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23일 토요일[(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골룸바노 아빠스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본기도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4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5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9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
○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
○ 하느님, 당신께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구하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바치는 이 예물을 굽어보시어
저희가 오롯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또는>
마르 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같은 내용이지만 이름에 따라서 의미가 무척 다르게 다가옵니다. 같은 사람인데 ‘개똥이’라고 부르면 왠지 가볍게 느껴집니다. 흔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사람인데 ‘우주’라고 부르면 왠지 귀하게 느껴집니다.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른들은 아이의 이름을 정할 때 신중하였습니다. 기업에서도 제품의 이름을 정할 때 막대한 비용을 기꺼이 지출합니다. 그만큼 이름이 매출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도요타는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도요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렉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도요타의 자동차이지만 렉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미국에서 현대도 성능과 품질에 비해서 저렴하게 취급받았습니다. 현대는 자동차의 브랜드를 아예 ‘제네시스’로 바꾸었습니다. 같은 현대의 자동차이지만 제네시스는 미국에서 성능과 품질은 물론 가격에서도 충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름을 바꾸었을 뿐인데 인식이 바뀐 겁니다.
본당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건축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사제관과 수녀원 건축, 체육관 건축, 교리실 확장, 축구장 설치, 납골당 건축’과 같은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건축위원회는 ‘왜’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필요한 시설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시설을 만드느냐였습니다. 건축위원회는 두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찾아오고 싶은 성당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땅이었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해서 만들어지는 시설은 교우들이 언제나 다시 찾고 싶은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성당입니다. 타주로 이사를 갔어도, 한국으로 갔어도 다시 올 수 있는 성당이 되게 하자는 의미를 담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의 발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곳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고, 그곳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납골당’에 대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납골당이라는 이름 대신에 ‘추모관’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납골당이라고 하면 뼈를 모아 놓은 곳처럼 느껴집니다. 추모관이라고 하면 기억이 담겨 있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지탱하는 건 61년 동안 살아온 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지탱하는 건 몸이라는 육체와 더불어 61년간의 기억입니다. 기억은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연결해 줍니다. 기억은 절망 중에도 희망을 줍니다. 기억은 두려움 속에서도 담대함을 줍니다. 기억은 슬픔 속에서도 위로를 줍니다. 기억은 어쩌면 존재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기록과 나의 작업이 삭제된 컴퓨터는 그냥 컴퓨터이지 나의 컴퓨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독서는 구약의 두 인물을 기억해 냅니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예언의 상징인 엘리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율법과 예언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저는 부활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바로 지금이 부활의 때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 3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20,27-40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과 위로로 가득찬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의 수명이 다하는 날, 우리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은혜롭고도 영광스럽게
주님 부활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게 된답니다. 육신의 허물을 벗은 우리 모두는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된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위령 성월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자주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의식은 철저하게도 차별화됩니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거부하고 도망치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다가오면 온 몸이 경직되고 살이 떨리며 두려움에 사지를 떨게 됩니다.
끝이요 멸망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의 순간은 그토록 간절히 고대해왔던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다시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니 기쁨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만 희망을 걸고 살아왔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천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고 나면 천사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것입니다.
주님 곁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지만,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 자비의 품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20,27-40: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35절)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 있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22.금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230?) 기념일
묵시10,8-11 루카19,45-48
성전정화
<교회공동체는 물론 개인 성전정화가 우선이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시편119,103)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맛, 밥맛, 돈맛이 아닌, 말씀맛, 기도맛, 하느님맛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성전정화가 우선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성전건물이 좋고 화려해도 그 안에 좋은 사람들 공동체가 없으면 헛되고 공허할 뿐입니다.
참 좋은 사람들이 세상의 보물이요 희망입니다.
“내 마음이 삐뚫어지면 세상도 어그러진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의 마음부터 바꾸어라.”<다산>
바로 사람이, 나 자신의 성전정화가 우선임을 깨우쳐줍니다.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대학>
역시 나부터의 수양이, 수행인 성전정화가 우선임을 밝혀주는 동양의 지혜입니다.
오늘은 3세기 순교한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가톨릭교회 역사교육 차원에서 순교 성녀의 감동적 일화를 공부해 봅시다.
