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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0월 3일 목요일[(녹) 연중 제26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3일 목요일[(녹) 연중 제26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다니 3,29.30.31.43.42 참조
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7-8ㄱㄴ.8ㄷ-9.13-14(◎ 13)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자비를 베푸시어 응답하소서.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주님, 당신을 생각하나이다. ◎
○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를 돕는 분이시옵니다.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 환호송

마르 1,15
◎ 알렐루야.
○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알렐루야.

복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이 제사로 저희에게 온갖 복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19(118),49-50 참조
주님, 당신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저는 그 말씀에 희망을 두었나이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
<또는>
1요한 3,16 참조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시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신비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며 그 수난에 참여하고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주변을 보면 제복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사는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사에게 신뢰와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경찰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경찰의 안내와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질서를 유지하고,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는 사람입니다.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대원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방대원의 차가 지나갈 때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합니다. 소방대원들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제복을 입고 있는 동안, 그 제복이 가지는 권위와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사회의 질서와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더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면, 경찰이 모여서 도박을 한다면, 군인이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더 큰 비난과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아이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왜 사제복을 입으세요?’ 아이는 사제복에 있는 하얀 칼라가 궁금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별 뜻 없이 그것이 법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신부님이 아이에게 영어로 사제복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클러지 칼라(clerical collar)라고 불리는 하얀 색 칼라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헌신과 순결: 하얀 색은 사제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순결하게 살아가겠다는 서약을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자신이 세속적인 생활과 구별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제의 정체성: 사제복의 하얀 칼라는 사제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직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이로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빛: 하얀 색은 성서적으로 하느님의 빛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저도 신부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제복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 -28)"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보다 더 큰 비난과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는다.” 간디의 눈에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례 받는 신앙인이 줄어드는 이유는 박해가 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빛을 잃어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하는 신앙인들이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요청하셨습니다. 첫째는 열정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불가능한 것 같지만 열정에 시간이 더해지면 이루어집니다.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열정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도착한 프랑스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둘째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눈이 먼 소경을 치유하실 때도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믿음이 약하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믿음은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진 건 풍랑이 거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열정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무기력하고 의욕이 사라진다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께 열정과 믿음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0,1-12

 

욥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이유도 모르겠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는지요?

내가 잘못한게 무엇인지 아무리 따지고 따져봐도 모르겠는데, 난데없이 다가온 불행 앞에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결핍투성이의 존재로서,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 두발을 딛고 있는 이상, 욥처럼 극도로 비참한 상황 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이 한 세상 살아가며 이런저런 다양한 고통과 시련에 노출됩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고통이 아니라 욥처럼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통일 경우, 우리는 하느님도 원망하고,

이웃도 원망하고, 나 자신도 원망하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욥의 절규 같은 경우 우리와 살짝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극한의 고통 앞에 울부짖지만, 그 울부짖음이 결국 주님 안의 울부짖음이요,

주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의 울부짖음입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 26-27)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은 극심한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둡니다.

 

이런 욥이었기에 결국 하느님께서 그의 절규, 그의 몸부림, 그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를 지옥같은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피부, 새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때로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가혹한 나머지,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그분께서 이 혹독한 고통 너머에서 주시려고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 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 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탈출 24,1; 민수 11,25).

 

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 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2.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수호천사 기념일)                                                       욥9,1-12.14-16 루카9,57-62

 

                                 길 위의 종교, 길 위의 그리스도, 길 위의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삶”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 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시편97,11)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살게 할 좌우명시입니다.

선물처럼 찾아온 시입니다.

 

산은 ‘불암산’을, 당신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강론 쓸때가 바로 주님앞에 서듯 하루중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날마다 기록을 남기듯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수도원은 섬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중심지이자 세상의 축소판같은 곳입니다.

온갖 일이 다 일어납니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도 세상 공부가 가능한 곳입니다.

오늘 요셉수도원에서는 수호천사 기념일 대신에 평일 전례를 거행합니다.

12세기 마지막 교부라 칭하는 성 벨라도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책은 우리 체험의 책이다.

내 매일 삶의 책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배울 때 전체를 한눈에 파악해서 매일의 일을 잘 통합하여

일관성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만이 렉시오디비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하루도 렉시오 디비나 대상의 또 하나의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될 아직은 미완(未完)인, 하루하루가 내 삶의 성경책 1쪽입니다.

어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형적인 가을이었습니다.

 

“하늘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되네”

 

흰구름 가을 하늘보며 배밭사이 산책중 떠오른 시입니다.

아침부터 저녁늦게 까지 수도원 초창기부터 수도원 제반 공사시 많이 봉사한 포크레인 기술의 달인,

요한 형제가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으로 길 보수에 정성을 쏟고 있었습니다.

