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0월 22일 화요일[(녹) 연중 제29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본기도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2,12-22
형제 여러분,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당신 백성에게 평화를 말씀하신다.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를 씻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드리는 이 성찬의 제사로 더욱 깨끗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신다.
<또는>
마르 10,45 참조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폭력과 전쟁을 일삼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은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근심과 두려움을 간직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기 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평화의 감실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유대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道)라고 항상 말하는 도(道)는 없다.” 현상과 본질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이 하나라고 합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분을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보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남한과 북한이 둘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하나였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분단의 벽을 높이 쌓고 있지만 언젠가는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한민족입니다. 과학자들은 ‘미토콘트리아’를 분석하면서 인류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는 곳은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결국 우리는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양자역학은 노자의 도덕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격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에는 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미시 세계에서는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물질이 있어서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생기는 겁니다. 우주는 에너지와 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별과 구별이 아니라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는 항상 같은 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나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도라고 항상 말하는 도는 없다.’라는 말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2. 전삼용 요셉 신부
2024년 나해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루카 12,35-38
깨어있게 하시는 이유와 깨어있는 방법
스페인 베니돔에 건설 중인 47층 높이 고층빌딩에 엘리베이터를 설계하지 않은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스페인 매체 에코노미아가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20층 높이의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시작했지만, 개발자가 욕심을 부려 47층 269개의 방으로 변경해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최초의 설계에서는 20층 건물에 적절한 크기의 엘리베이터가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높은
건물로 바꾸며 엘리베이터를 추가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변경된 계획으로 인해 비용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는 사임했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부실 자신이 되어버린
이 빌딩에 대한 권한은 2012년 갈릭시아에서 스페인 배드뱅크로 넘어갔습니다.
설령 건축디자이너가 잘못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투자한 사람들이나 승인하고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건축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이상하다고 여겼을 텐데 왜 수많은 사람이
설계를 보고 거의 다 짓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돈과 명예라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눈이 멉니다. 욕망이 우리 영적 감각을 잠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엔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하인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인이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매우 무섭거나, 혹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인이 무섭다고 여겨질 때는 주인이 나가 있을 때 주인이 없을 때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할 때는 일상이 더 개인의 욕망에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욕망에 눈이 멀면 엘리베이터가 없이 고층 빌딩을 지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부족으로 나타납니다. 성모님은 술도 드시지 않으셨겠지만,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채셨습니다.
욕망은 타인은 신경 쓰지 않게 만듭니다.
인간의 욕망은 왜 강해지는 것일까요? 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두 원숭이를 서로 격리해 우리 안에 넣어놓습니다. 실험자 한 사람이 한 원숭이에게 자그마한
돌을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가 돌을 다시 사람에게 줍니다.
돌을 받은 사람은 돌 대신 오이를 원숭이에게 줍니다.
원숭이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이를 먹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원숭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이 대신 포도 한 알을
줍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옆에 오이를 먹은 원숭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은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돌려받습니다. 아마도 이 원숭이는 자신에게도
포도를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원숭이에게 또 맹맹한 오이 조각을 줍니다.
이 원숭이는 약간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이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조약돌을 주고받고는 포도를 줍니다.
또 처음 원숭이에게 똑같이 하고 오이를 주었더니 그 원숭이가 오이를 먹지 않고 실험자에게
집어던집니다. 실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포도를 줍니다.
그런 다음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었더니 이번엔 조약돌을 사람 얼굴로 던져 버립니다.
옆의 원숭이에게도 위협을 가합니다. 주인도 싫고 옆의 원숭이도 밉습니다.
인간도 이렇게 욕망이란 것이 하느님과 이웃들에 대한 원망이 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치 하느님께서 없는 것처럼 욕망에 물들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욕망은 사람은 모기로 만들어서 자기만 생각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미워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습니다. 누가 모기와 함께 살고 싶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심을 믿고 깨어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은총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이도 먹지 못하는 다른 원숭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꿈에서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 데 정말 정성스럽게 아침밥을 해 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잔소리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느니,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말라느니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평생 아내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사제관이었습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렇게 감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제가 된 것에 대해 이전에는 그만큼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더욱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니까 조금 더 깨어있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나의 불만을 욕망으로 채우려 하는 게 줄어들고 감사하는 분을 위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깨어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이를 주는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의 욕망으로 이기적으로 되고 타인을 미워하는 삶에서
해방해줍니다. 사랑하면 그분이 올 것 같아 환청도 들릴 수 있습니다.
저도 샤워하다가 사랑하는 이의 전화인 줄 알고 물이 흐르는 채 전화기로 왔지만,
환청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기다리게 되고 기다리면 세상 욕망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감사하려는 노력의 열매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3. 이영근 신부
2024년 나해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으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으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고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은 것,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보는'(시 36,10 참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 미사를 통해 몸소 당신 몸과 피로 성찬을 차려주시고 우리의 양식이 되어 섬기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21.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에페2,1-10 루카12,13-21
삶의 예술가藝術家
<예술작품藝術作品 인생을 만듭시다>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당신앞에 나아가라.”(시편100,2)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교황님 강론 내용의 소제목이 마음에 와닿아 나눕니다.
