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1월 15일 금요일[(녹) 연중 제3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1월 15일 금요일[(녹) 연중 제3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입당송

시편 88(87),3 참조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 요한 2서의 말씀입니다.4-9
선택받은 부인이여,
4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5 부인,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6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8 여러분은 우리가 일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1.2.10.11.17.18(◎ 1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
○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
○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찾나이다. 당신 계명 떠나 헤매지 않게 하소서. ◎
○ 행여 당신께 죄를 지을세라, 마음 깊이 당신 말씀 간직하나이다. ◎
○ 당신 종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제가 살아 당신 말씀 지키오리다. ◎
○ 제 눈을 열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가르침 바라보리이다. ◎

복음 환호송

루카 21,28 참조
◎ 알렐루야.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알렐루야.

복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신비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1-2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또는>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성체로 힘을 얻고 감사하며 자비를 바라오니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성령의 힘으로 저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산보 중에 한국에서 카톡이 왔습니다. 이름을 보니 31년 전, 보좌 신부로 있을 때 알던 청년입니다. 달라스에서 12시면 한국은 새벽 2시입니다. 당시에 청년 활동하던 자매와 결혼했습니다. 큰 애가 27살이라고 하니,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전화했고, 우리는 예전의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늦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 생각이 나서 문자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본당에 청년은 100명이 넘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도 200명이 넘었습니다. 교사회, 성가대, 청년연합회, 레지오, 청년성서 공부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열정, 패기, 도전, 모험, 낭만이 넘치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른들과 성서 공부도 했고, 전 신자가 함께 가족 캠프도 갔습니다. 저는 2년 동안 본당 신부님을 3분이나 모시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사제관에서 짐을 세 번이나 옮기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2층을 사용했는데, 새로 오신 신부님이 2층을 사용하겠다고 해서 1층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또 새로 오신 신부님이 1층을 사용하겠다고 해서 다시 2층으로 옮겼습니다. 덕분에 필요 없던 짐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 저를 잊지 않고 연락해 주니 고마웠습니다. 내년에 한국 가면 그때 그 시간의 추억으로 여행을 가보려 합니다.

 

며칠 전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을 읽었습니다.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과 선생님의 아들을 초대해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지식만 가르쳐주지 않고,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학생 중에 1명이 문제를 자주 일으켰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한 번만 더 문제를 일으키면 퇴학시키겠다고 했습니다. 학생은 마음을 잡고 학교를 잘 다니나 했더니, 다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을 불러서 퇴학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가 저의 부덕함입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에도 문제를 일으키면 제가 교사를 그만두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선생님이 무릎까지 꿇고 간절히 부탁하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진실한 모습과, 선생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던 학생도 눈물 흘리면서 선생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고, 물의를 일으키던 학생도 무사히 졸업했다고 합니다. 그런 학생들이 20년이 지난 후에도 선생님을 찾아왔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는 노아와 롯의 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길입니다. 권위와 독선의 길입니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전쟁, 폭력, 기아, 가난, 난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온다고 해도 두려운 것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 보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일치의 삶을 사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 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복음 : 루카 17, 26 - 37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합시다!

 

로마 유학 시절, 나폴리를 거쳐 폼페이로 소풍을 자주 갔었습니다.

구 도시 유적지의 역사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폐허 사이를 산책하고 있노라면

아주 좋은 하루 피정이 되곤 했습니다.

 

자주 가다 보니 나중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폼페이 가이드 역할도 몇 번 했었습니다.

폼페이는 대도시 나폴리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이 도시는 한때 잘 나가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기원후 79년경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의 강력한 폭발로 인해,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매몰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폼페이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엄청난 화산재에

순식간에 파묻혀버렸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정지되어버렸습니다.

일하다가, 잠자다가, 식사를 하다가, 고기를 자르다가, 별의 별 짓을 다 하다가

그 상태 그대로 멈춰 화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죄와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도 폼페이와 흡사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계명을 무시하며,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주님께서는 엄청난 양의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습니다.

얼마나 강력했던지 사람은 물론 모든 가축들, 생명체들이 순식간에 녹아버려 형체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소돔과 고모라 시민들은 단체로 제삿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단 그 도시 안에 유일한 의인이었던 롯과 그 가족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탓에 살아서 빠져나왔습니다.

일말의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있던 롯의 아내는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정(不淨)한 도시, 타락한 도시, 짐승들의 도시, 죽음의 도시에서는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에 갔었는데,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면, 비정상 집단이라고 여겨진다면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빨리 빠져나와서 주님께서 운행하시는 생명의 배, 구원의 배 위로 재빠르게 승선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인간 존재 자체가 늘 나약하고 부족하기에 언제나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탄 배는 자주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 전후좌우로 심하게 요동칩니다.

