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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1월 14일 목요일[(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1월 14일 목요일[(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88(87),3 참조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여 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레몬서 말씀입니다.7-20
사랑하는 그대여, 7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대 덕분에 성도들이 마음에 생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큰 확신을 가지고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할 수도 있지만,
9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18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을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19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빚을 진 덕분에
지금의 그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20 그렇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6(145),6ㄷ-7.8-9ㄱ.9ㄴㄷ-10ㄱㄴ(◎ 5ㄱ)
◎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는 이!
○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
○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
○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5,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신비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1-2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또는>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루카 17,20-25

 

어째서 외적 행복이 늘어날수록 내적 행복이 줄어들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다윗의 나라로 착각하였습니다.

외적인 행복의 나라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외적인 행복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뤄지는

의로움과 마음의 기쁨과 평화라고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느끼는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낀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성령으로 느끼는 행복을 맛보면 세상의 행복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고는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멸시의 고통만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외적인 행복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반비례하는 것일까요? 마음의 행복도 느끼며 육체의 행복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두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사랑’ 때문에 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연인이 상대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해준다고 하더라도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상대의 진심 때문에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연인이 주는 행복을 완전하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이성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완전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영화 ‘위대한 캐츠비’에서 캐츠비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데이지는 다른 행복을 끊을 줄 몰랐습니다.

캐츠비는 어렸을 때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데이지는 돈과 명예도 좋아했습니다.

이것을 안 캐츠비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데이지는 이미 돈과 명예는 있지만,

바람둥이인 톰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톰은 자기 적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윤리의식이

전혀 없는 인물이고 데이지도 어느 정도 이것을 압니다.

 

캐츠비는 데이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가지고 있는 허울뿐인 행복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빼앗는다고 여기는 자기 남편의 내연녀를 차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캐츠비는 그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데이지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랑에 온전히 몸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가 이와 같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행복을 신에게 맡겼습니다.

신이 전능하고 완전한 사랑임을 알기에 그는 유일하게 가진 두레박도 개가 입으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버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했지만,

여전히 공허하였습니다. 자기를 믿으니 그만큼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

신에게 사랑받는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파홈은 욕심을 부리다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그 모든 땅을 다 주겠다는 추장의 말에

그는 돌아올 시간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그 자리에 2미터도 안 되는 땅에 묻혔습니다.

자기를 믿으면 그만큼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시작은 선악과, 곧 십일조를 바치므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을 끊는 만큼 더 완전한 사랑이 주는 행복을 누리게 됨을 의심하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 목요일

복음루카 17,20-2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갑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간절히 입국을 원하는 하느님 나라, 다시 말해서 천국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세상 그 너머의 또 다른 세상,

하느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현존 속에 더이상 고통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행복한 세상...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으며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어찌 보면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그와 관련된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물론 이 세상은 때로 정의보다 불의가 판을 치고 이해하지 못할 고통의 파도로 넘실거리는

모순투성이의 세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방방곡곡에 하느님께서 친히 현존하심을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어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며, 너그러운 마음,

넉넉한 미소 짓고 살아간다면, 그런 모습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내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들도 소중히 여기며

정성껏 차려놓은 식탁에 힘겹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면 그런 행위는

곧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32주 목요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 공간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13.연중 제32주간 수요일                                                                  티토3,1-7 루카17,11-19

 

                                         온전한 치유의 구원; 찬양과 감사의 믿음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요셉수도원 정문 입구 거대한 돌판에는 베네딕도 수도회 모토,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성규57,9)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모토입니다.

 

사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모토에 한결같이 충실함이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이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보시기 참 좋은 삶이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이요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 삶의

궁극 목표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 여정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일어난 나병

열 사람을 고쳐주신 일화입니다.

주변 모두에 활짝 열려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병환자의 치유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이 무엇인가 배우게 됩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과 예수님의 감격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7,13)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 겸손히 바칠 수 있는 참 좋은 기도가 자비송입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바칠 유일한 기도도 이 기도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의 치유의 구원을 바라며 이 자비송과 더불어 미사전례를 시작합니다.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도 여기서 유래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역시 우리가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기에 참 좋은 기도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한 이들은 즉시 몸이 깨끗해지는 치유를 체험합니다.

주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말씀의 능력도 발휘됨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치유에 따른 반응입니다.

참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열중 하나였고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습니다.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늘 호의적이었습니다.

 

다음 장면의 묘사가 그림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앞서 치유받은 아홉은 반쪽의 육신의 치유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겸손히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비로소 온전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소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생활화할 때 영육의 전인적 건강의 참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평생 날마다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됩니다.

회개와 더불어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게 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예수님의 눈에는 얼마나 놀랍고 고맙고 기특했겠는지요!

과연 나는 ‘아홉과 하나’중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은 찬양과 감사의 삶으로 요약됨을 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부단히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이

영육으로 건강한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알레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끝나는 삶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는지요!

찬미와 감사의 영혼의 양날개로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겠는지요! 

예수님의 결정적 구원 선언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평생 화두처럼 늘 지니고 살아야 할 참 은혜로운 말마디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되는 파스카의 구원의 삶을 상징합니다.

흡사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영적나병을 치유받고 파견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일상에서 넘어져 좌절해 있을 때 이 말씀 연상하여 즉시 일어나 힘차게 믿음의 구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의 구원이자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오늘 티토서의 바오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3;2,6-7). 아멘.


11/14(목)[(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고는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멸시의 고통만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외적인 행복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반비례하는 것일까요?

마음의 행복도 느끼며 육체의 행복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두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삼용 신부)

 

2.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어도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며, 너그러운 마음,

넉넉한 미소 짓고 살아간다면, 그런 모습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내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들도 소중히 여기며

정성껏 차려놓은 식탁에 힘겹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면 그런 행위는

곧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예수님의 눈에는 얼마나 놀랍고 고맙고 기특했겠는지요!

과연 나는 ‘아홉과 하나’중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은 찬양과 감사의 삶으로 요약됨을 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부단히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이

영육으로 건강한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알레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끝나는 삶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는지요!

찬미와 감사의 영혼의 양날개로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겠는지요! 

예수님의 결정적 구원 선언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이수철 신부)

 

11/14(목)[(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제 146-16 기도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14일(목) 4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