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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0월 27일 주일[(녹) 연중 제30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27일 주일[(녹) 연중 제30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드님을 의롭고 자비하신 사제로 삼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주시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아드님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십니다.

입당송

시편 105(104),3-4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대영광송>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를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31,7-9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8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3 참조)
◎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제2독서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5,1-6
1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4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좋으신 주님, 주님의 백성인 교회를 돌보시어, 주님의 가르침 대로 곧은길을 걸으며 본보기가 되고,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공정이신 주님, 이 땅의 정치인들을 굽어살피시어, 모든 일은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함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이 올바르게 판단하며 주님의 정의를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3.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감옥에 갇힌 이들의 몸과 마음을 살펴 주시고, 출소자들과 범죄의 피해자들 그리고 이들을 돕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위로와 힘을 주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저희가 몸담고 있는 이 생활 공동체를 사랑으로 이끄시어, 주님께서 주신 본모습을 온전히 가꾸며, 구성원들이 모두 다 함께 행복할 수 있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주님께 올리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바치는 제사가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7 <그리스도의 순종과 우리의 구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더없이 사랑하시어,
그리스도를 저희에게 구세주로 보내 주시고,
죄 말고는 저희와 똑같은 처지에서 살게 하셨나이다.
그리하여 성자를 사랑하셨듯이 저희를 사랑하시고,
저희가 순종하지 않아 죄를 지어 깨뜨린 계약을,
성자의 순종으로써 다시 맺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20(19),6 참조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
<또는>
에페 5,2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시어,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네.

영성체 후 묵상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굳은 믿음으로 간절히 부르짖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고 잠자코 있지 말고 용기를 내어 다시 외칩시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달라스 지역에 어쩌다 우박이 내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우박을 보지는 못했지만, 우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박이 내리면 차량과 지붕에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우박이 내린 후에는 지붕 공사 업자들이 무상으로 검사를 해 준다고 합니다. 검사 후에 문제가 있으면 유상으로 고쳐 준다고 합니다. 보험이 적용되면 큰 어려움은 없겠지만 생활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는 걸 막거나, 피할 수 없다면 그것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원망한다고 우박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게도 우박과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0년간 별 탈 없이 쓰던 노트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통은 전원을 껐다 켜면 되는데 이번에는 그런 정도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지붕 공사 업자와 같은 본당 청년이 있어서 노트북의 검사를 맡겼습니다. 고마운 청년은 노트북을 검사한 후에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배터리가 팽창해서 위험하기에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고 합니다. 10년 된 노트북이기에 프로그램을 바꾸고, 용량을 키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프로그램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있던 자료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자료는 다른 노트북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최근에 준비했던 강론과 강의 자료들이 없어져서 아쉬웠습니다. 내년 2월에 있는 신앙강좌 강의와 10일 정도의 강론이 없어졌습니다. 이것도 제게 내린 우박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고, 강론도 다시 준비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더 좋은 강의와 강론을 준비하도록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는 없어졌지만, 그것을 준비했던 저의 노력과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노트북도 새로 마련했고, 자료는 가끔 외장 하드에 저장하면 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고치면 좋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임께서는 당신 찬미를 즐기라 재촉하시고,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니,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불안합니다.” 우리의 건강에, 우리의 사업에, 우리의 가족에게 우박이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받아들일 것과 피할 수 있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큰 우박을 맞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거지의 이야기입니다. 눈이 멀었던 바르티메오는 일을 할 수 없기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르티메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었도 은총입니다.” 열심히 얻어먹던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걷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눈도 뜨게 해 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바르티메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메오의 앞을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큰 소리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말렸지만 바르티메오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이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메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바르티메오는 평생의 소원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운명처럼 우박을 맞아서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르티메오가 죄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르티메오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드디어 바르티메오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보고 싶은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티메오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세상을 보는 육체의 눈을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청하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2. 전삼용 요셉 신부

 

연중 제30주일

마르코 10,46ㄴ-52

 

믿음이 커질수록 청하는 것도 커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주위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죄인이 어디 자기의 목소리만

