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상. 감사일기

[매묵]2024년 10월 25일 금요일[(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25일 금요일[(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7(16),6.8 참조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4(23),1-2.3-4ㄱㄴ.5-6(◎ 6 참조)
◎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

복음 환호송

마태 11,25 참조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를 씻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드리는 이 성찬의 제사로 더욱 깨끗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3(32),18-19 참조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신다.
<또는>
마르 10,45 참조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백분 토론을 보았습니다. 주제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확전 가능성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고, 이스라엘과 이란은 멀리 있기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떤지 알고 싶었습니다. 전문가들은 확전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이란과 전쟁을 이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란도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하기에 미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결국 문제의 열쇠는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으면,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이란과 전쟁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다고 해도 이란은 큰 나라이기에 타격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합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이기에 타격이 생각보다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확전 가능성은 적다고 합니다.

 

1년 넘게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전쟁을 이어가고, 전선을, 헤즈볼라를 넘어 이란에까지 넓히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작년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1,000명 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1년간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은 40,000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국민도, 국제사회도 이제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국내 정치의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이스라엘 총리인 네타냐후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형사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총리는 전쟁을 계속 이어가면서 지지도가 올라가고, 전쟁의 성과로 형사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수자원이 더 필요해졌다고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의 물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레바논 남부 지역에 있는 강을 확보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레바논 남부에 있는 헤즈볼라를 몰아내면서 자연스럽게 레바논 남부에 있는 강을 이스라엘의 수자원으로 확보하길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중동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을까요? 유엔에서 천명한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것이 해법이라고 합니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1,000년 넘게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유엔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두 개의 국가를 이루고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국제사회와 미국이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요청하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의 정치, 경제, 언론에는 유대인의 영향력이 크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욕망과 이기심의 눈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폭력과 전쟁의 방식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루카12,54-59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베트남의 가경자(시복 전 단계)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감사 기도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교회를 통해 선교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는 여러 형제자매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길을 가로막고 저를 힘들게 하는 이들한테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저를 거룩하게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이 은총의 독방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쓴잔을 제게 나누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 구절 중에 ‘은총의 독방’이라는 표현이 제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독방은 아파트 안에 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

특별 관리 대상자가 쓰는 독방입니다.

 

독방! 하니 세상 편하겠네, 생각하시지만, 완전 반대입니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은 그냥 독방이 아니라 은총의 독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그분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초월하셨던 분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 안에 살아가니,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천국을 사셨던 분입니다.

 

추기경님의 표현을 우리도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은총의 죽음, 나와 죽어도 맞지 않는 은총의 그분...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차가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는 부단히 초대 교회 교우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쓰셨는데,

이런 표현이 우리의 눈길을 끌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바오로 사도는 그냥 수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님 때문에 수인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수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 때문에 갇힌 것을 크게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과 역경이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새벽부터 캄캄해질 때까지 하루 온종일 빡센 하루 일과를 보낸 지금, 별것도 아니지만,

주님을 위한 하루였음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신부님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 시대의 징표’>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6)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 읽으면서, 또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루카 12,58)  
 

'징조'를 잘 읽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라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도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 문헌들, 특별히 사회회칙들에 잘 드러납니다.

곧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문헌인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 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의 회칙인 <찬미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의 후속 권고 문헌인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는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생태적 회심’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6)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24.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에페3,14-21 루카12,49-53

 

시(詩)같은 인생

"인생은 아름다워라!"

 

30년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강론과 글귀가 있습니다.

세수하던중 물이 가득 담긴 프라스틱 세수대야 바닥의 영문 글귀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Life is beautiful(인생은 아름다워라)”

 

이 말씀을 주제로 썼던 강론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은 아름다운 시적 문장으로 가득하다 합니다.

시적 문장이 아름다우며 감동과 더불어 치유를 선사합니다.

문장뿐 아니라 언행도 시적이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일까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또스트에프키의 예술관을 응축한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란 오래 전 글을 나눕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의 종이 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시같은 인생, 시같은 강론, 시같은 죽음이기가 소원입니다.

옛 어른의 다음 말씀도 시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좋은 지침이 됩니다.

