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3일 주일[(녹) 연중 제31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6,2-6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2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평생토록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 ◎
○ 주님은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시옵니다. 찬양하올 주님 불렀을 때, 저는 원수에게서 구원되었나이다. ◎
○ 주님은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 드높으시다. 주님은 당신 임금에게 큰 구원 베푸시고, 당신의 메시아에게 자애를 베푸신다. ◎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7,23-28
형제 여러분, 이전 계약의 23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수가 많았습니다.
24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25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목자이신 주님, 주님의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주님 아래 하나로 모이고, 길 잃은 이들을 찾아 나서도록 이끌어 주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만물의 주님, 세계의 힘 있는 나라들을 정의의 길로 이끌어 주시어,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공동선을 실현하며 주님의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3. 부부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 세상 부부들을 돌보아 주시어, 사랑으로 하나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소중히 받아들이며, 주님의 일에 협조자가 되고 주님 사랑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스승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를 굽어보시어, 위령 성월의 의미를 되새기고 깊이 묵상하며, 참신앙과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거룩한 제사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주님의 자비를 가득히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흩어진 인류를, 성자의 피와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한 가족이 되게 하시고, 삼위의 일치를 본받아 모인 백성이, 주님의 지혜와 사랑을 찬미하는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궁전이 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
<또는>
요한 6,5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일
레바논에 ‘UN 평화유지군’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평화유지군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군대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강자인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이스라엘은 평화유지군을 향해서 공격했고, 탱크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평화유지군이 부상했다고 합니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강력하게 경고했고, 평화유지군에게 속했던 나라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레바논에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군인들은 평화유지군에 남아서 끝까지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위험할지라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을지라도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유엔에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아일랜드 군인들이 레바논에 남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아일랜드도 영국으로부터 침략받았던 약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가정 방문 중에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은 3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가서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떠났고, 안타깝게도 청년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 후에 사망했습니다. 무엇이 청년을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미국에 있으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죽음의 덫이 놓여있는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갈매기의 꿈과 같은 겁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님도 이제는 슬픔을 딛고,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목숨을 바쳐서 이웃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들숨이 있어야 날숨이 있습니다. 한동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흙 속에 있는 씨앗은 물과 햇빛을 받아야 싹이 나옵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면역력도 강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남을 생각하며 감동할 수 있고, 자신의 애정을 특별한 존재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느낌은 사랑받는 것보다 한결 흐뭇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도, 역경도, 굶주림도, 죽음까지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의 애정을 남에게 투사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의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든, 받기 위해서든, 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거나 받는 존재에게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애정을 받고, 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 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 자연, 대지, 우주, 기, 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 버리곤 합니다. 2024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31주일: 나해
마르코 12,28-3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하신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 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카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 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 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해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하시는
분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 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 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3. 송영진 모세 신부
<연중 제31주일 강론>
(2024. 11. 3.)(마르 12,28ㄱㄷ-34)
<사랑은, 이미 받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1) 사랑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에’ 했었다는 말이나, ‘나중에’ 하겠다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전에는’ 사랑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 하는 것을 보고, 사랑하겠다.” 라고 말한다면,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조건을 걸고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나 목적이나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바로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특정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성당에 있는 동안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지금은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겠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도 없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뿐입니다.
지금 없는 사랑이 나중에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는 것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주님을 아쉬워하지 않고,
아예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 그때서야 잘못했다고 주님께 빌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미신과 다르지 않은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2) 사랑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대사제 카야파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 말은, “민족을 위해서 예수를 죽입시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그가 참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내 목숨을 바치겠소.”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을 바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남을 희생시킬 생각만 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도 같은데, 그가 정말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다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판관 11,31).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 서약 자체가 무효입니다.
사랑은, 목숨도 포함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아낌없이 내주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ㄱ).”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은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면서
당신의 아드님만 희생시키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사랑 실천이 ‘계명’으로, 또 ‘해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하여라.” 라는 강제 명령은 아닙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계명 실천도 아니고 사랑 실천도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큰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계명이어서 의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쁘고 행복하니까, 또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9-17).
