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4일 월요일[(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이 사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주님이 그를 세우시어,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 주게 하셨다.
본기도
복된 가롤로 주교에게 심어 주신 굳센 정신을
주님의 백성에게 부어 주시어
교회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저희도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참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2,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2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
○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치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
○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로마 12,3-13)와 복음(요한 10,11-1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목자의 열성과 뛰어난 덕행으로 복된 가롤로 주교를 들어 높이셨으니
그를 기념하여 주님 제대에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이 제사의 힘으로 저희도 복음을 실천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또는>
루카 12,36-37 참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깨어 있는 종!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저희에게 굳센 정신을 심어 주시어
저희가 복된 가롤로처럼 형제들을 충실히 섬기며
온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알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알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이 아름다움이 관련된 감정이나 개념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아름"은 "너그러움" 또는 "품격"을 의미하는 옛말로, 넓고 포용력이 있는 아름다움을 뜻했다고 합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아름답다"라는 말은 외형적, 내면적으로 훌륭하고 고귀한 것에 대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주로 자연경관, 사람의 외모, 마음씨 등 다양한 상황에서 긍정적이고 감동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름다움은 시각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고, 마음의 따뜻함이나 인격의 훌륭함과 같은 내적인 측면도 강조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아름답다"라는 말은 단순한 외형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과 본질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발전한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 많이 노력합니다. 성형, 피부, 보톡스, 화장품, 운동, 다이어트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는 방법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내면의 모습이 아름다웠던 사람, 지난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김민기 선생님의 ‘아름다운 사람’의 가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꽃, 별, 구름, 개여울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천진한 아이의 웃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 하루 일 마치고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 이상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겁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사제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의 글에 진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묵주 반지도, 시계도 끼거나, 차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묵주 반지나 시계를 선물해도 도로 주면서 대신 기도할 때, 시계를 볼 때 사제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손에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해 줄 때, 반지나 시계가 먼저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온전히 성체를 먼저 볼 수 있도록 시계나 반지를 착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신부님이 미사를 정성껏 집전하시니 좋습니다.’라고 말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부족함에도 미사를 정성껏 집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생의 마지막 미사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부모님의 장례미사라는 마음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합니다.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사제가 봉헌하는 미사는 비록 사제의 인품이나, 사제의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성사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성사가 된다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으므로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하객들에게 축의금을 받으면서 그 축의금을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계의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장애인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병자가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같이 식사합시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제 어린 시절 걸인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 다리 밑 같은 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 좀 주이소!’라고 외쳤습니다.
재수가 좋아 마음씨 좋은 마나님을 만나면 밥과 반찬을 좀 얻어서 대충 요기를 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기쁜 날은 혼례 날이나 회갑, 칠순 잔칫날이나 아니면 상이 난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잔치의 주인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오가는 행인들이나 걸인들에게도 넉넉한 한 상을 차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인들은 나름 달력을 하나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 잔칫날을 미리 메모해서
허기를 달래곤 했습니다.
식사 한끼 함께 나눈다는 것, 별것 아닌 듯 하지만 엄청난 위미를 지닙니다.
식사를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주로 가족들과 함께 합니다.
살짝 범위를 넓히면 친지들, 친구들, 동료들과 마음 편히 하는 것이 식사입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식사(食事)에는 아주 큰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잔치나 축제 때에는 ‘ㄷ’자 모양의 식탁이 준비되었고, 3면에는 의자가 놓였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으로는 종들이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포크나 나이프같은 식사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기에,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식사 전후 기도는 필수였습니다.
별도의 개인 접시는 준비되지 않고, 큰 그릇에 빵이나 요리가 담겨나오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스프나 국은 빵에 적셔 먹었습니다.
잔치집에서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큰 친밀함과 친교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잔치상에 이왕이면 귀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3~14절)
사실 과거 유다인들에게 있어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될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규정으로 인해,
당시 장애인들이 받았던 싱처와 고통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지체장애인들은 꿈란 공동체에 편입될 수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청각장애인들은 성전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바오로 사도께서 크게 분노하신 흔적이 서간 안에 남아있습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의 경우, 만찬 식탁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벌어졌습니다.
폭식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굶주린 채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코린토 전서 11장 20~22절)
잔치집 식탁에서 벌어지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직접 보신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초대를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사심없는 봉사를 실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심없는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라는 은혜로운 선물이 상급으로 부여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피안(彼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부단히 이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에 고정시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지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때가 오면 약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약함은 하느님의 때가 오면 그분의 힘에 의해 큰 권능으로 바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약하고 부족해보이는 사람들이 내적,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훨씬 부유한 능력자 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을 강하게 해주시고, 신앙의 빛은 그들에게 참 지혜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도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피정 센터가 가장 환대하고 극진히 모셔야 할 첫 번째 VIP 손님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어야 하나?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곧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초대의 대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
(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입니다.
~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의 기쁨> 198항)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3.연중 제31주일
신명6,2-6 히브7,23-28 마르12,28ㄱㄷ-34
사랑하라
“하느님 중심의 삶”
요즘 단풍으로 울긋불긋 타오르는 한국 만추(晩秋)의 가을은 어디나 아름다워 지상 천국같습니다.
