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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0월 30일 수요일[(녹) 연중 제30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30일 수요일[(녹) 연중 제30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05(104),3-4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6,1-9
1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3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
4 그리고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5 종 여러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두려워하고 떨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현세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6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7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
8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9 그리고 주인 여러분,
여러분도 종들을 이와 같이 대해 주십시오.
겁주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그들의 주님이시며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또 그분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10-11.12-13ㄱㄴ.13ㄷㄹ-14(◎ 13ㄷ)
◎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네.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네. ◎

복음 환호송

2테살 2,14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께 올리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바치는 제사가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0(19),6 참조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
<또는>
에페 5,2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시어,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피아노를 배우면서 운지법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손가락 사용법을 정확하게 배워야 좋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나중에 어려운 곡을 연주할 때도 틀리지 않고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급한 성격인 데다가, 배우지 않고 연습했더니 어려운 부분에서는 자꾸만 틀리곤 합니다. 가전제품을 사면 사용법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용법을 꼼꼼하게 읽어봅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겼어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사용법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사용법을 찾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도 많았습니다. 운동을 배울 때도 기초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스키도 남이 타는 걸 따라서 배웠고, 중급 코스까지는 내려올 수 있지만 어려운 코스는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대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스쿠버 다이빙입니다. 이론 교육을 받았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장비 착용법을 배웠고, 직접 바다에서 실습했습니다. 그렇게 배웠기에 깊은 바다에서도 스쿠버 다이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신앙인이 지켜야 할 삶의 태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제는 부부의 관계를 알려주었습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순명했던 것처럼 남편에게 순명하라고 했습니다. 2,000년 전에 남자와 여자는 신분이 달랐습니다. 우리의 문화 역시 남존여비,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문화가 당연했음에도 부부는 동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남자도, 여자도, 어린아이도, 나이 든 사람도, 유다인도, 이방인도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인과 종의 관계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현세의 직책과 신분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지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순명한 것처럼 순명하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좁은 문을 이야기하십니다. 화려하고 멋진 건축물이지만 하느님을 찬미하고, 친교를 나눌 수 없다면 좁은 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독점하고, 권위를 내세우면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좁은 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놓으면 이익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좁은 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양 냄새 나는 목자가 없다면,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한다면, 빈부의 격차로 가난한 이들이 소외된다면 역시 좁은 문은 아닐 것입니다. 현실의 삶이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너무 좁게 느껴질 것입니다. 성공, , 명예, 출세가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먼 훗날 가도 되고, 안 가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잠시의 쾌락과 경쟁에서의 승리 때문에 기도와 미사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 일 것입니다. 예전에 맹인가수 이용복씨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어린 시절입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좁은 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늘나라는 사법고시 보듯이 공부를 해서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처럼 월등한 체력과 실력이 있어야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삼성이나 현대처럼 엄청난 재력이 있어야 가는 곳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뛰어나고, 능력이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좁게만 보이는 곳이 하늘나라일지 모릅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사람,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에게 하늘나라는 결코 좁은 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구원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희생과 나눔입니다. 십자가와 사랑입니다. 믿음과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믿음과 희망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은 편하고 좋은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에페6,1-9 루카13,22-30

 

큰 희생과 자기 포기, 인내와 사랑을 요구하는 좁은 문!

 

참으로 특별한 이력을 지닌 우리 시대 탁월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가톨릭 신학자인 스콧 한(Scott Hahn)입니다.

는 원래 미국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런 스콧 한이 198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가톨릭 신자로 회심했습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개신교 목사들과 성경 학자들의 개종으로 이어져 한동안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정신없이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지난날들을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변한 사람을 보고 주변 사람들 가만있지 못합니다. 다들 한 소리씩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저 양반 갑자기 왜 저러지? 뭘 잘못 먹었나?”

 

그는 당시의 고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한 지 약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하느님께 대들었다.

 

“주님, 저는 제 삶을 당신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친구들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무슨 처사가 이렇습니까?”

 

친구들은 갑자기 변한 저를 도무지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이런 말을 남기고 다들 떠나갔습니다.

 

“너는 변했어. 우리는 더 이상 너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아. 잘 먹고 잘 살아라!”

