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24일 주일[(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올해는 오늘부터 11월 30일까지)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가운데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고 자주 읽으며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임금이신 그분의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서는 우리 정신을 밝게 비추시어,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 모든 군주의 임금,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형제들에게 삶으로 증언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입당송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옵니다.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토록 받으소서.
본기도
사랑하시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3-14
13 내가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주님이 차려입고 권능의 띠를 두르셨네. ◎
○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네. 예로부터 주님 어좌는 굳게 세워지고, 영원으로부터 주님은 계시네. ◎
○ 당신 법은 실로 참되며, 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서리나이다. 주님, 길이길이 그러하리이다. ◎
제2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5ㄱㄷ-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5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6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33ㄴ-37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33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만왕의 주님, 연중 시기 마지막 주간을 맞이한 교회를 이끌어 주시어, 주님을 찬미하고, 모든 민족들에게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소서.
2.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정의의 주님, 이 땅의 공직자들을 굽어살피시어, 국가의 일을 수행하는 데 국민의 삶을 먼저 생각하며, 모든 일에 공정하여 믿음을 얻고, 자신의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게 하소서.
3.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치유자이신 주님, 우울증이나 과로로 지쳐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시어, 그들의 힘든 몸과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들이 삶을 새롭게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4. 본당 단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본당의 단체들을 이끌어 주시어,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나눔의 친교 생활을 실천하며 서로 화합하게 하시고, 하나 되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게 하소서.
예물기도
모든 민족들이 성자를 통하여
일치와 평화의 은혜를 받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외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어
영원한 사제와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고
만물을 당신 친히 다스리시어
그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 바치셨나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영원한 임금으로 앉으셨네.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불멸의 양식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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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지난 11월 4일입니다. 신부님들과 저녁 식사 하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 이야기, 사제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부님 한 분이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신부님은 트럼프와 해리스 중에 누가 당선될 것 같습니까? 신부님은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습니까?” 어찌 보면 단순한 질문이고, 그저 저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질문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1시간가량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트럼프’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신부님은 표정이 바뀌면서 ‘왜 트럼프입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고,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는지 잘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의 미국과 북한, 북한과 한국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폭이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때는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3번 만났습니다. 싱가포르, 판문점, 하노이에서 만났습니다. 마지막에 결렬되었지만, 한반도의 평화가 시작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트럼프 때는 그런 전쟁이 없었습니다.
저의 의견을 듣고, 신부님은 트럼프가 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의 대통령이면서 세계의 지도자이기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말을 함부로 하고,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은 성직자가 아니고, 대통령은 윤리 선생님도 아닌데 도덕적인 완벽함이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대의와 명분도 중요하지만, 형세 판단과 실리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대통령이라면 국민을 위해서 자존심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고, 대통령이라면 국민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도 이야기했습니다. 남한산성은 조선의 왕 인조와 그 왕을 보필하는 두 명의 신하 김상헌과 최명길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김상헌은 대의와 명분을 내세워서 조선의 왕은 청의 황제에게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최명길은 형세 판단과 실리를 내세워 지금은 청의 황제와 타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세자를 청의 수도로 보내자고 합니다. 세자는 청에서 새로운 나라의 정치와 새로운 나라의 질서를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왕 인조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리면서 병자호란은 끝이 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권위는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힘은 있으셨지만, 그 힘을 남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셨지만,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면서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세리와 창녀들과도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의 힘은 사랑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은 비록 돈과 조직, 엄청난 배경은 없으셨지만,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세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승리하셨고, 그분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과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배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지내면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도 천상의 향기를 갖게 됩니다.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도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올 한 해를 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난 한이, 병든 이, 굶주린 이와 함께한 발자국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삶이었고,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 왕 대축일: 나해
복음: 요한 18,33b-37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 예수님!
왕이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어찌 보면 세상 불쌍한 존재가 왕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것은 빛깔 좋은 개살구나 비슷합니다.
나라 전체를 책임지고 있으니, 그의 머릿속은 수백 가지 근심 걱정거리들로 가득합니다.
