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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0월 7일 월요일[(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7일 월요일[(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이 지중해로 세력을 뻗치자,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신성 동맹)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다.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것이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고 여겼다. 이를 기억하고자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다. 1960년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을 바꾸셨다.

입당송

루카 1,28.42 참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본기도

주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1(110),1ㄴㄷㄹ-2.7-8.9와 10ㄷ(◎ 5ㄴ 참조)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그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네. 그 계명들은 모두 참되고, 진실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영원무궁토록 견고하네. ◎
○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3,34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사도 1,12-14)와 복음(루카 1,26-38)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정성껏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시어
저희가 합당하게 성자의 신비를 기념하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감사송

<복되신 동정 마리아 감사송 1 : 어머니이신 마리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하고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 ( ) 축일에
아버지를 찬송하고 찬양하고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외아들을 잉태하시고
동정의 영광을 간직한 채
영원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으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이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고
주품천사들이 흠숭하며 권품천사들이 두려워하고
하늘 위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복된 세라핌이
다 함께 예배하며 환호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소리를 모아 삼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감사송 2 : 마리아의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
거룩하신 아버지,
모든 성인을 훌륭히 이끌어 주신 주님을 찬미하고
특히 저희가 기념하고 공경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노래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주님께서는 땅끝에 이르기까지 큰일을 하시고
대대로 자비를 너그러이 베푸셨나이다.
비천한 종 마리아를 돌보시어
마리아를 통하여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원자로 보내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1,31 참조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이 성사로 성자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저희가
성자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 기쁨과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세상일은 참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도 무척 다릅니다. 저의 형제들도 모두 성격과 외모가 다릅니다. 큰 형은 예술적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필력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은 좋은 몸을 지녔습니다. 형제 중에 키가 제일 컸습니다. 달리기도 잘 했고,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큰 형과 달리 예술적인 감각이 부족했습니다. 작은 형과 달리 좋은 몸을 타고 나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제게는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성품을 주셨습니다. 공장에서 출고 되는 물건은 기능이나 성능이 다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이 반품을 요구할 것이고, 회사는 곧 어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어도, 같은 선생님에게서 배웠어도 성품과 기질이 다른 것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성격과 체질이 좋다고 합니다. 코로나와 같은 질병이 찾아와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때입니다. 같은 로마 병사지만 반응이 달랐습니다. 어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했습니다. 빨리 끝내려고 예수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사는 이방인이었음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저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예수님 옆에 있던 죄인들도 반응이 달랐습니다. 한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오. 그리고 나도 구해 주시오.” 그러나 또 다른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오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의 관점은 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예수님의 관점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다. 나의 삶은 과연 어떤 관점에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 10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 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묵주기도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복음: 루카 10,25-37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 매일의 사랑 고백, 묵주 기도!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여기저기 몸도 아팠지만, 이 길을 계속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 땡땡이도 많이 치고, 제대로 신학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지라, 30년 전부터 반성하는 마음으로 매일 영성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영적 독서 책 한 권을 만나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탁월한 영성가들의 신앙과 삶, 지혜와 경험이 맞춤형으로 내 손안으로 딱 들어오니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최근에 영적 독서를 하던 중에 묵주 기도와 관련된 풀톤 쉰 대주교님의 말씀을 접하고

정말 가슴이 뛰고 설레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 기도는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인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서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해요 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치면, 그것은 “성모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묵주 기도를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 기도가 묵상 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 등 염경기도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가 막힌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문 매 신비 안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묵상합시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묵주 기도는 당연히 묵상 기도입니다.

 

묵상이나 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묵상 없이 그저 입으로만 줄줄 바친다면 묵주 기도가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이방인들의 빈말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께서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성모님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더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결국 묵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현존 체험, 성모님 동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니,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해야>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과 ‘자신은 그분께 매여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사랑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루카 10,27)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에서, 이제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 “서로에게 사랑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루카 10,28;37)

 

그러니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실행하고,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 때가 아니라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신문쪽지를 바라보며 혀만 끌끌 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6.연중 제27주일                                                         창세2,18-24 히브2,9-11 마르10,2-16

 

                                       더불어(together), 주님과 일치의 여정

                                         “주님 중심, 주님 닮기, 서로간 거리”

 

교회는 하느님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식구, 한가족입니다.

‘1인 가구’라 해도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외로울 수 없음은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에 속해 있기에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에 속해 이렇게 주님의 한가족임을 확인하는 미사전례에 참석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 축복의 하느님,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고백이 정말 ‘하느님 다우심’을 잘 드러냅니다.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

 

우리는 허무의 존재, 무지의 존재도 아닌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10월3일 결혼 50주년을 맞이한 어느 노부부중 부인이 쓴 글 제목도 반가웠습니다.

“반세기 누려온 가난한 행복”, 이 노부부는 무조건 구원이요 성인이라 저는 감히 고백합니다. 

 

‘부부는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다’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이제 꽤 살고 보니 정말 함께 평생 살아가는 부부들을 보면 참 신기하고 반갑고 기쁘고

고맙고 존경스럽습니다.

