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0월 28일 월요일[(홍)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대영광송>
본기도
복된 사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신비를 저희에게 알려 주셨으니
거룩한 시몬과 유다의 전구를 들으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 나날이 늘어나 교회가 끊임없이 발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영광에 빛나는 사도들의 모임이 주님을 기리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거룩한 시몬과 유다 사도의 영광을 기리며 이 예물을 드리오니
저희 믿음을 새롭게 하시어 거룩한 제사를 합당히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도들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어,
지상에서 주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표지가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와 영원히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성체를 받아 모시고 성령 안에서 간절히 청하오니
시몬과 유다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저희를
주님의 사랑으로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1991년 8월 2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9월 5일에 첫 본당인 중곡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았습니다.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이 앞으로의 사제 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본당 신부님의 세례명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였습니다. 타대오의 이름은 ‘유다’였는데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스카리웃 유다와 구별해서 ‘타대오’라고 부릅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에게서 ‘자유’를 배웠습니다. 신부님의 자유는 두 개의 날개를 타고 날았습니다. 하나는 ‘기도’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루에 3시간 이상씩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 방의 기도 초는 신부님의 기도와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수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린이처럼 순수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제 막 새 사제가 된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매일 동네 산책을 같이 하였습니다. 보좌신부가 더 필요하다면서 용돈도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33년 저의 사제 생활에 큰 힘이 되어주셨던 타대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게 영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동창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시몬’입니다. 제가 예수님 시중을 들며 분주했던 마르타와 같았다면 그 친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던 마리아 같았습니다. 제가 눈에 띄는 ‘꽃’을 지향했다면 그 친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와 같았습니다. 제가 소리만 요란한 ‘빈 그릇’ 같았다면 그 친구는 속이 꽉 찬 ‘그릇’이었습니다. 저는 활동과 만남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면 그 친구는 홀로 있음에서 힘을 얻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뭔가 한 것 같은데 내세울 것이 별로 없었는데, 그 친구는 침묵 중에 뭔가를 만들었습니다. 2년 전입니다. 저는 북미주 파견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 지도를 제안받았습니다.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난감했습니다. 그때 제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동창 신부였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매년 수도원 피정 지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피정 자료를 보내 줄 수 있는지 부탁했습니다. 친구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귀한 자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북미주 파견 수도자 피정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산과 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그런 친구를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와 시몬 사도는 기도와 겸손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가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주변에 있는 분, 나와 함께 일하는 분, 내 가족들의 강점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2. 전삼용 요셉 신부
2024년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루카 6,12-19
왜 위대한 성인들은 책이 아니라 제자를 남기려 했을까?
오늘은 성 유다 타대오와 성 시몬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중요한 점은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살다 보니 생긴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복음을 더 많이 전파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처럼
더 넓은 곳으로 가셨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나 채프먼은 딸
바네사 제임스(Vanessa James)와 ‘이름 없는 소녀’(The Girl with No Name)라는 책을
공동 집필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유괴범들에게 버림받은 후 콜롬비아 정글에서
꼬리감는원숭이 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원숭이 그 자체였습니다.
사냥꾼들에게 발견되고는 사창가에서 살았습니다. 나중엔 탈출하여 결혼하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렸습니다. 누구나 성장은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처음부터 교회를 만들 생각으로 열두 사도를
뽑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가 된 싯다르타도 모두 책을 한 권도 쓰지 않고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데 생을 바쳤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알았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제자 공동체를 통해 전달하는 게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자 공동체를 세우려 했던 더 큰 이유는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2015년에 방송된 KBS 인생극장 ‘뇌 병변 장애 부모가 삼 형제를 키우는 방법:
그렇게 부모가 된다’라는 내용은 많은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안겼습니다.
자기 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두 장애인이 결혼하고 아기를 낳겠다는 꿈을 가졌을 때
가족들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 형제를 낳았고 누구보다 자녀들을 잘 키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나라에서 나오는 돈으로 살아도 어느 정도는 살림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함께 일합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는 백수였어!’라는 소리를 하지 않기를 바라요.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훌륭한 분이셨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해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내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천덕꾸러기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어요.”
공동체를 낳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면 둘이 사랑을 해봐야 그렇게
남자와 여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녀를 낳아도 그렇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사람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결혼해야만 자녀를 낳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도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아이들아!”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자녀를 낳음, 곧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움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세상에 사는 의미가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라는 것을 3년 동안 굴에서
기도한 끝에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그 이전부터 그러한 공동체를 낳으려는 이유로
자신을 갈고닦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첫 정식적인 수도회가 탄생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결혼하기 전부터 자녀를 정신적으로 잉태하고 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고 준비합니다. 그런 부모와 그냥 살다가 우연히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모는 다릅니다. 낳으려는 목적으로 살아야 나도 성장하고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어떤 공동체를 낳고 기르고 파견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나의 성장과 완성이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2024년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곧 신분이나 능력이나 지위에 있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히었기에 거룩한 이들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에 의해 뽑히었고, 거룩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건물’이 되고, 거룩한 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에페 2,20)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도 이 '건물'(집)은 '자라납니다.' 곧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에페 2,21) 그렇게 자라나면서 신령스런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2) 참으로 신령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토록 우리 안에 당신의 신비가 살아있다니, 헤아릴 수 없이 크나큰 분이 나보다 작아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사랑의 신비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하고 경탄할 뿐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가정’을 건설합니다. 바로 내가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 집의 건축 자재요, 그 가정의 식구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27.연중 제30주일
예레31,7-9 히브5,1-6 마르10,46ㄴ-52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이 답이다”
오늘 복음은 복음서의 요약같습니다. 상징들로 풍부하며 복음의 위치도 아주 적절합니다.