들어달라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소리 지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멈추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이고 믿음이 구원하는데, 그 믿음은 내가 무엇까지 청할 수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때 그만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 컴퓨터 설립자이고 2009년 포춘지 선정 최고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췌장암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에서 “늘 갈망하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라는 제목으로 졸업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었고 친구와 둘이 자동차 장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10년 만에 직원 1,000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또다시 돌아와

애플을 미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늘 갈망하십시오.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종교는 불교에 가깝고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가깝습니다. 무언가를 우직하게 갈망한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어처구니없게 망가진 눈을 회복시켜달라는

바르티매오에게 믿음이 강하다 칭찬하셨습니다.

더 불가능한 것을 청할수록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주님께 무언가 청했던 것은 주일학교 교사 때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야단을 쳤더니

그 아이가 집에 간다고 가버렸고 저는 성당에 앉아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기도가 끝나자 잘못했다며 그 아이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다음은 술 내기였습니다. 이미 2병을 마시고 기도하고 내기하여 각 6병을 마셨습니다.

물론 제가 이겼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음 날도 숙취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은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면 한 번 나타나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성모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은 박사 논문 발표가 잘 끝나기를 청했는데, 망친 줄 알았더니 교수님들이 다 만점을 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당에 와서는 어르신들이 많고 교적에 허수가 많지만,

이른 시일 내에 미사 참례율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3년째 되어가고 있는 지금 거의 이 기도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 개인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되는 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청하는 것도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안나라고 부산교구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불쌍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녀였음에도 아이들을 자녀로 삼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도망친 엄마 대신 모르는 한 여자에게 엄마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아이의 꿈을 모르는 체

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쇼크로 사흘 만에 돌아가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믿음과 함께 나의 청하는 것도 커져야 합니다. 

 

 그분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황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람이 그 자매를 찍어누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안나 자매는 자신 앞을 이미 지나쳐가는 교황님께 온 힘을 다해 “파파, 파파”라고 불렀습니다.

 

교황님은 되돌아오셔서 그 자매의 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그것을 청할 수 있고

또 상대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청합시다.

이것이 그분을 인정하고 내가 믿음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3. 이영근 신부

 

연중 제30주일

 

<이기심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당신을 옷 입게 하소서!>

 

오늘 말씀전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제1독서는 <예레미아 예언서> ‘위로의 책’(30-31장)의 핵심 부분입니다.

바빌론 유배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어, 그들을 모아들이어 곧은길을 걷게 할 것인데, 그들 중에는 눈 먼이, 다리 저는 이 등도 있으리라고 말하면서(예레 31,7-8) 이렇게 위로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여 이끌어 주리라.”

(예레 31,9)

제 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의 혈통을 넘어선 초월적 직분을 지닌 멜키시댁과 같은 영원한 사제로 선포됩니다(히브 5,1-6).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는데,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 시 146,8; 마태 11,5)

 

그렇다면 누가 ‘눈 먼 이’인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4,13; 7,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8,18),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6,52; 8,17), ‘따로 설명해 주어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9,32)이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혹 지금 우리도 ‘가야 할 길 가’에 그냥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르 10, 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는 외침은 용기 있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당대의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이 배척했던 예수님을 감히 ‘큰 소리로’(마르 10,48) ‘메시아’로 고백하는 목숨을 건 장엄한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 뜬 이들’이 보지 못한 것을 ‘눈을 감은 장님’이 더 잘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님인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동전그릇도 버려두고 볼 수도 없으면서도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그렇습니다.

이제 움츠리고 둘러쓰고 있는 위선과 기만의 '겉옷'을 벗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움츠리고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저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손해보지 않으려 하는 ‘나 자신의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제 생각과 이기심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당신을 옷 입게 하소서! 

당신의 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르 10,51)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린애가 잃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듯이, ‘하느님을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여, 백인대장처럼 우리가 “참으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새롭게 본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곧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다름 아닌 믿음의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10,52)  

이제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티메오처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26.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에페4,7-16 루카13,1-9


지혜로운 구원의 삶
“회개, 책임을 다함, 사랑의 공동체 건설”


가을은 국화꽃의 계절입니다.
몇차례 된서리에도 청초한 들국화꽃 무리들 흡사 회개한 영혼들의 아름다운 공동체같습니다.
오래전 '들국화꽃'이란 시를 나눕니다.


