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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9월 27일 금요일[(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9월 27일 금요일[(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나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를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 사제는 1737년에 시성되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셨다. 오늘날 수많은 이가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입당송

루카 4,18 참조
주님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쳐 주게 하셨다.

본기도

하느님, 가난한 이의 복지와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복된 빈첸시오 사제에게 사도의 열정을 부어 주셨으니
저희도 같은 정신으로
그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고 그가 가르친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3,1-11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5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4(143),1ㄱ과 2ㄱㄴㄷ.3-4(◎ 1ㄱ)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이시네. ◎
○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피시나이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헤아리시나이까? 사람이란 한낱 숨결 같은 것, 그 세월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사옵니다. ◎

복음 환호송

마르 10,45 참조
◎ 알렐루야.
○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26-31)와 복음(마태 9,35-38)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하느님, 복된 빈첸시오에게 성찬의 신비를 삶으로 드러내게 하셨으니
이 제사의 힘으로
저희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07(106),8-9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성사로 힘을 얻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빈첸시오의 모범과 전구로 도움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성자를 본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불가항력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도 불가항력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휴스턴, 오클로하마, 포트워스, 오스틴에서도 참가해 주었습니다. 160명이 참가 신청해 주었습니다. 경품도, 티켓도 잘 마련했고, 골프장도 멋진 곳으로 예약했습니다. 아쉽게도 일주일 전부터 확인했는데 대회 당일에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는 정확했고, 비가 내리는 중에 골프대회를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참가해서 골프대회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중에도 끝까지 함께 해준 참가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행사 준비를 위해서 애써 주신 준비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겁니다. 달라스 날씨가 무더운데, 비가 내리니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골프대회를 통해서 수익금은 필요한 곳에 나누어 주고, 교우들은 친교를 나누고, 교우가 아닌 분들에게는 교회를 알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까르페디엠(Carpe Diem)'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라틴어인 이 말의 문자적 뜻은 현재를 잡으라.(Seize the day)”는 말입니다. , “현재를 신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라.” 그리고 오늘을 견뎌라는 속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있음을 항상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현재를 견뎌냅니다. 오늘은 그날을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한 이 말이 다시 소환 된 것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고 말하면서입니다. 저는 이 말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골프대회 날, 비가 오는 걸 원망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계절을 바꿀 수 없다면 바뀌는 계절을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비가 내렸지만 바람은 별로 없었고, 내리는 비도 과하지는 않았기에 골프대회를 잘 마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가 내리니 오히려 차분해져서 좋았습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에서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까르페디엠이라는 말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도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 때문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고통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왔으니, 이 세상을 떠날 때 빈 몸으로 가는 것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평가와 세상의 가치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엘리야라고 하든, 세상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든, 세상 사람들이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못한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복음: 루카 9,18-22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빈첸시오 드 폴처럼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신 분은 드물 것입니다.

사제품 이후 좀 더 깊이 있는 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빈첸시오 드 폴에게 한 가지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마르세이유의 한 귀부인이 학비에 보태라고 거금의 유산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한걸음에 달려간 그는 두둑한 봉투를 건네받고 품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돈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모든 소지품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습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 몸은 굵은 철사줄에 꽁꽁 묶여 아프리카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도양양하던 사제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는 선주의 손에서 의사의 손으로, 의사의 손에서 농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기적과도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빈첸시오 드 폴이 겪었던 특별한 바닥체험은 그의 성소 여정을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같았으면 그런 불운을 겪게 해주신 주님과 해적들을 원망했을 텐데, 오히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만 만나면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베풀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사회 안에서 넘쳐흐르던 고아들과 과부들, 환우들과 임종자들,

노예들과 재소자들, 걸인들과 병든 나그네들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한 가장이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가 없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이

굶어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빈첸시오 드 폴에게 전해졌습니다.

저 같았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는 선에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 당국에 부탁해 가장을 석방시켜주도록 탄원했습니다.

남은 형기는 자신이 대신 뱃사공 역할을 하며 채워주었답니다.

 

참으로 위대한 자비의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 ‘자선’ 하면 즉시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그의 얼굴입니다.

 

그의 생애와 영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해 아낌없이 조각나고 나눠진 거룩한 성찬의 삶,

빛나는 자선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한 자비심, 연민의 정, 측은지심이 많이도 결핍된 우리입니다.

피눈물 흘리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의 고통 앞에서도 무더덤한 우리를 향해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

 

어제 복음에서는 군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에 ‘아버지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개의 동사,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 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여타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복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본회퍼)는 말을 떠올려 줍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복종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26.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코헬1,2-11 루카9,7-9

 

                                                                 허무의 병, 무지의 병

                                                          “약(藥)은 사랑의 하느님뿐이다!”

