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2월 5일 목요일[(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당신은 가까이 계시나이다. 당신 계명은 모두 진리이옵니다. 당신이 영원하시기에, 일찍이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깨달았나이다.
본기도
주님의 권능을 떨치시고 그 크신 힘으로 저희를 도우시어
자비로운 은총으로 저희 죄를 없애시고 어서 저희를 구원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6,1-6
1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5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6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
○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에게 온갖 선물을 베풀어 주셨으니
그 가운데에서 저희가 모아 바치는 이 제물을 받아들이시고
현세에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어
후세에서 영원한 구원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지금 지구에서 살고 있는 인류를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릅니다. 30,000년 전까지 지구에는 현생인류 이외에 네안데르탈인이 함께 살았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어느 순간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 비슷한 지능을 가졌습니다. 체격은 현생인류보다 더 강인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도 도구 지능, 자연 지능, 언어 지능, 사회적 지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은 이런 지능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사회적 지능이 현생인류보다 약했습니다. 사회적 지능은 관계를 맺고,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회적 지능은 ‘종교’를 만들었고, 종교는 고통과 재난을 이겨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종교는 조직을 통합하고,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신념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지능은 목적을 위해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선물을 주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우리말로는 ‘눈치’가 생긴다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구슬을 만들었지만, 구슬을 이용해서 목걸이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통합할 수 있는 지능이 부족했던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의 경쟁에서 뒤처졌고, 빙하기와 기후변화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2000년이 넘도록 계속 이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聖事)’입니다. 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고, 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납니다. 성사는 무뎌진 신앙을 하느님께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모시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말씀의 식탁으로 이끌어 줍니다. 고백성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성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성사입니다. 두 번째는 ‘애덕(愛德)’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너희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치료해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다. 너희들 중에 가장 굶주리고, 병들고, 목마른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진정한 교회의 역사는 ‘애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나눔, 가난한 이와 더불어 사는 모습을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과부와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교육, 복지는 교회의 이런 나눔이 발전하여 병원, 학교, 사회복지시설로 성장한 것입니다. 산업의 발전과 대량 생산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자본주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어린아이들이 노동의 현장에서 학대당하였고, 많은 노동자가 일한 만큼 급여를 받지 못했습니다. 고용주의 편의에 따라서 부당하게 해고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은 발전하고 좋아졌는데 그 혜택이 균등하게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교황님들은 ‘노동헌장, 새로운 사태, 지상의 평화’와 같은 회칙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을 따라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지금의 근로기준법과 노동자들을 위한 배려는 교회의 이런 주장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내 가족, 내 이웃,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잊어버리고 나의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도 예수님께서 원하신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7,21.24-27
그간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요?
요즘 저는 세상 부족하지만 교우들에게 성숙하고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을 전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 교우들의 깊고 강한 성모 신심 앞에 놀랄 때도 많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각별합니다. 전 세계 어떤 나라 신자들보다도 묵주기도를 많이 바칩니다.
레지오 마리에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각 본당에는 성모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신 레지오 단원들이 때로 기도 요원으로,
때로 봉사 부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모 신심은 조금 성찰과 점검을 필요로 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지니는 성모 신심이 때로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성모님을 바라볼 때, 신앙의 모델이나 우리 신앙 여정의 동반자로 보기보다
우리의 끝도 없는 바람을 들어주시는 기적의 요술 방망이로 여깁니다.
30년 전 지니고 있던 성모 신심이 조금도 성장하지 않고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성숙하고 균형잡힌 성모 신심을 지니기 위해서는 복음서 안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신앙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으며, 마침내 신앙인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셨습니다.
