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0월 29일 화요일[(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본기도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5,21-33
형제 여러분,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33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께 올리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고
저희가 바치는 제사가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
<또는>
에페 5,2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시어,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성사의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중남부 사제 모임을 다녀왔습니다. 칸쿤에서 있었습니다. 9개 주의 사제들이 모였습니다. 숙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다가, 마지막 날에는 근처 성당을 찾아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서울 교구 5명, 마산 교구 2명, 청주 교구 2명, 부산 교구 2명, 인천 교구 2명, 전주 교구 1명, 수도회 1명, 이렇게 15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회의 중에 신심 단체의 담당 사제를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꾸르실료, 성령기도회, 레지오, 엠이의 담당 사제를 정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미 꾸르실료의 담당 사제를 맡고 있었고, 신부님 한 분이 성령 기도회 담당 사제를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엠이와 레지오 담당 사제는 추후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담당 사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북부에 있을 때는 담당 사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엠이 당당 사제를 맡았습니다. 엠이 봉사자들과 주말을 함께 했고, 코로나 시기에도 피정을 했습니다.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중남부에도 성령기도회 담당 사제가 정해졌으니, 내년에 성령 대회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엠이와 레지오도 담당 사제가 정해지면 더욱 활성화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사제들이 겨자씨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사제는 미사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공동체는 말씀과 복음 그리고 미사를 통해서 성장하고, 열매 맺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부부는 기도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자녀들은 말씀과 복음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열매 맺습니다. 사제가 권위만 내세우려 한다면, 한국에서 했던 방식으로만 사목하려고 한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부부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가정에도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번 사제 모임을 통해서 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중남부 한인 공동체가 큰 나무가 되어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부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훈아의 ‘사랑’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나훈아의‘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행여 당신 외로울 때/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행여 당신 우울할 때/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참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전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감추어졌던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12명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볼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
2024년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루카 13,18-21
하느님 나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 46,1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아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며 자신도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며칠 전에 20년 전 제가 보좌를 할 때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왔을 때 병자성사도 주고 기도도 해 주었지만, 그 이후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바빠서 임종 직전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동안 전화도 한 통화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스러워지면 나도 고통스럽고 나 때문에
누군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면 그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겨자씨가 뿌려질
필요가 없고 누룩이 넣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는 공부하기 싫은 11살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엄마가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4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뜻이 살아있다면 자녀를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면 자기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상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바쁘다, 바쁘다만 하고 살다가 아플 때 연락도 못 하고 그냥 떠나보낸 나에게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 46,11: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희윤 마리 스텔라 수녀님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어느 날 저에게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던 자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자매는 남편과 한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나와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의 대답이 “수녀님 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희 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난 너희가 더 중요하고,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바빠… 바빠서…” 하면서 늘 동동거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멀리서
보이면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건너고, 전철이 출발할까 봐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빠른 환승 게이트가 어디인가 찾아보고.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바쁘게 사는 일’에 길들어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빠 보이는 저의 모습이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바쁜 마음과 몸 또한 죄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연피정이 생각납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늘도 바라보고,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도
가만히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멈춰 서서 그분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분들은 고마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무심코 지나갔을 많은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이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가만히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부르기
시작했고, 곧 영국군도 자신들만의 캐롤을 부르며 참호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양측 군인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의 땅'에 모여 음식, 담배, 기념품 등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까지 거행했으며,
인류애를 공유하는 이 순간에 양측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희망과 선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으며,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공유된 인간의 가치와 연결이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책, 영화, 노래를 통해 기념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을 쓴 스님도 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휴식도 되어주고
빵도 되어줍니다. 저는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머리로는 강론 준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3. 이영근 신부
2024년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루카 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였다.”라는 말에서, '깃들다'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여서, 부풀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져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루카 13,19) 주님!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에,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신 까닭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까닭에 형제들 앞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이, 제가 형제들 앞에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28.월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에페2,19-22 루카6,12-19
교회 공동체
“주님의 제자, 주님의 사도”
교황청 소식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교황님의 주일 강론과 삼종기도후의 강론주제가 신선했습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움직이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는
주일 강론 주제 였고,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예수님께 향하자”라는 삼종기도후 강론 주제였습니다.