예루살렘 상경 여정중에 일어난 일이며 이어지는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또 오늘 복음 앞에는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가 있었으니,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은 십자가의 길 여정임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오늘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신 일화 바로 앞의 일화입니다.
두 경우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앞서 제베데오의 두 아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제가 볼 때 철부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의 내적 수준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실망이 참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와의 만남은 참 신선합니다.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눈먼 거지 바르테매오’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가난한 인간 실존을 상징하는 듯 강열한 느낌을 줍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는 모두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눈먼 거지’일 수 있습니다.
눈먼 거지였지만 영혼의 눈은 주님을 찾는 열망으로 환히 열려 있던 바르티매오였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이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전광석화,
응답하는 바르티매오입니다. 주님을 찾는 열정의 반영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참으로 절박한 가난하고 겸손한 이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칠 단 하나의 기도가 있다면 이런 자비송뿐입니다.
이런 자비송으로 미사전례를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바로 바르티매오와 같은 열망으로
미사참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영적 통찰력이 놀랍습니다.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혼의 눈은 활짝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히브리서가 잘 설명해줍니다.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는’ 대사제가 되신 예수님이요,
하느님께서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나를 낳았노라.”하고 인정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바르티매오의 영적 통찰은 정확했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열렬히 찾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이것은 올바른 충고가 아닙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송 기도를 바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자비송 기도에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말씀하십니다.
만류하며 방해하던 이들이 우군이 되어 그를 격려하는 말마디도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각자에 대한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용기를 내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자주 쓰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운명론적 체념을 떨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나 다시 부활의 새생명을 살라’는
절호의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는 숙명의 사슬과 같은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가니
과거와의 결별과 동시에 부활을 뜻합니다.
그대로 미사장면중 주님을 만난 이들의 내적상태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을 이룹니다.
과연 오늘 짧은 복음은 그대로 미니 복음서로 복음서의 요약같습니다.
앞서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물음과 똑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시공을 초월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화두같은 영원한 물음입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삶이 진실하고 간절하고 절박하면 말도 글도 짧고 순수합니다.
“스승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앞서 야고보와 요한의 청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역시 우리가 드릴 소원의 청도 이것 하나뿐일 것입니다.
아마 이 두 형제 제자들이 이 경우를 목격했다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잠시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하는 두 시를 다시 나눕니다. 피정집 자캐오의 집 3층
제의방에서 바라보는 수도원 배경의 가을 불암산 풍경은 참 장관입니다.
눈앞에 가까이 있는 산이 순간 주님처럼 느껴졌고 흡사 주님을 만난듯한 체험을 했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찾아온 두 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하나의 고백에 이어 엊그제 또 하나의 고백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살아 있는 주님’을 만나듯 고백하며 되뇌는
두편의 시로 요즘 많이 행복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의 절정이요 제1독서 예레미아 예언의 실현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육신의 눈이 열림이 상징하는 바, 마음의 눈, 영혼의 눈, 믿음의 눈입니다.
저는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개안의 여정’이라 정했습니다.
멀쩡한 육신의 눈을 지녔어도 무지에, 탐욕에 눈먼이들, 눈뜬 맹인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개안의 여정’,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늘 정하는 제목입니다.
우리 삶은 계속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이면 좋겠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감퇴해도 영안의 시력은, 심안은 시력은 날로 좋아져야 너그럽고
자유로워지는, 풍요롭고 행복해지는 삶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항 처방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은 만남입니다.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만남은 물론 주변 모두를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개안은 회개입니다. 개안과 동시에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개안은 깨달음입니다. 눈이 열려가면서 깨달음의 진리들이 뒤따릅니다.
개안은 방향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눈이 열려 주님을 따름으로 희망의 길이 열리고
희망의 방향이 주어졌으니 이제 방황과 표류는 끝났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면됩니다.
그러니 개안의 은총은 얼마나 지대한지요!
말그대로 오늘 복음은 예레미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예레미야의 기도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시편 저자도 화답송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함께 합니다. 그대로 바르티매오는 물론 우리의 고백과 기쁨을 대변합니다.
“주님이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유배후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르티매오와 함께 우리도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10/28(월) [(홍)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축일로 지내는 타대오와 시몬 사도는 기도와 겸손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겸손으로 살아가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주변에 있는 분, 나와 함께 일하는 분, 내 가족들의 강점을 찾아보면 어떨까요?(조재형 신부)
2. 예수님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가 된 싯다르타도 모두 책을 한 권도 쓰지 않고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데 생을 바쳤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알았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제자 공동체를 통해 전달하는 게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떤 공동체를 낳고 기르고 파견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나의 성장과 완성이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개안의 여정’,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늘 정하는 제목입니다.
우리 삶은 계속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이면 좋겠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감퇴해도 영안의 시력은, 심안은 시력은 날로 좋아져야 너그럽고
자유로워지는, 풍요롭고 행복해지는 삶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항 처방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이수철 신부)
10/28(월) [(홍)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제129일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28일(월) 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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