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6일 수요일[(녹) 연중 제31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본기도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2,12-18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늘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처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14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15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7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18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거룩한 제사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주님의 자비를 가득히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
<또는>
요한 6,5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사제관에 들어오려면 단지를 통과해야 하고, 단지에는 문이 있습니다. 관리 사무소에서 3달에 한 번씩 비밀번호를 바꾸고 있습니다. 10월 중순에 비밀번호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예전의 비밀번호를 눌렀습니다. 당연히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비밀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비밀번호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 주변을 보면 ‘비밀번호’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입니다. 컴퓨터를 시작할 때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요즘은 지문을 등록하기도 합니다. 은행 계좌에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은행에서는 복잡한 비밀번호를 요구합니다. 대문자, 숫자, 영문자, 특수기호를 조합해서 8자리 이상으로 만들라고 하기도 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아마존, 넷플릭스, 유튜브에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메일에도 당연히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의 문을 지키는 겁니다. 아무나 나의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정보를 보호하는 겁니다. 나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겁니다.
예전에 서울의 밤거리를 밝히는 것 중에 ‘붉은빛의 네온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교회에서 십자가는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의 죄를 구속하고 구원을 이루신 사건을 상징합니다. 이 상징은 신앙의 중심에 위치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구속과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인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 희생을 통해 인류는 죄에서 구속되었다고 믿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구절에서도 나타납니다. 둘째, 구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구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지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 사랑과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며, 이는 모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으로 초대하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넷째, 승리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부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과 영광을 상징하는 표식이 된 것입니다. 다섯째, 희생적 사랑과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길이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자가는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 희생적 사랑과 헌신의 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도구가 아니라, 구속, 구원, 사랑, 승리, 희생적 헌신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참된 삶의 자세를 이야기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겸손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중요한 것보다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희생과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고, 기적을 행하였으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내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 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4,25-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이 말씀은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이다.
박해 때에도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십자가였고, 우리 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기 뜻을 철저하게 끊는 것이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31절)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큰 뜻을 품었으면 결실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
돌 하나로는 탑을 완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계명 하나 지킨다고 온전한 성숙을 이룰 수는 없다.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1코린 3,12)을 지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하다.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시편 119,127)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3. 이영근신부
2024년 나해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
오늘날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것을 무엇일까요?
마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케케묵은 말이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지 그들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떨어진 것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종 권위가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의 권위’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된 것일까요?
혹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이윤 추구가 차지한 까닭이 아닐까요?
가치관이 변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대체 어떤 이를 스승을 모시고 싶어 할까요?
또한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고 있을까요?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는 할까요?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방편을 배우고자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대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앞세워’ 배우고자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 데 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가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5.연중 제31주간 화요일 필리2,5-11 루카14,15-24
비움의 여정
"온갖 어려움을 비움의 계기로 삼읍시다"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ㄱ)
우리 말의 섬세하고 깊고 아름다움에 감동합니다.
비움, 섬김, 배움이 제가 참 좋아하는 그런 말입니다.
비우다, 배우다, 섬기다, 영성생활에 꼭 필요한 말마디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비움의 여정, 일상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비움의 계기로 삼읍시다”입니다.
비움대신 배움을, 섬김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수도원 게시판에 붙은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 2024,11,21-2025.10.28.”팜프렛의 “평화를 향한 길 위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말마디가 좋습니다.
비움의 여정을 따르는 이들은 “평화의 길 위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이기도 합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이들이 평화의 여정, 비움의 여정중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제가 10년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시 최고의 수확은 삶의 여정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30일전후로 끝나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우리의 전 삶의 여정을 압축하고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순례여정중 참 많이 강조해온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의 네 요소로 전 삶의 여정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어 강조하는 것이 내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느냐의 확인입니다.
10여년 동안 강론에서나 강의에서 참 많이 강조해온 내용들은 제 남은 생애동안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시점(時點)에 대한 확인이 깨어 거품이나 환상없이 본질적 깊이의 참삶의 선물 인생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피정오는 대부분 사람들이 인생 오후 3-4시, 인생 가을에 걸쳐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움이란, 비움의 여정이란 말마디도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비움의 겸손, 비움의 믿음, 비움의 사랑, 비움의 순종, 비움의 침묵등 비움 예찬에는 끝이 없습니다.
비움의 여정은 겸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그대로 놓아두면 짐이 되고 상처가 되겠지만
비움이나 겸손을 통한 치유와 더불어 영적성장의 계기로 삼는 다면 참 지혜롭고 풍요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의 대가와 달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평생 비움의 여정에, 겸손의 여정에 충실할 때 주님을 닮아
성인다운 참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며, 바로 이것이 영성생활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이런 주님의 비움과 겸손, 순종을 집약한 오늘 제1독서 필리피서 그리스도 찬가,
비움(kenosis;케노시스) 찬가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은 매주 토요일 저녁성무일도때 마다
이 비움 찬가(필리2,6-11)를 바칩니다.
참 하느님이자 참 사람인 예수님의 정체를 잘 보여주는, 우리 영성생활의 핵심을 담고 있는
아마 신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가에 속할 것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품위의 우리 인간인지 깨닫게 하는 참 고마운 복음입니다.
인간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의 신비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보다 비움의 대가이자 달인인 그리스도 예수님께 정통해 있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을 닮아 비움의 여정에 시종여일 한결같았던 비움의 대가요 달인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성화의 여정 강론 주제도 오늘의 비움의 여정과 그대로 통합니다.
그러니 비움의 여정은 성화의 여정이자 부단히 자기에서 벗어나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가 되어가는
자아초월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권고에 이어지는 전반부 말씀이 예수님의 생애는 물론 우리가 따를 비움의 여정에 대한 참 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주님의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비움의 여정이 있기에 파스카의 영광스런 부활과 더불어
영적승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찬가 전반부입니다.
겸손과 비움, 순종의 사랑을 통해 참 사람이자 참 하느님이 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참사람의 원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초대를 사양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그대로 세상 탐욕에 가득한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하늘 나라 큰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신을 비울 절호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대로 오늘날 비워야 할 비움의 여정 대신 채움에 중독된 채움의 여정을 사는 현대인들을 닮았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빈자리는 여전히 남아있고 결국은 텅빈충만이 아닌 텅빈허무의 인생이 될 사람들입니다.
세상사에 채움에 중독된 사람들의 치유와 구원에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는 길 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면에서 하늘 나라 잔치의 예표인 날마다의 미사잔치 초대에의 참여는 비움의 여정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 지요! 삶의 우선순위가 자신을 비우고 천상 미사잔치에 참여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참으로 내면이 비워져 있을 이런 불우한 이들을 하늘나라 잔치에 입장시키라는 것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하는 하느님의 갈망에서 그분의 한량없는 구원의 사랑을 배웁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 역시 욕심에 중독되어 초대를 사양한 현대인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냉담을 풀고
미사잔치의 초대에 응하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세상 탐욕을 비우고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을 길이길이 의지하라.
주 하느님은 영원하신 바위이시다."(이사26,4). 아멘.
11/6(수) [(녹)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조재형 신부)
2.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이 말씀은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 (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참으로 내면이 비워져 있을 이런 불우한 이들을 하늘나라 잔치에 입장시키라는 것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하는 하느님의 갈망에서 그분의 한량없는 구원의 사랑을 배웁니다.
(이수철 신부)
11/6(수) [(녹)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제 138-8 기도
복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늘의 말·샘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6일(수) 7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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