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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1월 8일 금요일[(녹) 연중 제31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1월 8일 금요일[(녹) 연중 제31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8(37),22-23 참조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는 구세주를 고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2(121),1-2.3-4ㄱㄴ.4ㄷㄹ-5(◎ 1 참조)
◎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
○ 예루살렘은 튼튼한 도성, 견고하게 세워졌네. 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 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
○ 이스라엘의 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네. 그곳에 심판의 왕좌,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

복음 환호송

1요한 2,5 참조
◎ 알렐루야.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
◎ 알렐루야.

복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거룩한 제사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주님의 자비를 가득히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6(15),11 참조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
<또는>
요한 6,5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현대인들과 고대인들은 역사(歷史)’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역사는 사건(Fact)에 대한 기록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역사를 배울 때, 연도와 사건을 주로 배웠습니다. 조선의 건국, 한글 창제, 임진왜란, 국권피탈과 같은 사건을 연도와 함께 외웠습니다. 그 뒤로는 숫자를 먼저 외우곤 했습니다. 삼일절 만세, 팔일오 광복, 사삼 제주 항쟁, 육이오 전쟁, 사일구 혁명, 오일륙 군사 쿠데타, 오일팔 민주화 운동, 육십 시민 항쟁, 육이구 선언과 같은 사건과 날짜를 외우곤 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에게 역사는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교회의 전례도 사실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12 25)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춘분 이후 첫 보름달 다음 일요일)을 축으로 전례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에 4주 동안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할 전에 40일 동안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회개하는 사순시기를 지냅니다.

 

고대인들에게 어떤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fact)보다 그 사건에 포함된 진실(truth)이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실이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였는가의 육하원칙에 따라서 정확하게 진술하거나 기록하는 것을 말하며, 진실이란 사건의 의미와 그 파급 효과를 말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역사 기록은 정치나 종교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했고, 따라서 과거에 대한 편견 없는 공정한 평가란 그들의 역사에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역사 기록은 성경의 다른 기록들처럼 저자의 신학 사상과 메시지를 선포하고 전달하는데 이용됩니다. 구약성서의 역사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기 위해 이민족들의 손에 넘깁니다. 어느 정도 벌이 충족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백성은 다시 평화를 찾습니다. 지도자가 죽으면 백성은 또다시 우상 숭배에 빠져들어 똑같은 역사를 반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의 짧은 삶이 아니라,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작은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기도입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를 자주 하면 기도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차를 타면 간단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안전 운전에 큰 도움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둘째, 선행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도 좋지만, 보답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을 하느님께서는 더 좋아하십니다. 셋째, 성사 생활입니다. 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말씀의 양식과 성체를 함께 받게 됩니다. 혼인성사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커다란 축복입니다. 내 마음에 쌓인 죄와 분노, 미움과 시기들은 고백성사를 통해서 버려야 합니다.

 

기도와 선행 그리고 성사 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나 못 하므로 하느님께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나의 신앙도 키워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초기 교회 이방인들의 사도요 최고 목자였던 바오로 사도의 삶과 신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충실했으며,

모범적이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첫 번째 독서 필리피서는 그런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심 이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는 매사에 다른 제자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내걸며 복음 선포에 매진했지만, 자신의 의식주는 스스로 일을 해서 해결했습니다.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동시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목자로서 교우들에게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그의 섬세한 배려심과 당당함이 돋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선포하는 말씀과

그의 구체적인 삶의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생활은 조금도 따르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했다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콧방귀를 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도 언행일치되는 그의 강론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서한 한 구절 구절에는 당당함이 잘 묻어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필리 3,17)

 

사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구절을 묵상해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는 구체적인 삶이 그랬기 때문에, 그리도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당당함 뿐인가요? 바오로 사도가 초세기 이방 교회의 지도자로서 얼마나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했는지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교우들을 대하는 사목자로서의 자세가 세상에 둘도 없이 자상한 친 아버지 그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존재 자신의 기쁨이요 화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현을 들은 초세기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진심과 사랑이 가득 담긴 그런 표현들은 힘겨웠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내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마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하루가 되길 청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루카 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

(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나,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7.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필리3,3-8ㄱ 루카15,1-10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자유”

 

“거룩하신 그 이름을 자랑하고, 

 주를 찾는 마음은 즐거워하라.

