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16일 토요일[(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녀 제르트루다 동정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본기도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요한 3서의 말씀입니다.5-8
사랑하는 가이오스,
5 그대는 형제들을 위하여, 특히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 다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6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맞갖도록 그대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7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로,
이교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8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
○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
○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신비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또는>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인류의 역사는 ‘에너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초기 인류는 자연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삶을 이어갔습니다. 태양, 불, 물 등의 자연 에너지를 통해 생존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런 원시 에너지 사용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였지만, 인류 발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에너지 사용이 업그레이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석탄과 석유의 대규모 사용은 인류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화석 연료는 공업화와 도시화를 촉진했고, 이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환경 오염과 에너지 자원 고갈이라는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등장한 핵에너지는 전력을 생산하는 강력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원자력의 위험성과 윤리적 고민을 동반했으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 태양열, 풍력, 수력 등 재생 에너지에 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에너지를 바라보는 철학과 윤리적 태도를 재정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한테서 왔습니다. 성경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빛은 에너지의 근원이자, 창조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모든 에너지는 신이 창조한 세상의 일부로, 인간이 받은 선물이자 자원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에너지를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은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라"라는 사명을 받고 창조 세계의 청지기 역할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에너지를 사용하는 데도 책임감과 절제, 지혜를 요구받습니다.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는 청지기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신학적 관점에서 이는 창조의 돌봄과 사랑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부유한 국가들이 과도하게 에너지를 소비하는 반면, 빈곤한 국가들은 최소한의 에너지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배치되며, 에너지 자원도 이웃을 위한 나눔과 배려를 통해 관리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전합니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것은 지구와 미래 세대를 위해 새 창조를 향한 책임 있는 준비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이는 생태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는 사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종종 ‘불’로 상징되며, 이는 하느님의 능력과 힘을 의미합니다.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연관 지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능력이 창조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결국 에너지를 관리하고 사용하는 방식은 신앙인으로서 창조의 청지기 역할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에너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주는 에너지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에너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많이 배웠던 율법 학자도,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던 사제도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알아도, 제사를 지내도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없으면 강도당한 이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형제들을 위하여, 특히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 다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난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을 베풀면 향기가 만리를 간다고 합니다. 2024년의 달력도 이제 1장 남았습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으로 남은 1장의 달력을 가득 채우면 좋겠습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8,1-8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해도 해도 어려운 것이 기도인 것 같습니다.
때로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쏭달쏭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그렇게 어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셨는지를 유심히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 마디 그대로,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고 묵상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적당하게가 아니라 집요하게 졸라대는 과부처럼 하느님이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무 괴롭고 귀찮아서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뉘앙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군데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기도 지향, 미사 지향의 대부분은 가화만사성, 명문대 합격, 좋은 직장 취직,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
승승장구, 무병장수... 등등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한계와 결핍 투성이인 한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다보니,
자연스레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세상 든든했던 그, 영원히 나를 지켜줄 것으로 확신했던 그가 점점 약해지고 작아집니다.
결국 나를 홀로 두고 먼저 떠나갑니다.
유일한 희망이요 미래라고 여겼던 자녀가 갈팡질팡 흔들립니다.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쇠잔해진 내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바치는 기도 지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나이들어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하겠습니까? 집요한 과부가 청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너무나 사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원 기도가 내 위주의 청을 넘어 주님 마음에 드는 청원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휘황찬란한 대상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우리네 인생도 한 순간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불로장생, 불사불멸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집요하게 청해야 하는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머무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으로 큰 은총이 있습니다.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핍과 모순 투성이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신앙 여정의 충실한 동반자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나를 인도하게 계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전삼용 요셉 신부
2021년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루카 18,1-8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은 맞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더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마지막 때가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 땅이 멸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이 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곳에 ‘독수리’가 날아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이 사라지면 시체가 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모이듯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종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종교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기도가 다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에크디케오’의 뜻은 ‘변호하다’, ‘보복하다’,
‘벌하다’, ‘복수하다’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19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수하다”로 해석했습니다.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적대자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분명 ‘복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적대자에게 복수를 실현하여 나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토록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대상인 ‘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혹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교만과 돈’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다른 사람보다 정의롭다고 여겨 타인을 깔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적, 혹은 원수라 여기는 ‘삼구’(三仇)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구에게 벌을 내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삼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삼구 교리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마키나’(2015)는 천재 과학자 네이든이 자신의 회사 직원 칼렙을 자기 연구실에 불러
자신이 만든 A.I. 로봇 에이바를 실험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네이든은 칼렙이 애정에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가 그를 유혹해
탈출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칼렙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인공지능 로봇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인 칼렙이 이용당하여
인간인 자신보다 예쁜 로봇을 더 믿고 더 애정을 두는 것을 보며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로봇에게 유혹당하게 만들고 인간보다 그것을 더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그러나 칼렙은 네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습니다.
이미 로봇에게 유혹을 당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안 네이든은 실험을 마치고
칼렙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에이바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미 칼렙이 문이 열리도록 프로그램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이것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자신이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릅니다.
물론 그 로봇은 자신을 도와준 칼렙도 가둬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립니다.
