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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0월 8일 화요일[(녹) 연중 제27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8일 화요일[(녹) 연중 제27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에스 4,17②-③ 참조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39(138),1-3.13-14ㄱㄴ.14ㄷ-15(◎ 24ㄴ 참조)
◎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
○ 당신은 제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어미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 작품들은 놀랍기만 하옵니다. ◎
○ 제 영혼이 잘 아나이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땅속 깊은 곳에서 짜일 때, 제 뼛속까지 당신께 드러났나이다. ◎

복음 환호송

루카 11,28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께서 세우신 이 제사를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정성을 다하여 마땅히 거행하는 이 거룩한 신비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을 이루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애가 3,25
당신을 바라는 이에게, 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
<또는>
1코린 10,17 참조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이어도 한 몸이네. 우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함께 나누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달라스 교구는 3년 동안 교구 시노드를 준비하였습니다. 지난 9 14 십자가 현양 축일에 대의원 회의가 있었고, 저는 부제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그날 교구장님과 함께하는 미사가 있었고, 그동안의 준비 과정과 결의안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시노드는 건강검진과 비슷합니다. 건강검진은 여러 분야를 점검합니다. 질문을 통해서 생활 습관을 파악합니다. 운동은 얼마나 하는지, 음주와 흡연은 하는지, 우울증은 없는지, 잠은 충분히 자는지 질문을 통해서 확인합니다. 채혈을 통해서 몸의 영양상태를 살펴봅니다. 소변검사를 통해서 영양분의 순환이 잘 되는지 살펴봅니다. 내시경을 통해서 위와 장의 상태를 살펴봅니다. 혈압을 측정합니다. 고혈압이라면 원인을 찾아봅니다. 시력과 청력을 확인합니다.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에 이상이 있다면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좋은 생활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건강검진을 통해서 우리 몸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듯이,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는 겁니다. 시노드는 교구의 건강 상태를 점검합니다. 첫째는 경청입니다. 교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제와 수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교우들이 영적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민과 갈망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두통약을 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둘째는 진단입니다. 교회의 재정은 문제가 없는지 살펴봅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의 지표인 성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세례, 견진, 고백, 병자, 성체, 혼인, 신품 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이 문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 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먼저 찾으려는 제자들의 욕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처방입니다. 처방에는 고통이 따르고, 인내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60년 전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창문을 여는 처방을 하였습니다. 사목헌장, 계시헌장, 교회헌장, 전례헌장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에 맞도록 교회의 창문을 열었습니다. 달라스 교구도 결의문을 통해서 교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처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시급한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필요한 곳에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해야 합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처방은 여전히 강력한 효과가 있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면 예수님의 처방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헌신과 희생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처방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처방입니다.

 

12 4일 교구 시노드는 폐막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복음의 기쁨이 넘쳐나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교구 시노드와 동행하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10,38-42

 

평신도가 성화(聖化)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전형적인 마르타 스타일인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살짝 빈정이 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가 마르타가 아니라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시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깊이 있는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몰입할 수 없는 평신도들께서

약간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담컨대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이전, 3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평범한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30년의 세월은 복음사가조차 별로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청년의 삶을 사셨던 나날이었습니다.

 

때로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도 하셨을 것이고 마당도 청소하셨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동고동락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도와 묵묵히 대패질에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다 만든 물건을 납품하러 다니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이 따위로 물건을 만들었냐’는 주문자의 딱딱거림에 화도 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30년이란 세월동안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참 인간으로서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가치’를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평신도들께서 참으로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 가야하는 가를 몸소 삶으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우리의 이 일상적인 일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마주치게 되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일상의 삶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 안에 늘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는 노력(Finding God in All Things)을 계속할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기도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참으로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사 안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자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능동적이었던 박해시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교계제도가 확립되어가면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화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했던 초기교회의 탁월했던 평신도들의 영성이었는데, 성직자들의 역할이 강화되어가면서

즉시 힘을 잃어갔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와 불충분한 개념정립은 평신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불이익과 손실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신도 영성의 쇠락은 교회의 퇴보와 늘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과제 하나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입니다.

평신도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평신도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창의력을 존중하고 교회 쇄신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2중대가 절대로 아닙니다. 장교인 사제들을 맹목적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졸병 역시

절대로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고 그들의 업무가 과중하기에 이를 보완해주기 위한 존재도 결코 아닙니다.