나라가 태평성대면 괜찮은데, 세상의 나라가 어디 늘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오랜 가뭄에 시달리고, 어떤 때는 예기치 않았던 대참사도 벌어지고,
이웃 나라들 지속적으로 찝쩍대고, 차라리 왕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리고 멀리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이 겪는 고초입니다.
세상의 왕권이라는 것, 그렇게 부질없는 것이고, 보잘것없는 것이고,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그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의 자질이나 품성이 지극히 결핍될 때 더 그렇습니다.
왕으로서 권세를 휘두르는 사람이 백성을 위한 봉사라는 가장 근본적인 책무를 망각할 때,
그 왕권은 정말이지 비참하고 초라해질 따름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성대하게 경축하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새삼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 그냥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왕 중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들이 손에 쥔 권력은 잠시라는 것을 망각하고, 남용하거나 오용할 때,
언젠가 치러야 할 대가는 참혹하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니 나와는 무관한 축일이네, 하고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해주신 탈렌트와
역량과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만간 우리 각자가 직면하게 될 신앙 여정의 종착점인 죽음, 곧 새로운 시작,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입니다.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자리에서 확연한 진리, 곧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큰 결핍에도 불구하고 나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불변의 진리를
나는 진실로 믿고 있는가?
위대한 우리의 성인성녀들께서 목전에 다가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생전, 그 진리,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백 퍼센트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지금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면 언젠가 맞이할 우리의 죽음과 심판 때,
그런 태도를 바꾸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언제나, 항상, 그리고 영원히, 궁극적으로도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체험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국면에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연결될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리스도 왕 대축일: 나해 복음: 요한 18,33b-37: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즉, 그리스도의 나약성에서 나온다. 이것이 ‘희생된 어린양’이라는 상징을 통해 나온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구원 능력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구원의 은혜는 바로 사랑에서 나왔으며 그 사랑은 절대 패하지 않는다. 그분의 왕권은 사랑과 봉헌과 봉사와 겸손과 화해 그리고 그분을 희생 제물로 만든 모든 불의와 폭력에 대한 항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랑의 왕국을 원한다. 그러나 너무 이상적이고 어려워 보여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니엘서에도 이 사고가 드러난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왕국이 이 세상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신다. 빌라도의 첫 번째 질문은 신원에 관한 것이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요?”(33b).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준 것이냐?”(34). 교활하고 경멸적인 빌라도는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라고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알리바이를 준비하면서, 재판에 넘긴 책임을 “동족과 수석 사제들”(35절)에게 돌렸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왕권을 표명하신다. 그분의 왕국은 천상적이라고 하신다. 만일 세상의 것이라면, 그분의 부하들이 싸워서 그분을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신다(36절). 빌라도는 빈정대는 말투로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37a). 예수께서 답하신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37b). 그러나 빌라도는 왕이 무슨 의미에서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려고”(37절) 태어나셨고 세상에 오셨다(참조: 요한 1,1-18). 로마에 있어서도 진정한 왕이시며, 또한 유다인들에게 그만큼 사랑받은 진리, 즉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에게 먼저 천상적 가르침을 가져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맡기신 진리를 증언하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 어떠한 유혹도 협박도 이해관계도 그분을 물러서게 하지 못한다. 그분은 철저히 당신 자신과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오만불손하지 않으며, 아버지 하느님께 자유롭게 충실하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그분의 왕권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절대 진리이시다(참조: 요한 14,6).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구별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나서 하느님의 진리를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받아들이고 따른다고 하신다(37절). 즉 타협이나 양보를 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진리 편에 서는 것이다. 그 왕국은 진리의 왕국이고 영원히 실현되고 있고, 성령 안에서 십자가 위에서, 진실한 증언에 있는 피와 물(19,30.34.35-37)에서 실현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왕권이다. 그러나 언제나 빌라도들이 진리를 밀어내고 있다. 묵시록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십자가상 희생에서 온다고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당신 자신과 진리에 대해 보여주시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권은 묵시록에서 구원된 모든 이들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묵시 1,6). 그래서 교회는 모든 신자가 공통적 왕권을 재인식하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증거하신 사랑과 진리의 모습으로 사회로 침투할 수 있도록 그 왕직을 실행하도록 초대하고 있다(교회 36). 이 왕권은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실행하는 것도 더 어렵게 느껴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봉사함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수성이라고 강조하신다. “그리스도의 이 태도로 미루어 본다면 왕이 된다는 것은 종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며, 종이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고 할 정도로 고귀한 영적 성숙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보람 있고 효과적으로 남에게 봉사하려면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제어를 가능케 하는 덕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명 즉, 그분의 왕다운 직분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인간 윤리의 모든 분야와 밀접히 연관된다.”(인간의 구원자 21항). 여기에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 진리를 밀어내는 빌라도의 모습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자의 모습인가?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진리를 끝까지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증거한 것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 왕권을 들어 높이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왕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봉사로 실행하여 세상에 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지만, 그 왕권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진리 안에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체험하며, 그리스도 왕께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23.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묵시11,4-12 루카20,27-40
