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2월 3일 화요일[(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1662년에 시성된 성인은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여행하며 선교에 힘썼기 때문이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께서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다.
입당송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본기도
모든 신자들이 그 선교 열정으로 불타올라
거룩한 교회가 세상 어디서나 새로운 자녀들을 많이 얻어 기뻐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
복음 환호송
○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9,16-19.22-23)와 복음(마르 16,15-20ㄴ)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머나먼 땅에 찾아온
복된 프란치스코를 기리며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도 복음을 전하고 증언하여
많은 형제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성인 감사송 1 : 성인들의 영광>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
또 성인들의 삶을 저희에게 모범으로 주시고
저희가 성인들과 하나 되게 하시며 그 기도의 도움을 받게 하시나이다.
저희는 이 위대한 증인에게서 힘을 얻고
악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고 나아갈 길을 끝까지 달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복된 프란치스코의 불타는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고 복음에 충실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도종환은 ‘접시꽃 당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저는 본당에 있을 때 도종환 시인을 초청해서 ‘대림 특강’을 부탁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담쟁이, 접시꽃 당신, 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이 그의 시를 통해서 신앙을 전하였습니다. 담쟁이는 느리지만 꾸준히 자라며,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목표를 이뤄냅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큰 시련과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끈기와 희망을 상징합니다. 접시꽃 당신은 암 투병 중인 아내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시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며 도종환 시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인간의 의지를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복권이 당첨되는 기쁨처럼 드러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의 구원과 상관없는 개인의 구원만을 드러내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복권이 당첨되는 것도 아니었고, 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칼로 가슴을 찔리듯 한 아픔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날이 오면 사막에 샘이 넘쳐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어린아이가 사자와 늑대를 몰고 다닐 거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중풍 병자가 걷고, 눈먼 이는 눈을 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될 거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은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는 새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피는 접시꽃이 없듯이,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견디지 않고 담을 올라가는 담쟁이가 없듯이 그날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은 주님의 영,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날은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희생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 속에서 다가온다고 하셨습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안회는 가난하였지만 언제나 깨달음의 경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그런 안회를 두고서 ‘가난하지만, 도를 즐길 줄 안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재물이 많아도,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능력이 출중하여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욕심 때문에 더 많이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안빈낙도, 하느님의 나라, 희망의 나라’를 찾은 시인이 있습니다. 오늘은 박노해 시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랑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제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길을 찾는 지혜를 주셨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주셨습니다. 외로울 때면 친구가 되어 주셨고, 기쁨을 함께 나눌 이웃을 주셨습니다. 생각하니 정말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저에게 희망이 되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 길이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우주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습니다.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사람은 또 먼지보다 작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려고 하듯이 나도 이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소서.’ 이사야 예언자도 바로 그 사람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시고,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복음: 루카 10,21-24: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성탄 전까지는 보통 저희 피정 센터가 살짝 비수기여서 조금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림 시기가 시작되다 보니, 특강 성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태안에서 남도 이쪽으로, 서울로, 서울에서 반대쪽 남도 쪽으로...
폐차장으로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저를 아직도 불러주시니 크게 감사하며 다니고 있지만,
몸이 옛날같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이도 다녔으니 이제 하산이나 은거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갈등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복음 선포자로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셨던 바오로 사도,
주치의로부터 몸 상태가 더 이상 기워입을 수 없는 낡은 코트 같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도
죽기살기로 뛰어다니셨던 돈보스코를 생각하면,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도 큰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은퇴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도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당신이 만나고 체험한 그 좋으신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교통편이라고는 목선밖에 없던
그 옛날 인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근처 몰루카 제도, 필리핀 근처 모로타이,
그리고 일본까지 건너오셨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먼 거리를 여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동행한 페르난데스 수사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일본 선교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 눈보라, 예측할 수 없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아무리 극심해도 하비에르 신부님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이동할 때면 해적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산길을 걷다가 거친 눈보라와 살을 에는 칼바람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발은 퉁퉁 부어올랐고, 더 이상 걷지 못해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만나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그리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일분일초도 아끼지 않고 복음 선포에 매진했습니다.
인도에서 일본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을 선물로 주고 난 그는
그것도 모자라 또 다른 미지의 땅인 중국으로 건너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중국 코앞 산첸섬에서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과도한 복음 선포로 인한 열병이요 과로사였습니다.
