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0월 26일 토요일[(녹) 연중 제29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본기도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7-16
형제 여러분, 7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8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데로 오르시어
포로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9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14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16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
○ 예루살렘은 튼튼한 도성, 견고하게 세워졌네.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 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
○ 이스라엘의 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네. 그곳에 심판의 왕좌,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9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를 씻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드리는 이 성찬의 제사로 더욱 깨끗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신다.
<또는>
마르 10,45 참조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서 뉴욕에서 신부님이 왔습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로 오기 전에 뉴욕의 평화신문에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의 사정을 잘 알기에, 신문 홍보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같은 서울 대교구이고, 전임 신부이기에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힘들면 친정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하듯이, 신부님도 아버지의 집에 온 것처럼 편했다고 합니다. 신문사 운영은 제가 5년 동안 있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직원들은 신문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신문사 홈페이지도 알차게 디자인했습니다. 건물이 100년 가까이 되었기에 고치고, 수리해야 할 곳들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지붕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신자분이 공사를 맡아서 조금 저렴하게 계약했지만, 신문사가 감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친정 같다는, 아버지의 집 같다는 달라스 성당에서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어서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신앙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직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소유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금연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진정한 금연이 아닙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이고,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이야기는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본인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비우는 사람이, 나누는 사람이, 먼 곳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해서는 더욱 기다려 주시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더욱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 악,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에페4,7-16 루카13,1-9
강력한 경고성 발언은 우리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의 표현입니다!
젊은 사제 시절, 아이들과 동고동락할 때, 너무 성급했고 미성숙했던 탓에 여린 새싹 같은
그들에게 참 많은 상처를 준 것들, 평생을 두고 반성하게 됩니다.
여차하면 빗나가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으름장을 놓고 강력한 경고성 발언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배경에 그저 아이들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음도 고백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동족 유다인들에게 강력한 경고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주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 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비유 속의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25.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에페4,1-6 루카12,54-59
주님과 더불어 일치의 여정
<시대의 표징을 아는 지혜, 분별력의 지혜>
기상하여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면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하늘과 별이요 다음은 불암산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저만큼 하늘과 산을 많이 바라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1997.2.>
아주 많이 인용한 무려 27년전 자작애송시지만 지금도 하늘과 산을 바라볼 때 마다
늘 새롭게 떠오르는 시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주님과 산이 상징하는 나와 날로 깊어지는 관계를 희구(希求)하는 시입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옛 어른 ‘다산’의 지혜를 나눕니다.
“말이 말을 하지 않고, 사람이 말하기 위해서는 오직 끊임없는 공부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그릇된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릇된 것을 깨달음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바른 말에서 깨달을 뿐이다.”
바른 말을 깨닫는 공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은
이런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아, 그렇구나!” 날로 깨달아가면서 지혜로워지고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역시 값싼 깨달음의 은총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치열한 공부와 노력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어제 원장수사로부터 부탁한 강의록을 선물받았습니다.
“전례의 상징과 공간”이란 ‘깊고 아름다운’ 제하의 강의록인데 참보물을 지닌 부자라도
된 듯 행복했습니다. 맨먼저 나온 상징이 제대였습니다.
끊임없이 미사가 봉헌되는 ‘희생제단과 식탁’의 주님의 제대야 말로 하느님을 믿는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 됩니다.
또 믿는 이들 모두가 다 주님 중심의,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여정중의 삶임을 깨닫게 합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주 하느님 공부입니다. 이런 공부의 대가가,
공부의 달인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囚人)이 된 바오로 사도이지만
자유롭기는 우주적입니다.
우리 모두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것을 권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단숨에 읽힙니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 말씀으로 더욱 주님과 일치를 추구하고픈 의욕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고,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에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평화의 사랑을 다하며,
이런 일치의 중심인 하나를, 한분이신 주님을 향한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때
다양성의 일치에 날로 지혜로워지고 자유로워지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 시대의 표징을 읽는데,
또 분별에 눈밝은 지혜를 지닐 것을 촉구합니다.
“깨어 있어라”에 이어지는 시대를 알아보고 분별의 지혜로 늦기전에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이 어떤 시대입니까?
어제 “파멸 앞당기는 초가속 시대 AI”(안호기) 이란 칼럼을 읽었습니다.
핵전쟁 위험을 예고하는 종말시계는 90초를 남겨두고 있고,
탄소시계의 한계치는 4년 273일 남았을 뿐이며,
인공지능의 위험을 경고하는 ‘AI 안전시계’는 현재 11시31분으로 고위험상태에 진입했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근대화 이전 과거 삶의 방식을 되찾고,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국가는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시민이 서로 돌보고 연대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변화의 속도가 훨씬 느리더라도 공동체의 가치와 삶의 질을 높여야 행복해질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공동체의 고마움을 깨닫고
섬김과 나눔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각자도생은 모두가 파멸의 지름길입니다.
오늘 주님의 복음은 그대로 이런 위기의 시대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참으로 외적 육적 욕망의 삶에서 내적 영적 삶에로의 혁명적 전환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절체절명의 작금의 시대입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의 무지를 꾸짖으며 분별의 지혜를 발휘할 것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스스로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지체없는 회개와 용서, 화해를 촉구하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과 더불어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시대의 표징을 읽는 지혜의 은총에, 분별력의 지혜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10/26(토)[(녹)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조재형 신부)
2.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고,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이수철 신부)
10/26(토)[(녹)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제127일 기도
복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26일(토) 9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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