 주님 생각하라, 그 권능을 생각하라, 

 언제나 그 얼굴을 그리워하라.”(시편105,3-4)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읽은 글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희망은 모든 신자의 선물이자 의무이다.”

 

모든 신자가 희망의 선물을 지니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여정이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여정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이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의 도움이 되기위해 오신다.”

기도와 성령은 함께 갑니다. 기도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모두가 평범한 말마디이지만 마음에 새롭게 와 닿으며, 우리의 깨달음의 여정에 일조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 자신만큼은 나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해쳐서는 안된다.”<다산>

“스스로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 포기한 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맹자>

 

새삼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임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포기한 자포자기 절망의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제일입니다.

평범하나 지극히 지혜롭고 용기있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 또한 깨달음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말마디들입니다.

 

어제의 느낌을 잊지 못합니다.

은은한 향기로 남아있는 사람이, 만남이나 글이 있는가 하면

상처나 기분 얹짢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만남이나 글도 있습니다.

 

어제 읽은 글이 그러했습니다.

글은 사람이라 했는데 웬지 교만하고 건방지다 싶었고 느낌도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전 독료한 책은 친지들에게 품격있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향기로운 책이라

적극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글은, 말은 사람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문자향 서권기(文子香 書卷氣)”라는 말마디에 적극 공감합니다.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쓴 글에서는 문자의 향기가 느껴지고 마주 대하면 책의 기운이 풍깁니다.

정말 이런 책이 깨달음을 주는, 길이 보관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런 고전(古典)의 책같은 사람이라면 늘 만나도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문자향 서권기의 정점에 있는 책이 바로 성서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읽으며 묵상하는 순간 “아,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는 진정 깨달음의 사람,

각자(覺者)구나!”하는 깨달음이 마음을 쳤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고 자유롭게 합니다.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요, 깨달음의 자유입니다.

“아, 그렇구나!” 깨달음의 지혜가 참으로 우리를 날로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나 글이 말이 좋은 사람이자 글이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숱한 눈이 없는 지식들보다는 보는 눈을 주는 깨달음의 지혜가 백배 낫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여정은 개안의 여정이 됩니다.

깨달음의 사람을 각자(覺者)라 부르는데 깨달을 “각覺”자안에는 볼 “견(見)” 자가 들어 있어

깨달음과 보는 눈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실로 영적성장은 깨달음의 여정, 개안의 여정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지혜, 자유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제가 참 많이 나눈 무지의 병의 치유에도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단히 추구할 바 깨달음의 은총이요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무지로부터 벗어나

날로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무지의 사람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깨달음의 예수님과는

참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군.”

 

투덜거리는 자기중심적 율법주의적 폐쇠적 사고로 꽉 막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참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신학 지식은 많았을지 몰라도 무지에 눈먼, 참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지혜와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님의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를 통해 빛나는

예수님의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이 진정 복음입니다.

두 예화의 결론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의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줍니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다음과 같은 확신의 고백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아무리 공부 많이 하여 지식이 많다하여 이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말그대로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자유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지식이 차고 넘쳐도 깨달음의 눈이 없으면 모두가 무거운 짐의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뿐이겠습니다. 

 

바로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오늘 필립비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야 말로 예수님에 버금가는 각자임을 봅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 깨달음의 기쁨과 자유로 충만한 바오로의 고백이 덩달아 우리를 기쁘게,

자유롭게 하고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대한 깨달음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함을 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중심에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깨달음의 경지를 누리지 못하고 무지의 어둠속에서,

온갖 잡다한 쓰레기 더미속에서 무거운 짐에 눌려 힘겹게 살아가는지요! 말그대로 살줄 몰라 불행이요

살줄 알면 행복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께 청해야 할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 자유의 은총입니다.

오늘따라 마음에 새롭게 와닿는 주님의 초대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멘.


11/8(금) [(녹)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의 짧은 삶이 아니라,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작은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조재형 신부)

 

2.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존재 자신의 기쁨이요 화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현을 들은 초세기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나,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이수철 신부)

 

11/8(금) [(녹)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제 140-10 기도

 

복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오늘의 말·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나,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8일(금) 7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