“만일 제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저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아버지의 선하신 뜻'>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기쁨과 감사를 지녀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는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비록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뜻의 선하심’에 의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루카 10,2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전부를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하는 이라야 알아듣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당신의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선하신 그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2.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사2,1-5 마태8,5-11
주님의 감동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나는 뭇 백성들 높이 땅위에 가장 높노라.”(시편46,11)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랑, 겸손한 믿음, 겸손한 지혜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7장 겸손에 대하여>라는 항목에서 겸손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덕인지
설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멈춤에 대한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인간은 격하게 행동했을 때가 아니라 잠시 멈췄을 때, 오히려 길을 찾아낸다.”<다산>
“멈출 것을 안 다음에야 정해지고, 정해진 후에야 마음이 고요해지며 그 후에야 편안해지고,
그 후에야 생각하며, 그 후에야 얻을 수 있다.”<대학>
멈출줄 모르고 계속 움직이고, 계속 말하는 것, 현대인의 영적 질병이라는 토마스 머튼의 통찰도 생각납니다.
이 또한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평화의 결핍을 반영합니다.
향심기도, 비움기도, 명상기도를 통한 멈춤의 영적훈련도 참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멈춤의 훈련이자 겸손과 경청의 훈련도 됩니다.
교황님의 어제 대림1주일 삼종기도후 강론중 주요 내용도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깨어 있어라, 그리고 네 시선을 하늘(Heaven)로 향하라.”
“평화의 추구는 모든 이들의 책임이다.”
이런 이가 멈출 줄 아는 겸손한 사람, 평화의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중 백인 대장의 겸손한 믿음이 빛납니다.
주님을 감동케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이방인의 믿음입니다.
백인대장과 주님과의 문답에서 그의 겸손한 면모와 사랑이, 그의 참 좋은 인성이 잘 드러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 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멈추고 주님을 찾는 겸손한 지혜가, 종에 대한 겸손한 배려와 연민의 사랑이,
주님을 믿는 겸손한 믿음이 빛납니다.
마지막 백인대장의 고백은 미사중 성체를 모실 때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을 상기하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겸손의 절정을 보여주는 미사 성찬전례중
다음 영성체시 문답이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어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동, 감탄하시며 언급하시는 내용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어디서나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하늘 나라임을 깨우쳐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잡을 것이다.”
겸손한 믿음이 하늘 얼마나 구원에 결정적인지 거듭 강조하는 주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라는 기득권이 참으로 무용함을 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가거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치유의 응답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만민 구원의 꿈과 이상을 보여줍니다.
이런 꿈과 이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믿음의 사람은 배움의 사람이자 평화의 사람입니다.
제1독서 서두와 마지막 말씀이 그대로 겸손한 믿음과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의 산, 하느님의 집으로 가서 주님의 길을, 가르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길, 평화의 공부요 그대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미사 보다 더 좋은 공부도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자에게는,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자에게는, 바로 그 삶의 자리가
주님이 계신 주님의 산, 주님의 집입니다.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평화의 꿈이 참 아름답습니다.
진정 주님을 닮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은 평화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바, 유일한 소원은 이런 평화의 실현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주님 평화의 일꾼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이들이 바로 겸손한 믿음과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아멘.
12/3(화)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칼로 가슴을 찔리듯 한 아픔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날이 오면 사막에 샘이 넘쳐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어린아이가 사자와 늑대를 몰고 다닐 거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중풍 병자가 걷고, 눈먼 이는 눈을 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될 거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은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는 새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피는 접시꽃이 없듯이,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견디지 않고 담을 올라가는 담쟁이가 없듯이 그날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은 주님의 영,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2.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도 큰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은퇴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도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당신이 만나고 체험한 그 좋으신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교통편이라고는 목선밖에 없던
그 옛날 인도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파푸아 뉴기니아 근처 몰루카 제도, 필리핀 근처 모로타이,
그리고 일본까지 건너오셨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먼 거리를 여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양승국 신부)
3.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오늘의 말·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당신의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선하신 그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백인대장의 멈추고 주님을 찾는 겸손한 지혜가, 종에 대한 겸손한 배려와 연민의 사랑이,
주님을 믿는 겸손한 믿음이 빛납니다.
마지막 백인대장의 고백은 미사중 성체를 모실 때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을 상기하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겸손의 절정을 보여주는 미사 성찬전례중
다음 영성체시 문답이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수철 신부)
12/3(화)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제 165-35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당신의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선하신 그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3일(화) 5시50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Francis Xavier
" 주님,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관대하고 열린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마음을 당신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
스페인 바스크의 하비에르 성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예수회의 설립자 성 이냐시오를 만나
예수회의 설립회원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예수회가 공식 승인을 받은 해에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과 몰타섬, 일본까지
왕래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우던 중 선종했습니다.
흔히 프란치스코는 성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리며 가톨릭 선교 활동의 수호성인입니다.
글씨 :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수원교구)
그림 : 홍승례 아스테리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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