우리는 카나 혼인 잔치의 어머니로서 당신 자녀들의 결핍과 고통을 절대로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는 어머니,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어머니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성금요일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서 끝까지 혼절하지 않고, 아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영신적으로 동참한 어머니, 자신에게 다가온 극심한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그 고통에 담긴 참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던 어머니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구세주 하느님의 잉태라는 자신에게 다가온 너무나 놀라운 초대앞에, 다른 부르심 받은 사람들처럼
거절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기꺼이 예라고 응답한 나자렛의 마리아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숙하고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는 더이상 성모님께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며
졸라대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 여정에 언제나 동반해주신 성모님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며,
이제는 내가 어머니께 무엇을 드릴까? 고민하는 그런 사람이 올바른 성모 신심 소유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남은 생애 동안은 더이상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고 졸라대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대신 내게 베푸신 그분의 크신 업적과 자비에 수시로 감사하면서,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매일 그분께 한 가지씩 선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외형의 집인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육신이 거주하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마음의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 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라고 말씀하시고,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면 될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 곧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고,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4.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사25,6-10ㄱ 마태15,29-37
삶은 선택이자 은총이다
“하느님의 꿈을, 참행복을 선택합시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삶은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꿈을, 행복을 선택합시다.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이런 이들이, 하느님의 꿈을, 행복을 선택해 사는 이들이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혼자만의 즐거움은 아무리 커져도 원래 상태로 되돌아 간다. 즐거움은 나누어야 더 커지고 더 오래간다.”<다산>
“즐거움은 누림을 급히 하지 않아야 늙도록 이어지고, 복은 다 받지 않아야 후손까지 간다.”<사잠>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42년 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많이 강조해온 주제가 영적전투와 더불어
하느님의 꿈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존엄한 품격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적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동력도 이런 꿈과 희망, 비전에서 나옵니다.
참 행복과 기쁨도 하느님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실현될 때 나옵니다.
한밤중 일어나니 설마설마하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불행한 소식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역사적 퇴보의 비현실적 현실이며 후진국에서도 있을까 말까한
대다수 국민의사에 반하는 비상계엄선포가 국회의 의결대로 속히 해제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피해도 최소한으로 끝나길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정말 유능한 정부라면 국민을 꿈꾸게 하고 희망과 비전을 지니게 할 것입니다.
이런 꿈과 희망이 비전이 사라질 때 대다수 국민은 길을, 빛을 잃고 방황하며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자는 물론이고 믿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꿈꿔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물론이고 성서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실현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꿈나무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천상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사라지면 탐욕의 본능만 남고 세상은 아수라장의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얼마전 흰눈으로 가득 덮힌 온누리를 보며 예전 써놨던 하늘꿈이란 글이 생각났습니다.
“땅도 춤춘다
추위도 막을 수 없다
밤새 하늘 꿈꾸고 나니 온통 흰눈 덮인 하얀땅
하늘 은총이 온누리를 덮었네.”<2009.12.>
과거가 사람을 만들지만 하느님 꿈의, 하느님 희망의 미래가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하느님 꿈의 희망이, 비전이 우리를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꿈은 얼마나 고무적이요 위로와 힘을 주는 지요!
“만군의 주님께서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모든 민족’, ‘모든 겨레’, ‘모든 사람’등 예외없이 모두가 구원되는 그날의 현실을 꿈꾸는 이사야가
당신의 참 아름답고 좋은 꿈을 우리와 나눕니다.
이런 꿈의 사람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며 삽니다.
무지와 죽음의 너울과 덮개를 치워버리고 함께 나누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삽니다.
언젠가 그날을 오늘 앞당겨 살며 고백합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위에 머무르신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 잔치에 잘 어울리는 우리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야 말로 부단히 하느님을 꿈꿨던 희망의 사람, 비전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사야의 하느님 꿈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며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고치시고’ ‘먹이시는’ 잔치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나누어 주었고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합니다.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바구니에 가득합니다.
없어서 가난과 굶주림이 아니라 나누지 않아 가난이요 굶주림이니 이는 하느님 책임이 아니라
우리가 나누지 않은 책임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꿈꾸는 희망의 사람, 비전의 사람은 하느님의 꿈나무가 되어 그 사랑의 열매를
부단히 나누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하느님의 나라 미사잔치가 우리 모두 하느님을 꿈꾸며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복음 환호송)
12/5(목)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조재형 신부)
2.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남은 생애 동안은 더이상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고 졸라대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대신 내게 베푸신 그분의 크신 업적과 자비에 수시로 감사하면서,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매일 그분께 한 가지씩 선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한밤중 일어나니 설마설마하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불행한 소식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역사적 퇴보의 비현실적 현실이며 후진국에서도 있을까 말까한
대다수 국민의사에 반하는 비상계엄선포가 국회의 의결대로 속히 해제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피해도 최소한으로 끝나길 기도하는 마음입니다.(이수철 신부)
12/5(목) [(자)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제 167-37기도
복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5일(목) 7시20분-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4년 12월 7일 토요일[(백)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4.12.07 |
---|---|
[매묵]2024년 12월 6일 금요일[(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5) | 2024.12.06 |
[매묵]2024년 12월 4일 수요일[(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4.12.04 |
[매묵]2024년 12월 3일 화요일[(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4) | 2024.12.03 |
[매묵]2024년 12월 2일 월요일[(자) 대림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5) | 2024.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