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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0월 9일 수요일[(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9일 수요일[(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 2,1-2.7-14

 

형제 여러분,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루카 11,1-4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의 회개 이후의 삶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요즘 미사 중 봉독되고 있는 갈라티아서는 아주 좋은 참고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서를 집필할 당시 갈라티아 지방에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유랑 선교사들이 찾아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새 신자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너무 강하게 요청하다 보니,

갈등과 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선조들에게 상투를 자르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입니다.

당시 어떤 대쪽같은 양반은 상투를 자르기 전 내 목부터 자르라고 외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갈라티아 공동체 사람들은 코린토 교회 못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윤리 도덕적 타락, 우상 숭배나 미신 행위 등 과거의 악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며, 복음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갈라티아서를 집필한 것입니다.

이 서한을 통해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꼐서 자신에게 큰 사명을 하나 주셨는데,

그것은 이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할례 문제로 하도 시끄럽다 보니, 바오로 사도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지며, 유다인이 아닌 이민족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의무가 아닙니다.”

 

갈라티아서를 통해 우리는 초대 이방인들을 위한 최고 목자로서 자리매김하기까지 바오로 사도가 겪었던

숱한 고초와 갈등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회심 이전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젊고 똑똑한 청년 유다인 바오로에게 걸었던 기대가 상당했습니다.

유다교 미래를 이끌 든든한 인재로 일찌감치 낙점했었겠죠.

 

그런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를 하고, 실명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교로 극적인 회개를 하게 되는데, 그로 인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당사자 바오로는?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의 사도가 된 것에 감지덕지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다인들로부터는 이미 배신자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적극적이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장 앞장 서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구속시키는데 선수였던 그가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교인이 되니, 의아한 시선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혹시 저게 일부러 저러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섬멸하기 위한 이중 작전을 쓰고 있는 것을 아닐까?’

 

그런 결코 만만치 않은 양측 분위기를 감지한 바오로 사도였기에, 더 백방으로, 더 헌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렇게 십년 이상 이런 저런 박해와 오해 속에 자신이 만나고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던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간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에게 공인을 받습니다.

 

사정이 좋든 나쁘든, 주변 분위기가 내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온몸으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목적 열정과 믿음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2. 이영근 신부님 강론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고귀한 기도인지요?>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문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들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비록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진정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빠,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 기도는 우리에게 ‘아빠, 아버지’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합니다.

곧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고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고귀한 기도인지요?

그러니 올바르게 사는 것은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11,4)

 

주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자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제 마음을 드리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루카 11,1-4

 

세일즈 하듯 기도하라

 

한 수도자가 산에 올랐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을 듯한 깊은 산중에서 다행히

인가를 찾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이 하는 기도를 듣고,

수도승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습니다. 

 

“신이시여, 어제도 저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시진 않은가요.

그럼 제가 등도 긁어드리고 허리도 만져드릴 수 있을 텐데.

혼자 하기는 힘든 일이잖아요. 혹은 발을 씻겨드리면 참 좋을 테고요….”

 

수도승은 그만 더 참지 못하고 기도를 멈추게 했습니다.

“이봐요, 잠깐. 날 살려준 건 감사하지만, 하느님께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다고요?

대체 어떻게 그런 무례한 언사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기도서를 주며 기도하는 자세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튿날 수도승은 그 집을

떠나왔습니다. 다행히 길을 찾아든 수도승이 산을 거의 내려온 찰나,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대는 이제, 내게서 가장 가까운 이마저도 멀어지게 만들었구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 청하고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주님께서 주시려던 은총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는 마치 세일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넥타이를 사려고 넥타이 판매대로 갔는데 점원이 와서는 “무얼 찾으세요?”라고

물으면 어떨까요? 당연히 넥타이에 관심이 있으니 그리로 오지 않았겠습니까?

