200킬로가 넘는 거리를 매주 다녔습니다. 영신수련은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신학생이 서품 받기 위해서는 30일 동안 영신수련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피정해야 합니다. 영적인 부족함을 느꼈던 저는 영신수련 지도 사제 모임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걸 택할 수 있다.” 영신수련은 제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가브리엘아!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도 베드로 사도처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데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행동으로 고백합시다. 자기 목숨을 버릴 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하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일
복음: 마르 8,27-35
한쪽 발은 주님께로, 다른 한쪽 발은 세상에!
남아있는 삶을 예수님과 함께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영광스럽게도 베드로는 사도단의 대표이자 수제자로 발탁됩니다.
스승님과 밀착 동행하다보니,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신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장엄하게 신앙 고백을 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극찬도 받고 지지도 받고, 마침내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손에 쥐게 됩니다.
한 마디로 승승장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두 발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한쪽 발은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영적인 세계로 건너갔지만,
다른 한쪽 발은 아직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세상 한가운데 남아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베드로의 성소 여정은 흔들리는 작은 배 한 척 같았습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장엄하게 스승임을 따라 나섰지만 아직도 베드로 안에는 인간적 야심들과 미성숙,
다양한 결핍과 긴가민가 하는 망설임이 남아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핍은 스승님께서 조만간 겪으실 수난 여정과 십자가 죽음을 거부함으로 인한
결핍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르 8,32)
그 결과 베드로는 스승님으로부터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정말이지 충격적이고 모욕적인 지탄을 받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 숱한 인간적 약점과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그 많은 결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덕행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지속적인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웠지만, 마지막 순간, 베드로에게는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자비를 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분께서 운명으로 주신 십자가를 기쁘게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4주일: 나해
복음: 마르 8,27-35: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 내가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되는 때에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보면 그렇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힘없고 지친 자들을 위해 영과 예언을 받으신 야훼의 종으로 나타난다(이사 50,4).
그에게 온순과 겸손과 순명을 주시고(이사 50,5; 참조: 필립 2,8),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따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침 뱉음과 수치를 당한다(이사 50,6).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단 하나의 도움이 있음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나름대로 느낀 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일 수 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답한다.
하느님께 축성된 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분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치적인 결정적 실현을 기대하고 있다(사도 1,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뜻으로 메시아를 알아듣지 않도록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어떤 착각도 하지 않게 하려고 첫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31-32절).
여기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반응이 나타난다.
베드로의 모습이 그렇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힘없는 무기력한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메시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의 모습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것인데
그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원수의 일이고 고소하는 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 호통을 치신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사막에서 사탄이 놀라운 메시아적 기적들을
행하도록 했던 것이나, 십자가 아래에서도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내려오라고 했던 것처럼 베드로의 발언을 사탄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계시다(33절).
그리고 이어서 충실한 제자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즉, 자기의 존재를 그분과 복음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34-35절 참조).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게 되며, 단지 인간적인 의지는 은총이 함께 하지 않으면
확실한 죽음만이 있을 뿐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 신앙이 요구하는 행위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강하게 말하고 있다.
믿음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야고보 2,14).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야고보 2,15-16).
진정 이 믿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살아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17).
“만일 믿음이 자비를 통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아무것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갈라 5,6; 참조: 에페 6,25; 1테살 1,3).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이다.
이 은총이 나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항상 현실과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믿음은 외적인 환경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적인 행위와 태도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우리 신앙인들도 복음에 충실하다면, 형제애를 통하여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 찬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믿음의 행동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이기주의 바람막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편하지 못한 생활환경에서도 믿음을 실천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 믿음이 십자가 위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베드로가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것이나, 또는 궁핍한 형제들에게 위로의 말만 해주는 것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의 구체적인 실현을 살아가는 용기와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14.토요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민수21,4ㄴ-9 요한3,13-17
주님의 성 십자가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시편78,7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선물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결코 잊지 말라는 화답송 후렴 말씀입니다.
제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을 때 가장 좋은 것은 성호경 기도였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성호를 그으며 전존재에 주님의 십자가를 각인하며 바치는
성호경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성호경 기도를 바쳤겠는지요!
이보다 짧고 중요하고 좋은 기도는 세상 어느 종교에도 없을 것입니다.
나 더하기(+) 주님은 모두가 되지만, 나 빼기(-) 주님은 제로임을 깨닫게 해주는 성호경입니다.
알게 모르게 십자가의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는, 그리하여 각자 고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오늘은 순교자 성월 9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8월 6일 주님 변모 축일후 40일만에 맞이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영원히 바라볼 유일한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 십자가뿐이겠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이 있습니다.
피정집 제의방에서 미사전례 입당전 절을 하려는 데 십자가가 없어 당황했던 추억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어디에 절할 수 있겠는지요?
우주 인류 역사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주와 인류는
어둠의 블랙홀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온 우주와 인류의 빛이자 중심이요 의미가 되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기도 역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은혜를 요약합니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아니 이미 성 십자가의 은총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텅빈 허무를 사랑의 충만으로 바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이,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이 되는 성 십자가입니다.
바로 오늘 요한 복음의 예수님의 고백은 당신의 성 십자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온 세상이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되었으니,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표지가 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성 십자가의 은총만이 우리를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역사도 참 깊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335년 9월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기념성당을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9월14일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함으로 시작된 축일입니다.
후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합니다만, 62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수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됩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잡게 됩니다.
성주간 성 금요일 수난 예식중 십자가 경배시 노래했던 내용들은 얼마나 은혜로웠던지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주의 십자가를 경배하오며 주의 거룩하신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십자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아무 숲도 이런 잎과 이런 꽃을 못내리라.”
이 모두를 요약한,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은혜를 노래한 오늘 감사송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나무에서 인류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주님의 성 십자가는 영적승리의 표징도 됩니다.
잃었던 에덴동산을 찾아주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생명나무에서 생명나무 열매인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고맙습니다.
축일의 유래는 제1독서 민수기에서 보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유랑시 모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바로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불평으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한 모세의 간청에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은 모세가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가 되고 구리뱀은 성 십자가의 예표가 됩니다.
말 그대로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을 상징하는 주님의 성 십자가이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친히 확인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믿고 바라볼 사랑의 대상은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인
파스카 예수님의 성 십자가뿐입니다. 아멘.
9/15(일) [(녹) 연중 제24주일], 되새김 구절
1.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걸 택할 수 있다.” 영신수련은 제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조재형 신부)
2. 그 숱한 인간적 약점과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그 많은 결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덕행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지속적인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웠지만, 마지막 순간, 베드로에게는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자비를 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믿음의 행동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이기주의 바람막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조욱현 신부)
4.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이수철 신부)
9/15(일) [(녹) 연중 제24주일] , 86일차 기도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게 하소서.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게 하소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걸 택할 수 있게 하소서.
- 2024년 9월15일(일) 12시3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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