(스콧 한, ‘영원토록 당신 사랑 노래하리라’, 바오로 딸 참조)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처음 직면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넓은 문 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세상의 것들은 그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지 모릅니다.

 

‘좁은 문’, 참으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인내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포기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대가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아직 어려서, 아직 젊어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 번번이 실패하곤 하지만, 기를 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모두 가뿐히 좁은 문을 통과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참을 묵상해봤습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다름 아닌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성장은 반드시 형제의 성장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내가 변해야 형제가 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공동체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2024년 나해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좁은 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던 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루카 13,2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을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이는 어찌 들으면, 참으로 모진 말씀으로 들립니다.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문’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문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닌 '좁은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가 부르심은 받지만, 모두가 응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문'이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라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은 동서남북 온 세상에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루카 13,29)

두 번째 충격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루카 13,25)

이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문’이 열려있으니 당장 들어오라는 다급함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곧 영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문’은 내일 들어가야 하는 문이 아니라, ‘오늘’ 당장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곧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 충격은 지금과 그때에는 ‘첫째와 꼴찌가 바뀌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과 그분의 눈이 서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것은 민족이나 혈통, 출신이나 가문 혹은 세상의 출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첫째와 꼴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30)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두를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급함과 절실한 요청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가도록 힘써라.”

(루카 13,24)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29.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에페5,21-33 루카13,18-21

 

하느님 나라의 실현

<내 고향집>

“구암리카페에서의 축제 음악회”

 

어제 어머님을 찾듯이 참으로 오랫만에 옛 고향집을 찾았습니다.

예전보다 고향집 마을 풍경이 더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어제는 참 행복하고 만족한 하루였습니다. 100% 충만한 하루를,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날이었습니다. 과정마다 목적지였고 과정마다 만족했습니다. 어디서 마쳐도 완성된 하루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다음 행복기도 내용 그대로 였습니다. 늘 자주 외어보며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확인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발견이자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역시 기상하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만세칠창중 네 번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를 힘껏 외쳤습니다. 평화로운 하루 순례여정중 또렷히 부각되는 깨달음은 ‘결코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어나서도 안되겠고 일어나지도 않겠다 하는 생각을 평화로이 살아가는 분들을 볼 때 저절로 드는 확신이었습니다.

 

“산에 

 산을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은 산같은 분이예요.”

 

늘 산이라 자부하며,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산처럼 머물러 살다가 어제는 참 오랜만에 움직였습니다. 함께 했던 분에게 산을 움직였다며 믿음을 격찬했습니다. 산아래 모두 바뀌어도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은, 변함없는 산이 있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에 늘 거기 그 자리에 산처럼 정주해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했습니다. 

 

어제 하루 휴가를 내어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같은 분들과 함께 충남 예산 봉산의 고향집 순례를 했습니다. 하루 거룩한 순례피정을 다녀온 느낌으로 참 충만한 하루였습니다. 두분 자매님의 생애가 그대로 하나의 “살아 있는 성경책”과도 같다 생각되는 분들이었습니다. 명실공히 다음 다산 어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분들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은 입으로 하는 자랑이 아니다. 본보기가 되고 싶다면 거쳐 온 세월로 증명하라.”

 

살아 온 생애 자체가 본보기가 되는 분들이었습니다. 어제 하루 저에겐 ‘신의 한 수’ 같은 하느님의 선물같은 분들이었습니다. 함께 편안히 나눈 식사도 좋았고 고향집 예쁜 구암리카페에서 머물렀던 시간도 참 평화로워 시간 가는줄 몰랐습니다. 마냥 평화로워 마냥 머물고 싶었습니다. 참 아담하고 아름답고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카페로 평화로운 분위기에 저절로 젖게 하는 느낌이었고 함께한 자매님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했습니다. 

 

고향집 근처에서 만난 분은 오직 한분이었지만 오랜만에 충청도 사투리로 친근한 대화도 나눴습니다. 제 고향집 구암리카페 집자리가 좋다는 말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건 어머니도 살아 생전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여긴 좋은 집자리니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어머님 말씀을 들었다며 형수님은 좋은 집자리에서 제가 태어났다며 저를 지목했습니다. 

