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25일 월요일[(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 당신께 돌아오는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본기도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어
저희가 거룩한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주님의 자비로 더욱 큰 은총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4,1-3.4ㄴ-5
나 요한이 1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 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의 명에 따라 바치는 이 거룩한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또는>
마태 28,20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제사에서 성체를 모시고 기뻐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 곁에 머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졸업정원제’를 채택했습니다. 입학 정원보다 더 많은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입학 정원의 30%를 더 선발했습니다. 신학생 정원이 80명이었는데 30%를 더 선발해서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입학 정원에 따랐으면 24명은 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를 포함해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성소(聖召)’가 있었다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졸업정원제는 문제가 있어서 폐지되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는 경우 학생들은 졸업에 필요한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학업에 대한 부담을 가중하고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졸업 여부가 학문적 성취도나 역량보다는 정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 실력과 상관없이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생길 수 있어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군대에 갈 수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졸업정원에 해당하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이나, 졸업정원에 들지 못할 걱정은 없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다른 이유로 사제 성소를 포기했습니다. 졸업할 때 이미 입학 정원이었던 80명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학 정원은 아닐 겁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졸업정원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야기하는 숫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이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인원수를 의미하기보다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144,000은 12(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12(사도들), 그리고 1,000(큰 무리를 의미하는 상징적 숫자)의 곱으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는 자들, 즉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 걸친 하느님 백성의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144,000명은 어린양 예수와 함께 서 있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순결하고 하느님께 봉헌된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정결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4,000명은 우상 숭배와 세속적 유혹에 저항하고, 하느님과 예수님께 충성 약속을 지킨 이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혼란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킨 자들을 나타냅니다. 144,000명은 문자적인 인원수라기보다 하느님께 선택되고 구원받은 모든 신자의 완전성과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과부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과부가 아주 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부를 칭찬하신 겁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4주 월요일
복음: 루카 21,1-4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극히 작은 봉헌과 희생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언젠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왔을 때가 기억납니다.
사실 아이들이 자원 봉사 활동을 하러 오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시고 번거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적절한 봉사 활동거리도 찾아야 되고, 주의 사항을 잘 설명해야 되고,
옆에 붙어서 관리도 해야 하고 복잡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뭔가 도와보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하고 기특해서 기쁘게 함께 하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도, 잘 했다, 고생했다고 칭찬하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함께 나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그분을 돕겠다고 나름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다닌다 할지라도,
사실 그분 보시기에 웃기는 일이거나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 대단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별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우리의 그 작은 마음, 그 작은 봉헌, 그 작은 노력을 눈여겨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감격스러워하시고 행복해하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3-4)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 렙톤 두 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5~600백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5만원권이나 10만원, 100만원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딸랑 동전 두 개를 봉헌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것없는 봉헌,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드릴 작은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34주 월요일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24.주일(성서주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다니713-14 묵시1,5ㄱㄷ-8 요한18,33ㄴ-37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오늘 연중 마지막 제34주일은 온누리의 임금이신, 온세상의 임금이신, 온인류의 임금이신,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직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참으로 평생 배우고 공부하여 닮아가야할 유일한 분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1925년 12월11일 제정됐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는 당시 전쟁후 무신론과 허무주의, 세속주의가 만연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그리스도왕직이 온인류에 미치고 있음을 강조하는 뜻에서 이 축일을 제정하고 공포합니다.
비오 11세 교황은 교서 ‘첫째의 것(Quas Primas)’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요 인간으로서 그리고 구세주로서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지닌 왕”이라고 천명하며 그리스도의 구세주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대축일이 제정된지 100년이 지났지만 반복되는 악순환의 현실에 대축일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되는 추세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더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중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합니다.
“용기란 흐름을 거스르는 굳센 힘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반드시 해내야 할 때 필요한 힘이다.”<다산>
“명命을 아는 자는 굳이 기울어진 돌담 아래에 서지 않는다.
도道를 다하고 죽은 자는 바른 명命이지만, 범죄로 죽은 자는 바른 명이 아니다.”
참된 용기는, 바른 명의 삶은 한결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따라 살 때 주어지는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위대한 정치지도자,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16년간 재직했던 메르켈 총리의 회고록에 나오는
일화가 감동적이라 소개합니다.
온 인류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많이 닮은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일화입니다.
매르켈 총리는 2017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 당선인을 설득하기 위해 트럼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조언을 청합니다.
“굽히고, 굽히고, 굽혀라. 그러나 부러질 정도로 굽히진 말아라.”
교황은 답합니다. 지극히 겸손하고 인내하라는 충고인데 이 또한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메르켈 총리는 교황의 조언대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메르켈 총리의 개인적 일화도 좋은 교훈이 됩니다.