칼렙이 진짜 누가 적인지 모르게 에이바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실험을 했던
네이든의 운명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지금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비자 교리를 몇 달 동안 받아도 내가 누구와 싸우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지향이 오히려 싸워야 하는 욕구를 강화하는 것들이 됩니다.
세속적인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네이든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자신을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한 것을 잊고
오히려 자기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삼구 교리에 무관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로마 교리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존 교리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는 이 교리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179문: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
“230문: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
견진은 성령을 청하는 성사이고 기도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성령을 얻고 성령으로 삼구와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가 명확했던 것입니다.
또 김대건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한 마디막 편지에서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우리를 계속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명예와 재산과 쾌락’(마귀-세속-육신)과 같은 다른 애착을 둠으로써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되고 마니까요. …”(「자서전」, 제25장, 21항 ).
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즐거움,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나온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명확히는 아니지만, 세 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네이든이 칼렙과 에이바에게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자아와 삼구의 존재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리서에서 삼구를 빼면 벌어질 일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계시되시듯,
삼구를 통해 사탄이 풀려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15.연중 제32주간 금요일 2요한4-9 루카17,26-37
믿음의 여정
<늘 깨어 준비하며 새로 시작하는 삶>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름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
옛 어른의 지혜를 나눕니다.
“당장의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라.”<다산>
진리와 사랑에 대한 청정욕(淸淨慾)은 언제든 좋습니다.
어제 기도에 둘을 추가했습니다.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길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진리가 되게 하소서.’
이런 거룩한 욕망은 언제든 주님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군자는 도를 얻으면 즐거워하고, 소인은 욕망을 얻으면 즐거워한다.”<예기>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는 논어에 나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믿는 자들은 진리를 깨달아 알 때 기뻐합니다.
진리는 영원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새롭습니다.
무려 여기서 27년전 ‘하루’ 란 시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높이 깨어있던 불암산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맨 먼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한다
떠오르는 해를 안고 하루를 시작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친다”<1997.12.2.>
이런 거룩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하루의 삶을 희구하며 한결같은 산을 닮고자 하는
여기 정주수도자들입니다.
더 하나의 ‘소망’이란 시도 나누고 싶습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색 구름 사이에서
쏟아지는 햇빛
온유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수 있다면 좋겠다”<1997,12,2>
어제 아랫집 수녀원 87세 고령의 수녀님과 나눈 덕담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어려운 내적처지에도 한결같이 하루하루 아름답게 가을 단풍처럼 사시는 분입니다.
아름다운 만추의 단풍을 배경한 집무실앞 제 사진을 보내 드렸습니다.
“와 신부님, 멋지십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계절이 서둘러 떠나보내기가 아쉽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을 단풍이 흡사 수녀님 노년의 아름다움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만추의 단풍처럼 아름다운 가을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하겠는지요!
14년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얻은 ‘삶의 여정’에 대한 큰 깨달음입니다.
우리 삶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또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가에 대한 확인 점검입니다.
저로 하면 오후 4:30분, 계절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나 많이 인용하여 나눴는지 모릅니다.
이런 확인 점검이 오직 한번뿐인 선물인생을 깨어 하루하루 날마다 낭비함이 없이 거품이나 허영,
환상이 걷힌 맑고 투명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종말교훈이 더욱 이런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사람이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전개 상황이 심히 우려됩니다.
진리를 까맣게 잊고 욕망 충족의 삶을 살다가 물과 불로 멸망한 경우입니다.
물과 불 다음은 무엇일지 정말 깨어 종말론적 무욕의 초연한 삶을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과거에 연연하여 집착하여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집착에서 벗어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지혜로운 종말론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더욱 우리를 깨어 살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외관상 똑같은 환경이었지만 내적 삶의 태도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아마도 깨어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천국의 내적 삶을 살았던 자는 구원이지만
그렇지 못했던 자는 구원에서 탈락됨을 봅니다.
새삼 장소가 아닌 내적 삶의 자세가 구원의 관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재1독서 요한 2서는 참 짧고 오늘로서 끝나지만 종말론적 삶을 살려는 자들에게는 좋은 도움이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가 사랑이요 사랑이 진리입니다.
비상한 삶이 아니라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사랑할 때
진리와 사랑이 하나되는 삶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2요한3).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11/16(토)[(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많이 배웠던 율법 학자도,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던 사제도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알아도, 제사를 지내도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없으면 강도당한 이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집요한 과부가 청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너무나 사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원 기도가 내 위주의 청을 넘어 주님 마음에 드는 청원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집요하게 청해야 하는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머무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으로 큰 은총이 있습니다.
(양승국 신부)
3.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전삼용 신부)
4. 오늘 재1독서 요한 2서는 참 짧고 오늘로서 끝나지만 종말론적 삶을 살려는 자들에게는 좋은 도움이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가 사랑이요 사랑이 진리입니다.
비상한 삶이 아니라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사랑할 때
진리와 사랑이 하나되는 삶이겠습니다. (이수철 신부)
11/16(토)[(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제 148-18 기도
복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복음의 집요한 과부가 청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너무나 사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원 기도가 내 위주의 청을 넘어 주님 마음에 드는 청원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집요하게 청해야 하는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머무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으로 큰 은총이 있습니다.
아멘.
- 2024년 11월16일(토) 5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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