 

태어나서 20년간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아온 고향집입니다. 저의 정서 8할은 여기 고향집 환경 영향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주마등처럼 무수히 떠오르는 그리운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어제의 절정은 구암리카페 뜨락에서 즉흥적으로 열린 음악회였습니다. 함께한 한분은 교대1년 후배인 70대 자매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냈던 재원으로 연민과 정의의 사람이자 관계의 달인이요 노래와 기타에 능숙한 분이었습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열정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 분이었습니다. 

 

두분 다 공통적으로 뛰어나게 좋은 분들이고, 한분은 겸손과 진실, 한분은 순수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수도생활을 그대로 보답받고 있다는 느낌의 하루였습니다. 참 무수한 동요들을 함께 즐겁게 열창했고 그대로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임을 실감했습니다. 문득 떠오른 ‘일터로 가자’ 노래를 약간 개작해 불러도 봤습니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웃으며 노래하는 여기가 낙원이로구나

 내 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 가슴엔 언제나 본바람 분다

 어화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

 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구나”

 

함께 한분들이 하느님 나라의 일꾼 자매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참 기이할 정도로 카페에서 만났던 몇분의 손님과 초등학교에서 만났던 분 한분외에는 면소재지에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텅빈 시골 땅에 건물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구암리카페에 손님은 계속된다하여 기뻤고 친절한 분들이라 잘 될 것이란 예감도 들었습니다. 

 

후에 자생 음악회 동안 카페는 비어 있었지만 비어 있는 그 모습도 참 평화로웠습니다. 카페처럼 지친 분들에게 늘 편안한 빈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두 비유입니다. 오늘의 은혜로웠던 추억에 잘 맞는 비유임을 깨닫습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두 비유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성장하는 겨자씨 나무처럼 오늘의 보물같은 추억은 끊임없이 섬기고 나누는 풍부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확장될 것이라 믿습니다. 더불어 내 자신이, 수도공동체가 성장하는 겨자씨처럼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되길 바라는 마음 역시 간절합니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바로 어제 함께 했던 분들이 사랑의 누룩과 같은 분들었고, 그리하여 기쁨으로 부풀러 올랐던 하느님 나라의 분위기를 체험했습니다. 누룩은 참 좋은 효소입니다. 부패인생을 향기로운 발효인생 하느님 나라로 변모시켜주는 성령의 효소, 사랑의 효소입니다. 건물이나 자연환경이 만드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만드는 하느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사람이 희망이요 참보물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겨자씨 나무같은 사람이, 성령의 효소가 되어 안팎으로 발효시켜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사람이 희망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부부공동체나 수도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아내와 남편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 원리는 다음 두 구절이면 충분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여기에 무수히 덧붙일 수 있습니다. 서로 섬기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나누십시오, 서로 존중하십시오, 이럴 때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도 소중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중해야 합니다.”

 

상호사랑, 상호존경의 하느님 나라 부부공동체입니다. 부부뿐만이 아니라 제가 몸담고 살아가는 요셉수도공동체 역시 그대로 하느니 나라의 실현입니다. 성규 72장은 사랑이 그대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수도공동체 묘사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람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명실공히 그리스도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얼마전 바티칸 고백사제들에게 주신 교황님의 당부말씀도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용서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논의하구요!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겸손을 배우고, 심리분석가가 되지 말고 연민의 경청자가,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제들과 이런 사제들을 보고 배운 이들의 공동체라면 그대로 하느님 나라 실현의 공동체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겨자씨와 누룩의 효소가 우리 모두 사랑으로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를, 발효로 숙성해가는 하느님 나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줍니다. 아멘


10/30(수)[(녹)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믿음과 희망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은 편하고 좋은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참을 묵상해봤습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다름 아닌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성장은 반드시 형제의 성장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내가 변해야 형제가 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공동체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가도록 힘써라.”

(루카 13,24)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그리스도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얼마전 바티칸 고백사제들에게 주신 교황님의 당부말씀도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용서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논의하구요!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겸손을 배우고, 심리분석가가 되지 말고 연민의 경청자가,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되십시오.”(이수철 신부)

 

10/30(수)[(녹)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제 131-2 기도  

 

복음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가도록 힘써라.”

(루카 13,24)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 2024년 10월30일(수) 8시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