이런 일련의 교육도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각자의 성전정화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제는 뜻밖에도 교황의 교육에 대한 귀한 언급이 많아 나눕니다.
“교회역사는 단지 연대기적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
그래서 순교성인들의 감동적 일화를 살펴보며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신자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교육의 실패는 미래의 아이들을 탈취해 가는 ‘문화적 집단학살(cultural genocide)이다.”
문화적 집단학살이라 표현이 아주 자극적이지만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그토록 지대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부실한지 개탄합니다.
이래서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가톨릭교회의 매일미사가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습니다.
저역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선교사들은 교회의 사랑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교육에의 열쇠는 학교와 가정간의 좋은 협력에 있다.”
금과옥조의 지혜 가득한 교황의 메시지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읽어보려 합니다.
성녀 체칠리아의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감동적 과정을 살펴봅니다.
성녀의 이름은 ‘천상의 백합’을 뜻합니다.
흔히 성녀는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체칠리아는 로마제국의 명문 귀족의 규수로 어린시절부터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합니다.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강권에 의해 발레리아누스와 결혼하였고
이교도인 그에게 종신동정서약한 사실을 밝혔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 사실을 알리는 성녀의 수호천사와의 만남을 통해 남편은 적극적 협조자로 바뀌었고
마침내 교리를 공부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발레리아누스는 함께 개종한 동생 티부르시우스와 신자생활에 열심하였고
이들 형제의 삶에 감동한 막시모라는 젊은이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셋은 이교도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강요를 거절함으로 같은날 순교합니다.
체칠리아 역시 체포되었으며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밝히고
온갖 회유와 감언이설에도 신앙을 지키다가 모진 고문으로 고통을 겪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성녀의 사후, 821년 교황 파스칼 1세가 성녀의 무덤을 열어보니 시신은 썩지 않고
살아 생전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이에 감복한 교황은 정중히 예식을 갖춰 그녀를 성녀로 인정하고
그녀에게 봉헌된 성 체칠리아 대성당의 지하묘소에 안치합니다.
전설적 일화지만 생명보다 강한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더불어
우리의 왜소한 신앙생활에도 큰 자극과 충격이 되니 저절로 성전정화가 되는 느낌입니다.
어느날 갑작스런 신망애信望愛의 성장은 없습니다.
부단한 주님을 향한 신망애의 수행과 더불어 정화되고 튼튼해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형제들의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이 우리에게는 영원한 화두가 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청정해야 할 기도의 집인 성전이, 수도원이 속화되어
강도의 소굴이, 영적 조폭들이나 영적 무뢰한들, 영적 사기꾼들의 소굴이 된다면
이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의 위험에 아랑곳 없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음으로 주님과 혼연일치의 공동체를 이루니
적대자들도 어쩌지 못합니다.
말그대로 주님께서 교회공동체 형제들의 성전정화에 온힘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새삼 공동체의 성전정화에 날마다 봉헌되는 성체성사 은총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지 깨닫습니다.
오늘 묵시록의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킨 체험을 우리는 미사를 통해 합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그대로 이뤄지는 사도 요한 개인의 성전정화요 이어 예언하라는 선교사명이 부여됩니다.
흡사 성찬전례중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또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라는
말마디를 연상하게 합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는 미사은총보다 교회공동체의 성전정화에,
교회의 선교활동에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복된 성녀 체칠리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밤낮으로 기도하며, 하느님과 끊임없이 기도하였도다."(성모의 노래 후렴). 아멘.
11/23(토)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저는 부활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바로 지금이 부활의 때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조재형 신부)
2.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죽음의 순간은 그토록 간절히 고대해왔던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다시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니 기쁨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만 희망을 걸고 살아왔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양승국 신부)
3.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욱현 신부)
4.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청정해야 할 기도의 집인 성전이, 수도원이 속화되어
강도의 소굴이, 영적 조폭들이나 영적 무뢰한들, 영적 사기꾼들의 소굴이 된다면
이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11/23(토)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 155-25 기도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죽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죽음의 순간은 간절히 고대해왔던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고,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다시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니 기쁨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입니다.
천사들과 같아지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아멘.
- 2024년 11월23일(토) 9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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