벌써 그 사람은 ‘이 가게는 손님에겐 관심이 없구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 넥타이를 들었다 놓았는데 파란색 넥타이를 가장 오래 집고 있었다면

뭐라 해야 할까요? “파란색의 다른 상품들을 제가 찾아볼까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노란색 넥타이를 손에 감으며 예쁘죠?”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파란색을 원해요.”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재고가 없고,

요즘 누가 파란색 넥타이를 합니까? 그건 유행이 지났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상품을 사러 온 사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냥 나가려고 할 때 관심도 없는데

쓸데없이 멜빵을 보여주며 “이건 관심 없으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 가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손님은 가게 점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바로 판매로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주장하면 사려고 하는 사람은 기분이 나쁩니다. 사려는 사람도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영광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이 아버지라 불리고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 나라가 임하고 당신 뜻이 이루어지며

당신이 매일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당신 때문에 이웃을 용서할 수 있으며

당신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 전에는 반려견을 계속 데려오며 병이 낫게 안수해 달라고 청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안수하고 있는데 개에게 또 안수하려니 좀 그랬습니다. 물론 반려견에 너무 의지하고

있기에 강아지가 나으면 좋은 일이라 몇 번은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매일 그러는 건 좀 그래서 이제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개가 나으면 50만 원 드리려고

했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개에게 안수하여 돈 버는 사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은총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를 의미를 음미하며 정성껏 바치면

우리의 자세가 주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되어서 많은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코에서 태어난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은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책은 1940년도에 500만 부 이상이 인쇄되었고,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있었는데 1917년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당신은 임파선 결핵입니다.”라고 진단하고

“당신은 길어야 석 달 살 것입니다.”라고 통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솔맨의 마음은 절망적으로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수였던 그의 아내는 그때

임신 중이었으므로, 솔맨은 아내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가 몹시 괴로워하며

매일같이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여보!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봅시다.

3개월이나 되는 기간을 살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솔맨은 아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더 이상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지 않고,

아내의 말대로 남은 3개월 동안 오직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주 작은 일부터 감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는데

그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몸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 건강해져서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해 보았더니, 임파선 결핵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는데 나의 것만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의 청을 들어주면 그분이 무엇이 좋은 건지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청을 들어주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청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강요하듯 물건을 파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전문 세일즈맨처럼 그 물건을 사면 손님에게

무엇이 좋은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사가 저절로 잘 될 것입니다.

은총도 그렇게 끊임없이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8.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갈라1,13-24 루카10,38-42

 

                                                            참된 영적 삶

                                                    “경청, 회개, 환대, 관상”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된 영적 삶을 살 수 있나?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참된 영적 삶에 대한 깊은 가르침과 더불어 깨달음을 줍니다.

네가지 측면에서 나눕니다.

 

첫째, 경청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귀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성 베네딕도 및 모든 영성가들이 우선적으로 꼽는바 경청입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맨 처음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자들 역시 무수히 "들어라." 외칩니다. 

 

대화나 상담의 기본도 경청이요 기도의 기본도 경청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 역시 경청해주길 바랍니다. 경청을 잘 하기 위한 침묵이요 경청에서

겸손도 순명도 뒤따릅니다.

침묵과 경청에서 참말도 지혜도 나오고, 믿음도 자랍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삶의 지혜가 됩니다.

 

“조급하고 허망한 말을 피해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엄정한 말과 평안한 마음이 어우러질 때

덕은 완성된다.”<다산>

“대개 겉과 속을 함께 닦아야 그 덕이 외롭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해서는 안된다.”<다산>

 

이런 말은 깊은 침묵과 경청에서 나옵니다.

바로 경청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우선 주님의 발치에 앉아 침묵중에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새삼 침묵과 경청의 훈련을 통한 습관화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너무나 침묵과 경청이 실종된 경박한, 세속화된 삶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경청과 동시에 일어나는 은총의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가 뒤따릅니다.

한두번의 경청이 아니듯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여정의 회개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예수님 발치에 앉아 경청하는 마리아는 분명 동시에 내면에서는 회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반면 일에 몰두하면서 마리아의 모습에 불평하며 도움을 청하는 마르타에 대한

주님의 충언이 마르타는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도한 활동을 절제하고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경청의 관상을 우선하라는 회개의 가르침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 갈라티아서 바오로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경위를 소상히 고백합니다.

진솔하고 겸손한 고백을 통해 사도의 회개의 여정을 듣습니다.

예전 바오로가 아니라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종으로, 교회의 사람으로 거듭 난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손님 환대는 기본적 영성이자 예의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정주영성과 함께 가는 환대영성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이를 그리스도처럼 환대합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환대의 집, 수도자는 환대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환대의 기쁨, 환대의 사랑, 환대의 치유, 환대의 축복입니다.