역사책에서 어떤 평가를 받기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노력했다(She tried)”를 원했고,
또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합니다.
누구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닮으려 노력한, 참 멋지고 위대한 세계적 정치가 메르켈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오늘 저녁성무일도와 아침성무일도 때 ‘마리아의 노래’ 후렴과 ‘즈카르야 노래’ 후렴이 일치했고
이어 부른 내용들도 참 깊고 풍부했습니다. 온인류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임을
실감할 정도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나는 받았노라.”
더불어 어제 나눈 깨달음과 대화를 소개합니다. “왕(王)은 ‘하늘-’과 ‘땅_’ 사이에 십자가(+)가 있는 형상이다.
새삼 십자가의 예수님이 온누리의 참왕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왕(王)자 위에 점’을 하나 찍으면
주(主)님으로 왕들위에 계신 예수님이시네!”
그러니 한 형제는 “아래에 점을 하나 찍으면 구슬 옥(玉)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없는 한자에 이미 주어진 주옥(珠玉)처럼 귀한 우리의 왕(王)이자
주(主)님이신 예수님의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이미 묵시록 계통의 두 독서가 예수님의 신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세상 역사의 흐름이 서서히 이렇게 가고 있는 듯 합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만이 유일한 길이저 희망이자
구원의 대안임을 깨닫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하고
말씀하신다.”
바로 우리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미사중 감사송은 얼마나 장엄하고 깊고 풍부하며 고무적이었는지요!
“아버지께서 외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어 영원한 사제와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구원을 이루시고,
만물을 당신 친히 다스리시어,
그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 바치셨나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이런 참권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모시고 배우고 닮아가는 삶보다 고귀하고 보람있고
행복한 삶이 어디있겠는지요!
도대체 이런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 아니곤 어디서 구원이 행복이 올런지요!
구체적으로 넷의 실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첫째, 진리입니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주 예수님은 진리자체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천명하신 주님이십니다.
빌라도를 교육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그러니 시종여일, 한결같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의 협력자로 사는 것입니다.
저절로 고귀한 품위의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둘째, 희망입니다.
희망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궁극의 희망을 두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꿈이 있어야, 비전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해도 희망이 없으면 실상 죽어있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을, 꿈을, 비전을 지닐 수 있습니다.
무슨 꿈입니까?
꿈도 희망도 비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궁극으로 추구할바 꿈이자 희망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이런 희망이 생생하면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실을 삽니다.
성 베네딕도는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말씀하시고,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시편131,3)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8,24-25).
하느님을 예수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바 궁극의 희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주님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평화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평화를 주십사 기도할뿐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평화가 되게 해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듯 평화를 사랑할 때 우리 존재자체가 주님을 닮아 주님의 평화가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날 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우선적으로 주신 선물이 평화였고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평화입니다.
넷째, 섬김입니다.
섬김의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입니다.
섬김은 영성의 핵심입니다.
섬김의 공동체 바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섬김의 주님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삶에 충실할 때 섬김의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수록 섬김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섬김이야 말로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 하는 시금석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진리가 되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되십시오.
주님의 희망이 되십시오.
주님의 섬김이 되십시오.
한결같이 이렇게 살때 참 고귀한 품위의 삶에 백전백승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날로 삶의 중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 거룩한 과제요,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묵시1,5ㄴ-6). 아멘.
11/25(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조재형 신부)
2.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그분을 돕겠다고 나름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뛰어다닌다 할지라도,
사실 그분 보시기에 웃기는 일이거나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 대단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별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우리의 그 작은 마음, 그 작은 봉헌, 그 작은 노력을 눈여겨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감격스러워하시고 행복해하실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16년간 재직했던 메르켈 총리의 회고록에 나오는
일화가 감동적이라 소개합니다.
온 인류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많이 닮은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일화입니다.
매르켈 총리는 2017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 당선인을 설득하기 위해 트럼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조언을 청합니다.
“굽히고, 굽히고, 굽혀라. 그러나 부러질 정도로 굽히진 말아라.”
교황은 답합니다. 지극히 겸손하고 인내하라는 충고인데 이 또한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메르켈 총리는 교황의 조언대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메르켈 총리의 개인적 일화도 좋은 교훈이 됩니다.
역사책에서 어떤 평가를 받기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노력했다(She tried)”를 원했고,
또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합니다.
누구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닮으려 노력한, 참 멋지고 위대한 세계적 정치가 메르켈임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신부)
11/25(월) [(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 157-27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오늘의 말·샘 기도>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25일(월) 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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