가을 노년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 좋은 사랑 공부의 계절입니다.
10월 내내 저를 행복하게 한 두 시가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요즘 아름다운 자연에 에워싸여 있는 제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단풍 장엄하게 물든 가을 산야(山野)를
바라보며 수없이 외워보는 두 짧은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단풍 불타오르는 만추의 가을산앞에 서면 아름다운 사랑의 하느님앞에 서듯 참 행복을 느낍니다.
“가을엔
이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이쁘다
작은 풀잎들, 나뭇잎들, 들꽃들...
마침내
하늘 사랑으로 울긋불긋 타오르는 단풍되니
모두가 이쁘다
너도 이쁘고 나도 이쁘다”
하느님 사랑에 물들면 이웃사랑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운 인생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그 마음이 불타오르면 누구나 다 예쁩니다.
너도 이쁘고 나도 이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사랑이 답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비우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마음은 떠나 보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다산>
누구나의 무한한 마음을, 가슴을 채울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학문의 목적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 있다.”<맹자>
그렇습니다. 모든 공부의 목적은 잃어버린 사랑을, 하느님 사랑을 찾는데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도 하느님 사랑을 읽습니다.
11월 기도지향은 “아이를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부모나 배우자를 잃은 이들에게는
위로할 말이 있어도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들에게는 위로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또 위로의 성령으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위령의 날에는 아이들의 무덤들이 있는 로마의 “천사들의 정원’(Garden of Angels)”이라는
묘지에서 위령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앞서 모든 성인의 날 미사때는 “주님의 도움으로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일깨우도록 하자”는 요
지의 강론을 하셨는데, 거룩함 대신 사랑을 넣어 “사랑에 대한 열망을 일깨우도록 하자”해도
그대로 통하겠다 싶었습니다. 사랑할수록 거룩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평생사랑공부의 수행이 아름다운 인생을 만듭니다.
졸업이 없는 사랑의 인생학교요 죽어야 졸업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원은 평생사랑을 공부하는 평생 사랑의 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코 사랑에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은 구체적 사랑 방법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하느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어제 위령의 날 미사중 화답송 후렴,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노래하는 순간,
주님이 없으면 누가 무엇이 우리의 빛이 구원이 되겠는가 생각하니 정신 아찔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우리 삶의 중심 자리에 하느님이 아닌 누구를 모실 수 있겠는지요!
이래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도대체 사랑의 하느님이 없으면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런지요!
그러니 우선적인게 하느님 사랑입니다. 신명기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모세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모세의 권고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예수님은 이 말마디 안에 “정신을 다하고”한 대목이 추가됩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 난민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을 잃은,
사랑에 굶주린 영적난민들은 곳곳에 널려 있으며, 수도원에도 끊임없이 찾는 영적난민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 스스로 자초한 영적난민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정주하는
정주영성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둘째,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입니다.
역시 하느님 사랑에 이어 이웃 사랑도 명령이자 의무입니다.
예수님께 호의적인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지체없이 이웃사랑을 추가합니다.
613개 율법을 요약한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이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며 화답하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은 흡족해 하시며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오늘 이 자리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으로 검증되며
하느님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웃사랑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뿐이 없습니다.
우선순위로 구별할 수는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모든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빛나는, 영원한 모범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온맘으로 사랑했고 가난한 이웃을 온맘으로 사랑했던 사랑의 이중계명의 빛나는 모범이
예수님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사랑의 으뜸자리에 예수님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뿐이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표현하는 주님의 십자가이자, 수직의 하느님 사랑과 수평의 이웃사랑을 상징하는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요, 이 두 사랑이 만나는 중심 자리에 늘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넷째,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하라."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이중계명의 모범인 예수님을 사랑하며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합니다.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마르지 않는 샘이 바로 성체성사이며,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자 가톨릭교회의 미사인 성체성사라 저는 단언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의 집전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가 소개하는 대사제 예수님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자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그 사랑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미사를 사랑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입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대사제가 필요했습니다.
거룩하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깊고 아름다운, 우리를 위해 제대에서 끊임없이 희생제사 미사를 봉헌하는
사랑의 대사제 예수님이신지요! 희생제사와 밥상의 이중 역할을 하는 주님의 제대가 참 고맙고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대사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청탁을 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계시니,
바로 하느님 오른쪽에 영원히 좌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이웃을, 예수님을, 주님의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할 때 그대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요
이런 사랑을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아계시다!
나의 반석께서는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드높으시도다.”(시편18,47). 아멘.
11/4(월)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독서는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으므로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조재형 신부)
2.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3~14절)
지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때가 오면 약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약함은 하느님의 때가 오면 그분의 힘에 의해 큰 권능으로 바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약하고 부족해보이는 사람들이 내적,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훨씬 부유한 능력자 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을 강하게 해주시고, 신앙의 빛은 그들에게 참 지혜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표현하는 주님의 십자가이자, 수직의 하느님 사랑과 수평의 이웃사랑을 상징하는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요, 이 두 사랑이 만나는 중심 자리에 늘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수철 신부)
11/4(월)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제 136-6 기도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오늘의 말·샘 기도>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4일(월) 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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