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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감사일기

[241017 일기][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두 분의 이냐시오 성인의 비교 공부

2024년 10월17일(일) 일기

 

제목: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두 분의 이냐시오 성인의 비교 공부

 

5시30분 기상...^^

(매일미사 복음 묵상)

10/17(목)[(홍)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18일 기도.

복음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불행하여라, ~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저의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주님!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담긴 위선과 교만에 의한 것입니다.

위선과 교만을 끊게 하소서.
마음을 비워 하느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사랑과 자비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삶을 따르게 하소서.


- 2024년 10월17일(목) 7시30분-

 

오늘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이다.

예수회의 창립 성인 [로욜라의 안티오키아 성인]과 다른 인물이다.

두 분의 영성에 대하여 비교 공부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은 10월17일

성인은 사자 두 마리와 함께 있는 이콘으로 흔히 소개된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생애]

이그나티오스(이냐시오)는 어린 나이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친구인 폴리카르포와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라고 전해진다. 만년에 이그나티오스는 안티오케이아의 주교로 선출되어 사목했다. 4세기 교회 역사학자 에우세비오는 그가 에보디오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됐다고 썼다.

퀴로스의 테오도레토는 사도 베드로가 안티오케이아를 떠나면서 직접 이그나티오스를 주교로 서품하고 안티오케이아 주교에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이그나티오스는 스스로 테오포로(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라고 자칭했다. 그가 예수가 안고 축복한 어린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전승도 전해지고 있다.

이그나티오스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시대에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갔다.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길에 이그나티오스는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들렀다. 이그나티오스는 자신이 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여섯 편의 서간을 썼고, 나머지 서간 한 편은 동료 주교인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에게 썼다. 에우세비오는 저서 연대기에서 이그나티오스가 아브라함 이후 2124년, 즉 서기 10년 트라야누스 재위 11년에 선종했다고 기록했다.

이그나티오스 스스로도 자신이 맹수들에게 던져질 것이라고 예감하는 글을 썼지만, 구체적으로 4세기에 예로니모가 사자라고 언급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이그나티오스가 순교한 장소가 콜로세움이라고 처음 언급했다.

학계의 추측에 따르면, 이그나티오스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순교했으며, 그의 유해는 동료들에 의해 안티오케이아로 옮겨져 성문 밖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티카에움에 있는 튀케 신전을 성당으로 개축해 축성하게 한 다음 이그나티오스의 유해를 이곳으로 가져와 안장했다. 637년 이그나티오스의 유해는 다시 로마에 있는 산 클레멘테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 이그나티오스 스스로도 자신이 맹수들에게 던져질 것이라고 예감하는 글 >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맹수들을 유인해서 그들이 나의 무덤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최후 잠듦에 있어 아무에게도 폐가 되지 않게 맹수들이 내 몸의 어떤 부분도 남겨두지 말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세상이 내 몸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해주십시요."

[출처] 위키백과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의 기념일은 7월31일.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
1491~1556년, 스페인 출생 이탈리아 선종, 예수회 설립자, 피정과 영성 수련의 수호성인
 
예수회 설립자이자 피정과 영성 수련의 수호성인 이냐시오는 군인이었습니다. 1521년 에스파냐(스페인) 나바라의 팜플로나에서 프랑스군과 전투 중 상처를 입었는데, 이때 삶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그를 치료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욜라 성에 있는 가족들에게 데려다 준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읽으며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즈음 이냐시오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봤습니다. 이를 통해 지난날의 생활, 특히 세속적인 욕망을 따르던 행실에 회의감을 느끼고 회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만레사마을 근처 동굴로 거처를 옮겨 탁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 수련」의 뼈대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순례 뒤 이냐시오는 약 11년간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이냐시오의 연학 기간 중에는 수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9명의 동료와 모였지만, 당시 튀르키예와의 전쟁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겨울 이냐시오는 베드로 파브르 성인과 라이네스와 같이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중 환시를 체험했습니다.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였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바오로 3세 교황은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냐시오는 1541년 4월 예수회의 초대 총장으로 선출돼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 서원을 했습니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대학교·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에 힘쓰고,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냐시오는 1555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선종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한 성당에 안치됐다가 1568년 기존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건축한 예수회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7월 28일] 

 

 

(사족)

훌륭하신 두 분의 영성을 공부하였음에 감사!

 

- 2024년 10월17일(목) 19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