“섬김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명의 길이다.”
(Service is Christian way of life)
“스포츠는 생명의 찬가다”
(Sports are the hymn to life)
얼마나 적확하고 멋진 표현인지요!
요즘의 우리나라 가을은 참 아름답습니다.
곳곳이 모두가 아름답기에 아예 요즘은 사진찍기를 접었습니다.
어제도 전형적인 아름다운 가을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도 유난히 밝고 맑습니다.
엊그제 자캐오의 집, 피정집 3층 제의방에서 바라보는 불암산은 참 장관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9.>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하는 이 시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때마다 한눈 가득, 가슴 가득 안겨 오는 산앞에 서도 주님앞에 서듯 행복합니다.
어제 찾아온 "가을산"이라는 시입니다.
“단풍 물든 장엄한 가을산
끝이 아니다
겨울후
생명의 봄이듯
죽음후
새생명의 부활이다
이 희망에 산다”<2024.10.20.>
바로 '하느님 희망에 산다'는 고백입니다. 겨울이, 죽음이 끝이 아니요 봄이,
새생명의 부활이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희망이라는 것이며
이런 깨달음 역시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탐욕만 있었지 이런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희망은, 사랑은 전무했습니다.
탐욕의 어리석은 부자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탐욕에 눈멀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참으로 지당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모든 불행과 재앙의 진원지가 무지의 탐욕입니다.
돈이 하느님이 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냐? 하느님이냐?”는
참 힘든 선택입니다.
돈이 현실이라면 하느님은 이상입니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면 땅의 돈같습니다.
이래서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란 고백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입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제 지론입니다. 또 하나 자주 드는 극단적 예도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느님 믿음이야말로 탐욕에 대한 근본적 대책입니다.
인간 누구나의 내적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온갖 두려움속에 포위되어 불안중에 살아가는 참 허약한 사람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수도원 십자로 예수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는
여전히 "지혜의 빛"을 발하며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바로 이런 근원적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소유욕에 탐욕입니다.
바로 탐욕의 뿌리에는 이렇듯 두려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두렵기에 돈을 모으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바로 어리석은 부자가 택한 길이요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거대한 착각입니다.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재물이, 돈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무리 모으고 쌓아도 기쁨은, 평화는,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모으고 쌓아도 두려움과 불안은 여전할 것입니다.
재물이 아닌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의 선물이 희망, 기쁨, 평화,
행복임을 어리석은 부자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지녔어도 그 마음에 희망이, 기쁨이,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부자의 독백과 하느님의 응대가 실감나게 표현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아무리 부자도 세끼면 족하고 화장하면 한줌의 재만 남고 죽어도 가지고 갈 것은 빈손일 뿐입니다.
땅에 싸놓은 보물은 전혀 쓸모없을 뿐,
참으로 이때 빛을 발하는 꾸준한 선행과 자선으로 하늘에 쌓은 보물들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Ama et fac quod vis)”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바로 하늘에 보물 쌓은 첩경의 길을 제시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참 어리석은 사람의 실상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무지의 탐욕을 일깨우는 회개를 촉구하는 예화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어 땅에 보물을 쌓다보니 온통 관계가 차단되어 스스로 자초한,
고립단절된 자기감옥에 갇힌, 닫힌 수인이 된 부자입니다.
도대체 좌우사방 문들은 없고 온통 벽뿐이니, 도대체 빛이, 희망의 빛, 기쁨의 빛,
평화의 빛, 행복의 빛이 전무한 어둠뿐이니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새삼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면 어리석게도 행복을 앞에 놔누고도 불행을 삽니다.
진정 행복한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은 자입니다.
복음의 부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답을 줍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기감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합니다.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 육과 감각이 원하는 바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 은총의 성령에 따라 자유롭게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바오로가 제시하는 이런 차원을 까맣게 몰랐지만
우리는 이렇게 알게 됐으니 우리는 행운아들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치명적 과오는 주님 없이 혼자 자기인생작품을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예술가들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온갖 선행과 자선의 노력으로 협조해드리며
각자 주님과 함께 완성해가야할 예술작품인생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각자 예술작품 완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10/22(화)[(녹)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조재형 신부)
2. 결국 깨어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이를 주는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의 욕망으로 이기적으로 되고 타인을 미워하는 삶에서
해방해줍니다. 사랑하면 그분이 올 것 같아 환청도 들릴 수 있습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바오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예술가들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온갖 선행과 자선의 노력으로 협조해드리며
각자 주님과 함께 완성해가야할 예술작품인생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각자 예술작품 완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이수철 신부)
10/22(화)[(녹)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제123일 기도....
복음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24년 10월22일(화) 7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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