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7일 목요일[(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본기도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3,3-8ㄱ
형제 여러분, 3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4 하기야 나에게도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5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
○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그분이 이루신 기적과 이적을, 그분 입으로 내리신 판결을 기억하여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거룩한 제사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주님의 자비를 가득히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
<또는>
요한 6,5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성장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힘들게 됩니다. 40년 전에 논문 쓸 때입니다. 당시는 원고지에 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고, 수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청년의 도움으로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글씨체도 예뻤고, 깔끔했습니다. 5년 후에 석사 논문을 쓸 때입니다. 대부분이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 다니는 주일학교 교사의 도움으로 삼보컴퓨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편집과 교정이 간편했습니다. 컴퓨터의 도움이 없었으면 논문 완성이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은 손으로 논문 쓰는 사람, 타자기로 논문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자료를 검색하고, 논문을 작성합니다. 전화기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집에 전화기가 없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전화기를 설치하려면 예치금도 많이 냈습니다. 처음 전화기가 집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5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전화번호가 기억납니다. 이동통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손전화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전입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스마트폰은 말 그대로 똑똑합니다. 전화기로 예약하고, 전화기로 은행 업무 보고, 전화기로 문자 보내고, 전화기로 검색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ChatGPT 4o’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입니다. 구글, 네이버, 다음이 검색엔진이라면 챗지피티는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대화를 통해서 질문에 응답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마치 개인비서처럼 저를 도와줍니다. 강론 준비할 때,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을 때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2025년 생성형 인공지능의 흐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기존의 대화를 통한 인공지능도 계속 발전할 거라고 합니다. 대화는 물론, 시청각을 통한 인공지능이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인공지능도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기업과 개인의 자문을 해 줄 거라고 합니다. 창의적인 작업, 예술,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 활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AI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도 심화할 거라고 합니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특정 업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맞춤형 AI 해결책이 더욱 많이 개발될 거라고 합니다. 데이터 처리가 클라우드에 의존하지 않고, 기기 자체에서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엣지 AI의 사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AI 기술의 성숙도와 함께 점차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AI가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런 흐름 역시 피할 수 없다면 배워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걸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 부활, 영원한 생명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런 체험을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복자 최일광(안드레아)는 종교를 배반하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저 하늘에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을 섬기며 살고, 저 하늘에서는 영원히 하느님을 섬길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백정이었던, 천민이었던 최일광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복자 최일광 안드레아에게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5,1-10
내가 이토록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받는 존재인데...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세리,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거룩함과 불결함을 항상 명확하게 구분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들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무시하고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천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땅에 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시고 자세를 낮추신 후,
세상 자상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시고,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실추된 품위와 가치를 되찾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습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 아흔아홉 마리 건강한 양들보다 한 마리 길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양치기, 등불을 밝히고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은전 한 닢을 찾는 부인의 스토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삶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가 이토록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받는 존재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성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분이야말로 내 남은 인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실 주님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간 종사해왔던 어둠의 직업을 뒤로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방에서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제일 앞쪽에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 초집중하며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복음 대목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방황과 타락의 길,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무가치한 존재나 실패작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구치소나 교도소에 한 번 다녀왔다고 인생 낙오자로 낙인찍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뜨거운 사랑과 한없는 자비를 통해 그들이 당당히 일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자극하시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는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믿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세리, 창녀,
죄인들은 비로소 지신의 비참한 처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성찰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죄인인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이해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시고, 어떻게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자
안간힘을 쓰시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그 주님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참다운 회개를 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은전’을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닢을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닢을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닢을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닢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은전을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기쁨을 형제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6.연중 제31주간 수요일 필리2,12-18 루카14,25-33
이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주님의 제자다운 삶”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늦가을 밤의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라는 권고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필리비서 귀한, 아름다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뜰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대로 살 수 있음은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 은총이 있어 이렇게 살 수 있음을 봅니다.