 

얼마전 두가지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오랜만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된 자매가 얼마나 기뻐하는 지, 순간 깨달은 진리입니다.

“아, 서로가 구원했구나! 서로 감사해야 하겠구나!”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혼인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혼인할 수 없고, 자식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습니다.

부부 둘이 함께 해야 혼인도 할 수 있고 자식도 가질 수 있음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입니다.

 

사이좋게 살다가 직장 문제로 3개월 “혼자” 떨어져 살다가 다시 합류하여 “함께” 살게 된 분에게

그 차이를 물었습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와 둘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니! 정말 소스라치게 깨달은 진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를 보세요.

하느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반려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에 앞서 사람인 아담은 하느님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게 하셨으나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반려견이 반려식물이 좋다 해도 사람 아닌 것들은 결코 나의 반쪽인 협력자가, 반려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빼낸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사람에게 데려오셨을 때,

기뻐 환호하는 사람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얼마전 사랑하는 짝을 만나 기뻐하는 형제자매의 심정도

이와 흡사했을 것입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이 진리를 재차 확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오늘 영문 주석 마지막 말마디도 잊지 못니다.

 

“But Jesus is right! Divorce is not the answer”

(예수님이 맞다! 이혼은 답이 아니다)

 

그래서 저는 힘든 부부가정생활중 기도하며 온힘을 다해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지체없이

“살아 있는 순교자”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것은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간곡한 요청입니다.

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보라는 것이며, 그래도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사랑의 하느님은 이혼을 허락보다는 묵인하실 것입니다. 

 

아주 예전 제 신학교 시절 교회법 교수신부님이 로마에서 혼인법 마지막 교수님이 했다는 말마디로

한학기 강의를 끝내던 장면도 잊지 못합니다.

고도의 사목적 배려로, “교회 혼인법을 총동원하여 살 사람은 살게 해주고, 살 수 없는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바로 이것이 복음정신이다.”라는 말마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쪽입니다.

참 좋은 협력자와 반려자를 만날 때 비로소 온전한 한쪽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일치만으로는 하나된다 해도 영원한 반쪽으로 머물수 있으니,

나의 원래 반쪽인 주님과 만나야 비로소 온전한 한쪽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이 고마운 것은 내 반쪽인 주님과 하나됨으로 온전한 한쪽의 사람이 된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진짜 반쪽인 주님과의 일치가 없으면 우리의 영적 목마름과 배고픔은 결코 영원히 해소 될 수 없습니다. 

 

부부는 물론 함께 하는 형제자매들이야 말로 얼마나 고마운 하느님의 선물들인지요!

그래서 혼자서는 구원이 없다 하는 것이고, 천국입장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라 하는 것이며,

우리 삶의 여정앞에는 반드시 붙은 말마디가 있으니 바로 “더불어(together)”입니다.

 

이래서 부부가정공동생활, 수도가정공동생활, 교회가정공동생활입니다.

서로 따로가 아니라 모두가 ‘주님 안에서’ 이뤄지는 가정공동생활입니다.

 

여기서 제가 더불어의 일치의 여정에서 강조하는 세 요소가 하느님 중심, 하느님 닮기,

서로의 거리 존중입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막연한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은 예수님 중심이며 하느님 닮기는 예수님 닮기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으로 제대로 살기위해,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는 필수 4대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 해당될 유일한 대상이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구원의 영도자이신 예수님을 삶의 목표로, 삶의 중심으로 삼을 때 비로소 더불어 일치의 여정입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의 예수님 고백이 참 장엄합니다.

 

“우리는 천사들 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형제이자 도반이요, 우리의 영원한 반쪽이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 방향 예수님 같아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모두 예수님께 맞춰갈 때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저절로 서로 간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사랑은 예술이자 평생 배워야 할 기술입니다.

아무리 배워도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들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노력에 결코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형제들 모두가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서로간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져 저절로 다양성의 일치가 형성됩니다.

 

예수님 중심과 닮기에 이어 서로의 거리 존중입니다. 홀로와 함께의 균형과 조화가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막연한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서로의 거리를, 차이를,

영역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예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할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중심의 삶이 깊어지면서 날로 주님 사랑을 더욱 닮게 되어 형제들 서로간의 우정도 깊어지며,

서로간의 예의와 배려의 사랑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아멘.


10/7(월) [(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 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훗날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조재형 신부)

 

2. 묵주 기도를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 기도가 묵상 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신문쪽지를 바라보며 혀만 끌끌 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제가 더불어의 일치의 여정에서 강조하는 세 요소가 하느님 중심, 하느님 닮기,

서로의 거리 존중입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막연한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중심은 예수님 중심이며 하느님 닮기는 예수님 닮기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으로 제대로 살기위해,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는 필수 4대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 해당될 유일한 대상이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구원의 영도자이신 예수님을 삶의 목표로, 삶의 중심으로 삼을 때 비로소 더불어 일치의 여정입니다.

(이수철 신부)

 

10/7(월) [(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제108일 기도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신문쪽지를 바라보며 혀만 끌끌 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7일(월) 8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