형제를(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1요한 4,20).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2.토요일 ‘죽은 모든 이(All Souls)’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지혜4,7-15 로마6,3-9 마태25,1-13
슬기로운 삶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
11월 위령성월 첫날 11월1일 우리는 '모든 성인(All Saints)'의 대축일을 기념했고,
오늘은 '죽은 모든 이(All Souls)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교회는 종종 세례받은 모든 사람을 ‘성인의 통공(The Communion of Saints)’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사도신경중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가 이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성도(saints)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례받은 모든 구성원을 지칭합니다.
성인의 통공, 즉 성도의 교제는 세 그룹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성도라고 적절하게 불릴 수 있는 사람들,
즉 죽어서 지금은 영원토록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보며 관계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바로 어제 기념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천국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장소라기 보다는 관계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지상에 살고 있는, 바로 하느님과 궁극적인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교회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죽은 모든 이들입니다.
아직 하느님을 직접 만날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하느님의 현존에 들어가기 전에
여전히 어떤 정화과정을 거치는 분들로 우리는 이들을 연옥 영혼들이라 지칭하는데 그 과정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추측할 일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서 세 그룹이 이루는 친교를 성인들의 통공이라 하는 것이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세 그룹의 영혼들이 주님 안에서 만나는 미사전례시간입니다.
그러니 첫째 그룹의 천상성인들과 둘째 그룹의 지상영혼들인 우리가 ‘죽은 모든 이들’에 해당되는
세 번째 그룹인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바로 오늘에 적절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생미사와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가족과 좋은 친지들을 기억할 것이지만, 기억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한 이웃의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위령의 날은 우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기에
참 좋은 날이기도 합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병고요 늙음이요 죽음입니다.
대구시 남산동 대구교구청 내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진 라틴어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두 글귀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것을 가르칩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가르침,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 역시
대동소이합니다. 예전 무려 26년 전 써놨던 죽음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은 귀환이다, 해후다, 화해다, 구원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음성이다”<1998.11.10.>
언젠가 갑작스런 이런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은 삶의 반영입니다.
하루하루하루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본질적 깊이의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선물같은 하루를 기쁘게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순간의 방심으로 마음을 놓치면 오만가지 욕심에 사로잡힌다. 악마는 마음을 놓친 찰나에 들어온다.”<다산>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사사로운 욕심이 만 갈래로 일어나 불이 없어도 뜨거워지고,
얼음이 없어도 차가워진다.”<송나라 진덕수의 심경>
그러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의 삶의 질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이 얼마나 보다 어떻게 삶에 우리를 집중케 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영혼들을 돌보신다.”
늘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슬기로운 삶이 제일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영원히 기다릴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주님없이 막연히 깨어 준비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이의 모범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한밤중 외침소리에 환히 빛나는 영혼의 등불을 들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하늘나라 잔치를 상징하는 혼인잔치에 입장했지만, 후에 기름을 마련하여 돌아왔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좌절되었습니다.
바로 위 말씀을 임종어로 바치며 선종의 복된 죽음을 맞이한 성녀 젤투르다입니다.
문은 닫혔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문을 열어달라 호소하지만 주인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아주 냉엄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언제 죽음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뿐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언젠가의 주님과 반가운 만남의 죽음도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날마다 깨어 있다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매일미사전례 수행보다 선종의 죽음 준비에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아멘.
11/3(일) [(녹) 연중 제31주일], 되새김 구절
1. 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애정을 받고, 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 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 자연, 대지, 우주, 기, 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2024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조욱현 신부)
3. 내가 기쁘고 행복하니까, 또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9-17).
(송영진 신부)
4.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두 글귀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 것을 가르칩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가르침,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 역시
대동소이합니다. (이수철 신부)
11/3(일) [(녹) 연중 제31주일], 제135-5 기도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 입니다.
- 2024년 11월3일(일)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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