 

사랑과 겸손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선물처럼 우리를 찾아오시듯 시(詩)도 그렇게 선물처럼 찾아옵니다.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참 맘에 드는 시가 찾아왔을 때 기쁨은 참으로 오래갑니다.

얼마전 “꽃”이라는 시가 찾아 왔고 그때도 나눴지만 곱게 피어난 맨드라미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인에게 재차 시화(詩畫)를 부탁하여 어제 저녁 무렵, 세상사에 지쳐있는 많은 분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랑의 나눔도 중요하기에 저녁 묵상시간, 휴식시간에 나눴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새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하루하루 꽃같은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꽃같이 기쁘게 살자는 것입니다.

8월 중순에 찾아온 시인데 지금도 기쁨과 향기로 남아있는 시입니다.

더불어 꽃과 관련된 잊지 못하는, 몇 번이나 인용한 시도 있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가난한 자매가 꽃같은 미소로 꽃 한송이를 들고 왔기에 즉시 써드린 답시에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정말 꽃같은 예쁜 영혼을 만나면 “꽃보다 예쁘다!” 감탄하곤 합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아름다운 영혼, 꽃같은 영혼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매3주간 저녁성무일도 첫째 시편 후렴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안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꽃다우신 이름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지상에 없습니다.

바로 영혼의 병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치명적 영혼의 병, 무지의 병, 허무의 병에 약(藥)은 단하나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뿐임을 고백하는 위의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꽃다운 섭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려 25년전 저를 찾아와 큰 위로를 줬던 “민들레꽃” 시도 생각납니다.

순간 창밖 샛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이 하늘의 별처럼 보였습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다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바로 지금까지 내용들이 오늘 제1독서 코헬렛과 짧은 루카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코헬렛을 성경에 넣느냐 역사상 큰 논난이 있었으나 성경에 속함으로 얼마나 영적사고가 풍부해졌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일부 생략했지만 단숨에 읽혀지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마음 썰렁하게 하는 체험적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작자의 허무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중세기의 대영성가 토마스 아 캠피스의 “코헬렛의 삶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 묘사는 최고의 지혜이니, 모든 것이 헛되고 덧없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에 공감합니다. 

 

생명과 하느님을 찾아 만나야 비로소 치유될 허무의 병, 무지의 병이요,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시달려 고생하기 전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친교의 사랑과 신뢰를 날로 두터이 하자는 것입니다.

 

삶은, 행복은, 천국은 선택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선택을 못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상실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지요!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헤로데 영주가 삶의 중심과 의미 상실의 전형적 본보기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죽임으로 대죄를 지은 헤로데는 예수님의 등장에 전전긍긍 당황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애당초 하느님 중심의 삶도 없었던 우유부단한 헤로데에겐 답이, 약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중심을 대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우상들을 두고 방향과 중심, 의미를 잃고

지리멸렬한 혼돈과 방황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헤로데는 오늘날도 무수합니다.

고맙게도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이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치유제가 됩니다.

시편 저자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닐에 힘을 실어 주소서.”

 

얼마나 좋습니까.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고는 무지와 허무의 블랙홀, 심연에서, 늪에서 끄집어 내실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찬미의 사람들은 무지와 허무의 심연은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충만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와 허무의 병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늘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로 응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2024년 9월27일 금요일 [(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되새김 구절

 

1.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조재형 신부)

 

2. 그의 온 몸은 굵은 철사줄에 꽁꽁 묶여 아프리카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도양양하던 사제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는 선주의 손에서 의사의 손으로, 의사의 손에서 농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기적과도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빈첸시오 드 폴이 겪었던 특별한 바닥체험은 그의 성소 여정을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같았으면 그런 불운을 겪게 해주신 주님과 해적들을 원망했을 텐데, 오히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만 만나면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베풀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헤로데 영주가 삶의 중심과 의미 상실의 전형적 본보기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죽임으로 대죄를 지은 헤로데는 예수님의 등장에 전전긍긍 당황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애당초 하느님 중심의 삶도 없었던 우유부단한 헤로데에겐 답이, 약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중심을 대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우상들을 두고 방향과 중심, 의미를 잃고

지리멸렬한 혼돈과 방황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헤로데는 오늘날도 무수합니다.(이수철 신부)

 

2024년 9월27일 금요일 [(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98일차 기도

 

복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27일(금) 9시1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