서비스업의 첫째 요소도 친절한 환대입니다.

환대가 아닌 냉대(冷待)라면 그 상처는 얼마나 크고 오래가겠는지요.

 

오늘 마리아의 예수님 환대는 옳았습니다.

제 좋을 대로의 환대의 사랑이 아닌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른 마리아의 경청의 사랑,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마르타 역시 제 좋을 대로 정성 가득한 음식준비를 통해 주님께 대한 환대의 사랑을 표현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바, 환대는 아니였습니다. 

 

환대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내 중심의 환대가 아닌 주님 중심의, 상대방 중심의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불찰은 주님 환대의 우선 순위를 잊은 것입니다.

미사구조도 이런 주님 환대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로 말씀을 경청하는 환대가 우선합니다.

 

넷째, 관상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함께갑니다. 우열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요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경청의 관상이 우선입니다.

경청의 관상에서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자리잡히고 지혜로운 눈밝은 활동생활이 가능합니다.

경청의 관상없는 활동이라면 무질서하고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하는 '꽃'과 '산앞에 서면' 두 짧은 자작 애송시도 관상의 열매임을 믿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경청의 관상의 부재로 맹목적 눈 먼 활동에 중독된, 지친 어리석은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활동이나 세상적인 것들에 중독되다보면 괴물도, 폐인도 됩니다.

거룩한 사랑의 관상이, 관상의 휴식이 절대적입니다.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입니다.

관상이나 활동의 본질은 사랑이요,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관계로 봐야 합니다.

 

바로 오늘 마르타의 좋은 취지의 음식 손님 접대의 문제점도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경청의 환대가, 경청의 관상이 우선임을 잊고 활동에 몰두함은 지혜가 아닙니다.

밖으로는 마르타의 활동이, 안으로는 마리아의 관상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관상에서 샘솟는 활동이어야 바람직한 영적 삶입니다.

아마도 이의 전형적 모범이 성 프란치스코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이구요.

 

예수님만큼 섬김의 활동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밤마다 관상가가 되어 외딴곳에서 관상의 기도로 아버지와 일치의 충전시간을 가졌습니다.

낮에는 활동가, 밤에는 관상가로 사셨지만 분리된 분이 아니라 통합된 온전한 분이었습니다. 

잘 듣기 위해, 잘 분별하기 위해, 잘 기도하기 위해 일단 멈춤의 관상이, 침묵중 경청의 관상이 절대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최고의 활동 형태가 하느님과 일치의 관상입니다.

 

참으로 이상적 영적 삶은 예수님처럼 “활동안에서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삶을 위한 네  요소가 경청, 회개, 환대, 관상이요 이 또한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영성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바로 이 넷의 요소를 통합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참 영성가로 살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여라.”(루카11,28). 아멘.


10/9(수) [(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 되새김 구절

 

1.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를 하고, 실명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교로 극적인 회개를 하게 되는데, 그로 인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사정이 좋든 나쁘든, 주변 분위기가 내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온몸으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목적 열정과 믿음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양승국 신부)

 

2.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11,4)

 

주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자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제 마음을 드리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3.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이 아버지라 불리고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 나라가 임하고 당신 뜻이 이루어지며

당신이 매일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당신 때문에 이웃을 용서할 수 있으며

당신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게 해 달라는....

 

미국 시카코에서 태어난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은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아내의 말대로 남은 3개월 동안 오직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주 작은 일부터 감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는데

그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몸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 건강해져서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해 보았더니, 임파선 결핵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4. 경청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우선 주님의 발치에 앉아 침묵중에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새삼 침묵과 경청의 훈련을 통한 습관화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너무나 침묵과 경청이 실종된 경박한, 세속화된 삶들이기 때문입니다.

 

경청의 환대가, 경청의 관상이 우선임을 잊고 활동에 몰두함은 지혜가 아닙니다.

밖으로는 마르타의 활동이, 안으로는 마리아의 관상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관상에서 샘솟는 활동이어야 바람직한 영적 삶입니다.(이수철 신부)

 

10/9(수) [(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 제110일 기도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11,4)

 

주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자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제 마음을 드리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9일(수) 6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