어떻게 살아야 이렇게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참으로 단호히 구체적 처방을 주십니다.
“누구든지”로 시작되는 말마디에서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참 제자의 삶의 원리임을 깨닫습니다.
열광하면서 큰 기대를 지니고 있는 군중들에게 꿈을 깨라는 듯 찬물을 끼얹는 듯한 제자직의 필수조건입니다.
값싼 은총도 없듯이 결코 값싼 제자직도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다음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 말에는 비교급이 없기에 이렇게 말합니다만,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은
‘목숨보다 나를 더 좋아하지 않으면’, ‘목숨을 나보다 하찮게 여기지 않으면’으로 바꿔읽어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사랑을 우선순위에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강조하는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지혜가 되고, 주님께 대한 이런 열렬한, 한결같은 사랑은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사실 이래야 친지들과 자신을 맹목적 눈먼 사랑이 아니라, 눈밝은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무사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바로 아가페 순수한 사랑으로
친지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나깨나 평생공부가 주님께 대한 사랑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은 이런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랑과 힘을 선물로 주십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민초들에게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연민이 넘치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참 엄격한 잣대를 적용합니다.
자발적 기쁨으로 제 책임의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를 온사랑으로 죽기까지 기꺼이 지고,
끝까지 따라야 비로소 당신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책임적 존재가 되어 당신의 제자답게 살아야 함을 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운명애(運命愛)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내가 내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합니까?
역시 이런 제 책임을 다하는 사랑, 제 운명에 대한 사랑도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기인힘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은 이런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랑과 힘을 선물로 주십니다.
주님은 여기에 둘의 예화를 추가합니다.
당신 추종은 1회성의 이벤트도 아니고 값싼 낭만도 아니기에 과연 끝까지 주님을 추종할 수 있을런지
냉철히 그 성소를 식별하라는 취지에서 망대와 전쟁 이중비유의 예화를 드십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모하게 값싼 감상으로 주님을 따랐다가 유혹에 빠져 도중하차하는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전 성철 큰 스님의 인터뷰 기사도 생각납니다.
“백련암은 어떤 곳입니까?”
“세상을 속이는 곳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화입니다.
값싼 낭만이나 감상에 결코 착각하거나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도원 역시 깨어 살지 않으면 그대로 세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사실 당대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버림과 따름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힘들더라도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무소유의 정신은, 무집착의 이탈의 정신은,
무욕의 정신은 너무나 절대적입니다.
버림과 따름 역시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여정임을 봅니다.
저의 경우는 모든 보장된 것을 다 내려놓고 수도원에 들어왔기에 마음 해이해지거나
내적으로 무너지려는 순간, “내가 이렇게 살려고 늦깎이로 수도원에 왔나?”하며
심기일전 마음을 다잡고 살아왔음도 솔직한 고백입니다.
예전 권정생 동화작가가 어느 스님의 고백을 듣던중 “그렇게 살면서 죄를 지을 바에야 절에서 나오라” 했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한두번으로 끝나는 제자직의 여정이 아니라. 죽기까지 계속될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해야 하고, 한결같이 제 십자가를 져야하고,
한결같이 버림과 따름에 항구해야 하는 평생여정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주님의 제자직 수행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11/7(목) [(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의 비유 말씀, 아흔아홉 마리 건강한 양들보다 한 마리 길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양치기, 등불을 밝히고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은전 한 닢을 찾는 부인의 스토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이해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시고, 어떻게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자
안간힘을 쓰시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그 주님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참다운 회개를 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예전 성철 큰 스님의 인터뷰 기사도 생각납니다.
“백련암은 어떤 곳입니까?”
“세상을 속이는 곳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화입니다.
값싼 낭만이나 감상에 결코 착각하거나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도원 역시 깨어 살지 않으면 그대로 세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수철 신부)
11/7(목) [(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제 139-9 기도
복음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 2024년 11월7일(목) 6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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