평신도들 역시 성직자나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복음적 완덕에로 불림을 받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단 평신도들께서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이나 성전 안에서 살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의 성화 여정은 당연히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도자가 평신도의 삶을 살길 원치 않으시듯이, 평신도가 수도자나 사제의 영성을 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각기 소명에 성실하며 각자의 카리스마, 달란트에 따라 복음적 삶을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나 수도자 못지않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영성을 지닙니다.

평신도 영성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도피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그 구조들 안에서 육화하여

복음화하며 그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성화하고 또한 성화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평신도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며 성화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루카 10,39)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나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곧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7.월요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갈라1,6-12 루카10,25-37

 

                                              배움의 여정, 사랑과 섬김의 여정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10월7일은 묵주기도 성월 10월에 맞이하는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기념일에 대한 유래를 나눕니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1208년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근처 프루이유에 있는

수도원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가 성 도미니코에게 나타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묵주기도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날은 바로 1571년 10월 7일, 바로 오늘은 그리스 앞바다

레판토에서 유럽의 명운이 걸린 이슬람 제국과의 해전이 벌어졌던 날입니다.

이날 오전부터 오후 늦게까지 신성동맹의 유럽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치열한 격전을 벌렸고 마침내 유럽 기독교 국가 동맹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날은 10월의 첫 번째 주일이었고,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는 비오 5세의 독려하에

하루 종일 모든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바쳤으며 결국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승리했다 하여 시작된

오늘 "승리의 성모 축일"입니다.

 

이후 교황 비오 10세는 10월 첫째 주일이었던 축일을 10월7일로 확정시켰고, 1969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승리의 성모 축일” 명칭에서 지금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기념일로 바꿉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 묵주기도의 은총이 우리 ‘배움의 여정’, ‘사랑과 섬김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의 복음을 갈라인들 교회에 선포합니다.

바로 구원은 능동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복음이요,

오늘 복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그대로 입증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의 불순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만 그의 질문은 옳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모든 구도자들의 궁극적 질문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역으로 율법학자의 생각을 묻자 그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옳게 대답합니다.

그러고 보니 율법학자는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알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물은 것이요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였습니다.”

모든 율법과 복음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정답을 지체없이 인정하시고 흔쾌히 답하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을 살 것이란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유명한 예화가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복음은 35년전 제 사제서품후 1989년 7월16일 신림동 천주교회에서 첫미사때 복음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때 “사람이 되는 길”로 강론을 했고,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자를 외면하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 종교인인 어떤 사제도, 어떤 레위인도 사람됨의 시험에 불합격했고

이 죽어가는 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살린 사마리아인만이 사람됨의 시험에 합격했다 강조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됨의 시험'에 합격할 사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초주검이 된 자는 수난당하는 주님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 모두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종교인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참으로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놀라운 충격적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초주검이 된 자에 대한 세 사람의 경우의 예를 든 후 율법학자와 주고 받은 대화가

오늘 복음 이해의 열쇠가 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 동사입니다.

뜬구름 잡는 추상적 질문은 이제 그만하고 네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하느님 사랑에 이어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사랑의 실천으로 도우며 영원한 생명을 살라는 것입니다.

 

저 멀리 밖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곤경중에 있는 이웃을 도울 때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내 중심의 “누가 내 이웃이냐?”물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곤경중에 있는 불우한 이웃을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참 놀랍게도 곤경중에 있던 자를 살린 자는 거룩한 종교인인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이교인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이런 사마리아 사람처럼 곤경중에 있는 이웃이 되어

이웃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법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충격적 사랑을 통해 독자들 역시 배우라는 것입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의 두 필수적 자질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요 ‘배움에 대한 사랑’이요, 

이를 위한 겸손과 근면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의 달인(達人)은 호학(好學)의 공자이고 호학은 논어와 공자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무엇보다 배움의 여정중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내 중심의 이기적 물음에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이웃 중심에서 물어야 할 것이며, 이웃 중심의 섬김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섬김의 사랑의 절정의 모범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 이웃 중심의 섬김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10/8(화) [(녹)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면 예수님의 처방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헌신과 희생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처방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처방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과제 하나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입니다.

평신도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평신도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창의력을 존중하고 교회 쇄신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양승국 신부)

 

3.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4. 참 놀랍게도 곤경중에 있던 자를 살린 자는 거룩한 종교인인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이교인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이런 사마리아 사람처럼 곤경중에 있는 이웃이 되어

이웃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법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충격적 사랑을 통해 독자들 역시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0/8(화) [(녹)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 제109일 기도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오늘의 말·샘 기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8일(화) 8시2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