“속이 비어 있으면 길게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변명이라고 일컫는다.”<다산>

“군자는 말을 아끼고 소인은 말을 앞세운다.”<예기>

 

시적인 아름다운 말이라면 짧고 순수할 수 뿐이 없습니다. 투병중인 최인호 소설가를 찾았을 때 잠시 바닷가를

걸으며 당시 샘터 수습기자이던 한강에게 했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것을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한강은 이어서 씁니다.

“내가 그걸 영영 알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그렇게 반복하셨다...잊지 않을 것이다.”

 

온갖 고초를 겪고 세상을 떠나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아름다운 소풍 인생이라 해도 좋고, 아름다운 휴가 인생이라 해도 좋습니다.

어제 미사시 입당성가(402장)의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어제따라 깊게 마음을 울렸습니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과 함께 살아가리라.”

 

예전 “나 죽으면 장례미사시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하는 입당 성가에, 퇴장 성가는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부탁하겠다” 말했던 적도 생각이 났습니다. 

한 번 뿐이 없는 유일무이한 인생! 누구나의 소망이 아름다운 인생일 것입니다.

시작하면 언제나 늦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부터 심기일전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 말씀이 그 아름다운 인생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첫째, 주님은 사랑의 불입니다. 성령의 불, 말씀의 불입니다.

주님 사랑에, 성령에, 말씀에 불붙어 주님의 불이 되어 아름다운 열정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꺼진 인생이라면 살아 있어도 죽은 인생입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니 끊임없이 주님 사랑의 불이, 성령의 불이, 말씀의 불이 되어 어둡고 찬 세상,

밝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미사와 기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의 불을 붙여 주십니다. 

 

둘째, 주님의 죽음의 세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주님의 죽음의 세례에 참여하여 부활의 계기로,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값싼 인생은 없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그러니 우리의 온갖 고통을 주님의 죽음의 세례에 합류시킬 때 점차 주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

파스카의 기쁨, 영적승리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셋째, 주님의 참평화를 사는 것입니다. 결코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거짓평화를 주지 마라”(성규4,25)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범람하는 거짓평화, 가짜평화, 값싼평화요, 이런 평화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을 가르는 주님이요 이런 분열은 파괴적 분열이 아닌

창조적 분열이요 참평화에 이르는 과정적 분열입니다.

그러니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희망이신 주님과 일치되어 살아갈 때 창조적 분열,

과정적 분열을 슬기롭게 인내하면서 통과함으로 참평화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고통중에도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깊은 내적 참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교회를 위한 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바오로의 기도를 내기도로 바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결정적인 것이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성령으로 내적인간이 굳세어지기를,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사시기를, 사랑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를,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총도, 값싼 평화도, 값싼 행복도, 값싼 아름다운 인생도 없습니다.

자발적 찬미와 감사, 자발적 기쁨과 노력으로 항구히, 끝까지 주님과 하나되어 온갖 시련과

고난을 통과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날마다 공동전례기도인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수행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이요 일에 전념하는 모습입니다.

기도와 일이, 기도와 삶이 하나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가난한 빈손으로 겸손히 성체를 받아모실 때의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10/25(금)[(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욕망과 이기심의 눈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폭력과 전쟁의 방식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조재형 신부)

 

2. 베트남의 가경자(시복 전 단계)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감사 기도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 자녀로 선택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교회를 통해 선교 사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는 여러 형제자매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길을 가로막고 저를 힘들게 하는 이들한테도 감사합니다.

그들은 저를 거룩하게 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이 은총의 독방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쓴잔을 제게 나누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추기경님의 표현을 우리도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은총의 병고,

은총의 실패, 은총의 노년기, 은총의 죽음, 나와 죽어도 맞지 않는 은총의 그분...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6)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을 가르는 주님이요 이런 분열은 파괴적 분열이 아닌

창조적 분열이요 참평화에 이르는 과정적 분열입니다.

그러니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희망이신 주님과 일치되어 살아갈 때 창조적 분열,

과정적 분열을 슬기롭게 인내하면서 통과함으로 참평화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고통중에도 예수님처럼, 성인들처럼 깊은 내적 참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0/25(금)[(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26일 기도....

 

복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오늘의 말·샘 기도>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6)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25일(금) 8시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