두 강론 모두 눈먼 거지 바르테매오가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고
이어 주님을 따르게 된 내용을 깊이 다뤘던 강론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찾는 바르티매오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이요 우리는 모두 제자임을 확인시키는 강론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크게 알려진바 없는 두 사도이지만 예외없이 순교로서 주님께 생명을 바친 사도들이고
예수님의 친척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오늘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복음에서 역시 두 사도 이름이 나옵니다.
배반자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 유다 대신 타대오로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대한 일에 앞서서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제자들중 12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우며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로 성서 곳곳에, 시나이산, 갈멜산, 타볼산,
시온산등 유명한 산이름이 나옵니다만 오늘 산이름은 알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산에 관계된 일화를 소개합니다.
조선시대의 집 중 최고는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있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던 남명 조식의 산천재(山天齋)라 합니다.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라는 뜻의 산천재입니다.
그가 산천재에서 읊은 시도 일품입니다.
“덕산에 터를 잡고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겠냐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이 마음에 들어서
빈손으로 왔지만 먹을거리 걱정하랴?
십 리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늘 깨어 살고자 방울달린 칼을 차고 다녔다는 참 독특한 남명의 좌우명시도 깊고 아름답습니다.
"성실하고 삼가며
사악함을 물리치고 참됨을 보존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봄날의 꽃초럼 환히 빛나리."
새삼 불암산을 배경으로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요셉수도원 역시
산천재라 불릴 수 있겠고 이 또한 거룩한 축복이다 싶습니다.
10월 한달 내내 계속 저를 행복하게 하는 ‘산앞에 서면’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예수님께 불림받은 12사도 공동체는 그대로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12사도처럼 우리는 모두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모두가 주님의 제자지만 모든 제자가 사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제 우리 세례받은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의 제자도 되고 주님의 사도도 됩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제자(disciple)의 어원은 라틴어 ‘배우다(discere; to learn)’입니다.
바로 배우는, 공부하는 제자들입니다. 하루이틀이 아니고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제자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평생배움과 공부를 제공하는 매일미사가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옛 공부에서는 동서방이 공통적입니다. 모두가 성인이 되는 공부, 군자가 되는 공부,
참사람이되는, 참제자가 되는, 바로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였습니다.
오늘의 실용적인 공부와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바로 이런 옛 공부전통을 고스란히
전수받고 있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어제 “자신을 속이지 않는 공부, 공자부터 정약용까지 위대한 스승들의 공부법”이란
책을 감명깊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와 구별되는 것이 공부만 있고 기도와 선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오늘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도로서 탄생한 공동체요
예수님 중심의 다양성의 일치 공동체입니다.
새삼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인 우리의 일은 “기도, 공부, 선교”로 크게 셋으로 구분됨을 봅니다.
선교의 사도직에 앞서 제자로서의 기도와 공부가 본질적임을 배웁니다.
기도와 공부는 선교를 통해 완성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열두 제자이자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치유활동을 하면서 선교활동에 돌입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중심의 거대한 교회공동체 모습입니다.
기도하고 공부하는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사도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제1독서 에페소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배웁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가족으로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 건물의 모퉁이돌이 됩니다. 이어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는 살아 있는 유기적 역동적 공동체이자,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자라나는, 지어지는 성전임을 배웁니다.
바오로 사도가 잘 요약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교회 공동체임이 잘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바오로의 교회론을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공부하고 확인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제자로서 기도하고 공부하는 미사시간이요,
이어 주님의 사도로서 선교하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우리들의 평생 일인 “기도하라, 공부하라, 선교하라”
셋을 다시 확인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10/29(화)[(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볼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루카 13,19)
주님!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에,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신 까닭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까닭에 형제들 앞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이, 제가 형제들 앞에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가족으로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 건물의 모퉁이돌이 됩니다. 이어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는 살아 있는 유기적 역동적 공동체이자,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자라나는, 지어지는 성전임을 배웁니다.
바오로 사도가 잘 요약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이수철 신부)
10/29(화)[(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제130-1일 기도(침묵 & 식후운동)
복음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루카 13,19)
주님!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에,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신 까닭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까닭에 형제들 앞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이, 제가 형제들 앞에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29일(화) 6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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