 

높은 파도와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는 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안전한 배에 올라타 있는지? 집단적 멸망을 향해 가는 죽음의 배에 타고 있는지 말입니다.

주님께서 늘 거처하시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지?

환락과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고 있는지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과 죽음의 사이비 종교로 빠져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요즘 집단들의 특징은 대단한 고단수라는 것입니다.

던지는 미끼가 얼마나 달콤한지 모릅니다.

어쩌다 실수로 덜컥 미끼를 무는 순간, 그걸로 우리의 영혼과 정신, 우리의 인생 전체가 끝장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기지도 않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나름 가방끈 길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그래도 한때 잘 나갔다며 으쓱대는 사람들,

썩은 동아줄인줄도 모르고 끝까지 잡고 있는 사람들, 빨리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길로 돌아서길 희망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 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루카 17,37)

 

<오늘의 말·샘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14.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필레7-20 루카17,20-25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자>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 천국이옵니다.”

 

자주 즐겨 외는 자작 애송이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요즘 만추의 단풍으로 아름답게 타오르는 대한민국은 어디나 하느님 나라 천국같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바라보는 불암산을 바라보며 외우는 자작 짧은 애송시가 기도의 계절,

10월, 11월 계속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아무리 나눠도 계속 나누고 싶은 또 하나의 시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앞에 있는 당신

  행복에 삽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이미 익명의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현인들같습니다.

“옛 어른들은 항상 삼가고 번민했기에 오히려 근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다산>

당신 수의를 미리 마련해 놓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했던 친지 옛 여러 어른들도 생각납니다.

 

“군자는 평온하고 너그럽지만, 소인은 늘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논어>

옛 군자라 할 수 있는,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선비들의 삶이 그리워 영조시대, 글씨에 있어서는

추사 김정희를 보완하면서도 능가한다는, 또 그림에서는 겸재 정선을 보완하면서도 능가한다는 명문가이나

서얼출신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1 회화, 2 서예’(박희병) 2300쪽에 달하는 양권의 방대한 책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옛 아름답고 깊은 전통과 너무 단절되어 있는 오늘날의 천박(淺薄)한, 얕고 엷은 세태에서 초연하고 싶은

갈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기도 역시 생각납니다.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시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빛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희망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자체가 당신의 평화가 되게 하소서”

 

끊임없이 솟아났던, 한마디로 제 인생자체가 주님이,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 때 언제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아 나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살지 못하면 다른 어디서도 살지 못합니다.

죽어서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저에게는 매일 수도원 경내 산책이 성지순례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하느님 나라의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서지도 말고

따라 가지도 마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살 때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이들은 요지부동(搖之不動),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습니다.

‘밖으로는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처럼, 안으로는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처럼’, 늘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삽니다.

산과 강의 영성은 베네딕도회 정주수도승들의 삶을 늘 새롭게 하는 자랑스러운 영성이기도 합니다.

‘산과 강’이란 옛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강(江)은

 흐르고 흘러도

 여전히

 산(山)곁에 있다

 

 나도

 흐르고 흘러도

 여전히

 임곁에 있다”<1999.1.28.>

 

바로 성인들이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저절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나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거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빤짝 한번 나오는 제1독서 필레몬서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를 위해 필레몬에게 보낸 격조높은 서간이 참 깊고 향기롭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성인들의 글은, 말은 이렇듯 깊고 향기로워 영혼을 위무하고 치유합니다.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이런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주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사랑이, 예의와 배려, 존중의 사랑이 가득 담긴 참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간곡한 청이 담긴 서간입니다.

무례하거나 불손한 면이 추호도 없습니다.

오네시모스에 대한 한없는 사랑, 필레몬 동지에 대한 끝없는 신뢰가 구구절절 감동적입니다.

옥중에서 쓴 수인서간이지만 하느님 나라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대자유인 사랑의 사도 바오로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서간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 각자 삶의 자리,

꽃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11/15(금)[(녹) 연중 제32주간 금요일],되새김 구절

 

1.  우주라는 광대한 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 지구라는 넓은 밭에도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조재형 신부)

 

2.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인간 존재 자체가 늘 나약하고 부족하기에 언제나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탄 배는 자주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 전후좌우로 심하게 요동칩니다.

 

높은 파도와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는 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안전한 배에 올라타 있는지? 집단적 멸망을 향해 가는 죽음의 배에 타고 있는지 말입니다.

주님께서 늘 거처하시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지?

환락과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고 있는지 말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서지도 말고

따라 가지도 마라.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살 때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이들은 요지부동(搖之不動),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습니다.

‘밖으로는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처럼, 안으로는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처럼’, 늘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삽니다.

산과 강의 영성은 베네딕도회 정주수도승들의 삶을 늘 새롭게 하는 자랑스러운 영성이기도 합니다.

(이수철 신부)


 

11/15(금)[(녹)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제 147-17 기도

 

복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15일(금) 5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