부활신앙, 부활희망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다>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떳떳함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자 매사를 삼가는 간절함에서 나온다."<다산>
"그대가 방에 홀로 있을 때, 방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보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시경)
주님 앞에서 늘 깨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요즘 저를 계속 행복하게 하는,
만추의 불암산을 바라보며 애송하는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2024.10.25>
11월 위령성월, 얼마전 만추의 아름다운 단풍잎들 가득 덮인 수도원 뜨락의 황홀한 풍경을 보며
시화詩畫를 만들었고, 많은 분들과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란 시를 나눴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나뭇잎들
하늘향한 사모의 정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죽음도 축제일수 있겠다”<2024.11.20.>
또 11월 위령성월에 자주 불러보는 11월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생각납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부활신앙이, 부활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궁극의 힘입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이라는 고백입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위령성월 11월 곳곳에서 죽음 소식도 계속 들려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 말씀도 자주 생각이 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새생명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부활 희망의 기쁨 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도 없거니와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삼 부활의 희망과 기쁨중에 선종의 죽음을 맞이한다면 남은 이웃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나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끝임을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며 답을 요구합니다.
일곱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아 살다가 모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부활한후
이 여자는 일곱형제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거의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순전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답임을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현세에서 세례성사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 파스카의 부활의 삶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천상의 삶을
미리 앞당겨 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주님은 탈출기 3장6절을 인용하여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가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다는 것이니 바로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두 증인도 부활로 이어집니다.
“이리 올라오너라.”하고 외치자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중에 구름을 타고 올라갔으니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의 새생명이 시작됐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미사경문을 통해 부활을 명백히 고백합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감사기도 2양식>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감사기도 3양식중 위령미사시>
미사중 위령감사송1양식중 다음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부활희망을 선사하며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을 앞당겨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도 천상탄일의 축제일 수 있겠습니다.
여러번 나눴습니다만, 저는 그래서 장차 있을 저의 장례미사 축제중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성가402장)로, 퇴장성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오 감미로워라”를 내심 생각하며
부탁할 마음입니다.
강론 대신에 ‘하루하루살았습니다’라는 제 좌우명 자작 고백기도시를 읽어달라 부탁하려 합니다.
이 또한 좋은 죽음 준비라 믿습니다. 날마다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주며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부활의 삶을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11/24(일)[(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되새김 구절
1.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올 한 해를 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난 한이, 병든 이, 굶주린 이와 함께한 발자국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삶이었고,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예수님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양승국 신부)
3.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진리를 끝까지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증거한 것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 왕권을 들어 높이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왕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봉사로 실행하여
세상에 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다.(조욱현 신부)
4. 미사중 위령감사송1양식중 다음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이수철 신부)
11/24(일)[(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제 156-26 기도
복음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군림하거나 섬김을 받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허리를 숙이는 섬김과 봉사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그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24일(일) 5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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