신고배 수확이 끝난 창고에 들리니 엄청나게 큰 배들에 경탄했고 부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저절로 나온 시입니다.

 

“배가

 엄청나게 크다

 밤낮

 쉬지않고 컸구나!

 나는 

 그동안 뭘했나?”

 

살아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배나무들이요 밤낮 쉬지 않고 큰 배들이 놀라웠습니다.

얼마전 루벵 대학교수들에 대한 교황님의 강론도 일부 생각났습니다.

 

“약자들을 배려하는 연민가득하고 포용적인 문화를 건설하도록 하라.

이 불꽃이 내내 살아 있도록 하라; 영역을 확장하라! 쉼없는(restless) 진리 추구자들이 되라.

너희들 열정이 쇠퇴함을 허용하지 말고, 지적 무기력함에 항복하지 마라.”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제1독서의 욥이 그러합니다.

쉼이없이 참으로 치열히 한결같이 주님을 섬겨온 욥이요 예수님입니다.

훌쩍 뛰어넘어 욥기 9장을 공부하지만, 시간되면 생략된 4-8장까지 읽어보세요.

욥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왜 그토록 하느님의 신뢰와 인정을 받았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하느님과 소송을 벌인다 한들 천에 하나라도 그분께 답변하지 못할 것이네....내가 의롭다 하여도

답변할 말이 없어 내 고소인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것이네.”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아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신심깊은 욥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가 이런 엄청난 하느님의 시험과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음도 평소 쉼없이 주님을 섬기고 공부하며 살아온

내공의 결과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중에 있는 예수님께도 이런 내공을 느낍니다. 

 

길 위의 주님이요, 길 위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은 집이 없었던 길 위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길들(other Ways)에게 열린 길(the Way)이었습니다.

 

루카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예수님과 당신 일행의 집에 계시는 모습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새삼 ‘길 위의 그리스도(Christus Viator)’, ‘길 위의 인간(homo viator)’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영적전쟁중에 전사(戰死)해야 ‘주님의 전사(戰士)’이듯, 길가다 도사(道死)해야

‘주님의 도사(道士)’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길가는 사람인 구도자는 ‘정처없는 방랑자’가 아니라 ‘정처있는 여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문득 박목월의 나그네란 시가 생각납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가끔은 이런 나그네 되어, 하느님 찾는 나그네 되어 홀가분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베네딕도회의 정주생활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정주의 ‘뿌리(root)’와 내적 여정의 ‘길(route)’이 공존하는 삶입니다.

 

밖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기다리는 정주의 산이요,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물길따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여정이어야 안주가 아닌 진짜 정주의 삶이 됩니다. 

 

참으로 뿌리와 길의 모순을 절묘하게 살아내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요

예수님과 당대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향한 길 위의 삶이지만 정주처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내린 삶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와 부활의 도상이라는 아주 절박한 시점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역시 길을 가는데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예나 이제나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세 경우의 주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평생 화두가 됩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의 삶이 변질되고 타락했는지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 뿐이 없습니다. 

 

1.“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

 

하느님만을 정주처로 한 나를 과연 따를수 있겠느냐며 첫째 사람의 요구를 은연중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결코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절실하게 살아내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2.“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두 번째 나를 따르라 할 때 아버지의 집에 가서 먼저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자에 대해

에둘러 거부하는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절박성을 앞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의 장사는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주님을 모르는 죽어있는 이들에게 장사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말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자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목표는 단 하나, 한 번 뿐인 인생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3.“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세 번째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추종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 참 냉혹해 보입니다.

역시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절박한 삶에 부수적인 것들은 생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지향이 아닌 미래 지향의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주옥같은 말씀은 무뎌지고 세속화되는 우리를 부단히 일깨우는 평생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뿌리의 사람이자 길의 사람이 되어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줍니다.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들하라,

 거룩하신 그 이름을 찬양들하라."(시편97,12). 아멘


10/3(목) [(녹)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조건을 따지는 믿음은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진 건 풍랑이 거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열정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무기력하고 의욕이 사라진다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께 열정과 믿음을 청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욥의 절규 같은 경우 우리와 살짝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극한의 고통 앞에 울부짖지만, 그 울부짖음이 결국 주님 안의 울부짖음이요,

주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의 울부짖음입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 26-27)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은 극심한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둡니다.

 

이런 욥이었기에 결국 하느님께서 그의 절규, 그의 몸부림, 그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를 지옥같은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피부, 새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10/3(목) [(녹)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104일 기도

 

복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3일(목) 3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