“작아도 그 청초함과 향기는 비할바 아니다
 크기와 자리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작디작은 송이송이 샛노란 들국화꽃 무리들
 꼭 노오란 별무리 은하수같다
 늦가을 매서운 된서리에 가을꽃들 다 졌어도
 홀로 청초하다
 그윽한 향기 멀리멀리 퍼진다
 꿈꾸듯 피어난 샛노란 사랑이다”<2000.11.16.>


이어 이런저런 소식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페루 출신 해방신학의 선구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지난 화요일 10,22일 향년 96세로 선종했습니다.
교황은, “나는 오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생각한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자 교회의 사람이었다.”극찬합니다. 


또 어제 교황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선종 750주년을 맞이하여,
“두 거룩한 교사들은 크게 영감을 주고 교회를 부요하게 한 영감의 원천이었다”며
두 교회박사를 기립니다. 
성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세라핌 박사(The Seraphic Doctor)”로,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사박사(Angelicus Doctor)”로 불립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에게 주신 교황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고통중인 세상에 하느님 사랑의 희망을 가져다 주십시오’,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관상생활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전쟁은 인류의 쓰레기입니다’,
‘사랑이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마리아의 모범’” 순서에 따른 풍요로운 영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부터 행복을 발견하여 행복을 선택하여 사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어제 금요강론 시간 서두 인용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이 소망하시는바 우리 각자 모두 구원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제 찾아온 '이 행복에 삽니다'란 짧은 시가 자주 저를 행복하게 할 거란 예감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2024.10.25.>


늘 앞에 있는 주님이 제 행복의 원천입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예술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詩人은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 때문에 시를 쓴다.”<다산>
시가 찾아오기에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시로써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예로써 바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한다.”<논어>
‘시삼백,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란 공자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래서 성서의 시편을 늘 노래로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지혜로운 구원의 축복인지 감동합니다.


지금까지 모두가 풍요로운 영성생활에 좋은 참고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유비무환의 지혜입니다. 언젠가 예기치 못한 일에 앞서 하루하루 충실히 사는 것이
구원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이 왜? 하느님이 왜?...끝없는 물음만 있지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 하여 인과응보도 단편적일 뿐 모두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인과응보의 프레임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불행한 일에 담긴 경고를 배우고 깨닫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빌라도에 죽임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불행을, 실로암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의 불행을
경솔히 죄와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인을 캐기 보다는 각자 신속히 회개의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원인 해명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 영역입니다.
원인 해명하다보면 악순환의 미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니 이 또한 유혹입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아주 단호합니다.
결코 회개를 미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예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회개의 절박성을 가르칩니다.
포도밭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겠다는 하느님에게 간곡히 제동을 거는
포도 재배인 예수님입니다.
일단 심판을 유예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계획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도대체 소모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시작해야만 합니다.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 영역이 아닌 하느님 영역이고 오직 현재만 우리에게 해당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그분과 함께 있는 한, 나는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As long as I am with him now, I have nothing to worry about)’.
그분과 함께 회개의 지금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지혜입니다.


회개에 이어지는 지혜로운 구원의 삶은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줍니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각자 받은 은사의 몫에 따라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여 실현해야 할 바오로의 원대한 공동체 이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결코 혼자의 구원은, 혼자서 완성의 구원은 없습니다.
더불어의 공동체를 통한 구원이요 전인으로서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끊임없이 사랑으로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각자 지혜로운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책임을 다함으로 사랑
의 공동체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10/27(일)[(녹) 연중 제30주일], 되새김 구절

 

1. 바르티메오는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청하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조재형 신부)

 

2.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늘 갈망하십시오.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종교는 불교에 가깝고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가깝습니다. (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끊임없이 사랑으로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각자 지혜로운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이수철 신부)

 

10/27(일)[(녹) 연중 제30주일], 제128일 기도....

 

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27일(일) 5시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