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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2월 6일 금요일[(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2월 6일 금요일[(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니콜라오 주교

입당송

보라, 주님이 영화롭게 내려오시리라.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

본기도

주님,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저희를 죄의 위험에서 지켜 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하여 주소서.
주님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9,17-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4.13-14(◎ 1ㄱ)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27-31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비천한 저희가 드리는 기도와 제물을 굽어보시어
아무런 공덕이 없는 저희를 너그러이 보호하시며 도와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필리 3,20-21 참조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바꾸어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1주간 금요일

 

포트워스 신부님, 안식년 중인 동창 신부님과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10 15분 비행기였는데 기상 악화로 2시간 지연되었습니다. 덕분에 공항에서 걸을 수 있었고, 음악회 프로그램에 들어갈 인사말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늦는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엘파소의 명소인 화이트 샌드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2시간 늦었기에 화이트 샌드에서 석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늦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사제관에 도착하니 교우분들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엘파소는 주일에 30명 정도 나오는 공동체입니다. 15가정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제가 있는 달라스는 주일에 800명 정도 나오는 본당입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하느님의 축복과 하느님의 사랑은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공동체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공동체의 믿음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공동체가 믿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며, 희망으로 기쁘게 살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23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형제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예전에 시골 쥐와 서울 쥐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골에서 평화롭게 살던 시골 쥐는 어느 날 친구인 서울 쥐를 초대합니다. 시골 쥐는 자신이 먹는 소박한 음식을 서울 쥐에게 대접합니다. 하지만 서울 쥐는 음식을 보며 비웃으며 말합니다. ‘이런 초라한 음식을 먹고 산다니, 내게 오면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서울 쥐는 시골 쥐를 도시로 초대합니다. 도시에는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했지만, 문제는 위험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던 두 쥐는 고양이가 갑자기 나타나 도망쳐야 했고, 사람들에게도 쫓기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시골 쥐는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위험천만한 삶을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보다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기쁘게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의 태도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화려함은 겉보기에 매력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안전과 평화를 희생한다면 그 가치는 줄어듭니다. 꼭 남의 삶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상황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진정한 만족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부유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어느 곳에서도 위로와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어느 곳에서도 불평과 불만이 넘쳐날 겁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저는 그날이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래서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언제나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늘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불평하고, 지금 원망하고, 지금 비관하면 언제나 제가 머무르는 곳은 가시방석입니다. 그러나 지금 감사하고, 지금 기뻐하고, 지금 기도하면 제가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꽃자리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진중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는 신부님들에게 그날은 늘 꽃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이 먼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입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신다는 소문입니다. 죄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

 

2024년 다해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마태오 9,27-31

 

슬픈 예감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게 하는 믿음이 있다

 

왜 슬픈 예감은 절대 틀리지 않는 걸까요? 왜 부정적인 예측은 항상 현실이 될까요?

이런 가사의 노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부정적인 이해가

현실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현 대통령이 한밤중에 계엄선포를 하였습니다. 군대가 국회를 난입하여 무언가를 장악하고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루 만에 감정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행인 것은 국회의원들이 당일 회의를 위해 대부분 서울에 머물고 있어서 신속하게 과반수 이상

모일 수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국회에 통보하지 않고 계엄을 선포해 소위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려 하였다면 이는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내란죄의 수장과 깊이 관련된 이들에 대해서는 사형이나 무기징역과 같은 벌에

처합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윤 대통령은 왜 자기 운명을 이렇게 재촉하는 것일까요? 

 

그가 사는 세상은 무언가 두려움의 세상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음해하려는 종북세력이 넘쳐나는

환경에 놓인 것입니다. 거의 망상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상황의 판단이 안 될 때 생기는

감정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잃을 게 많다는 잘못된 믿음과 나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이들이 많다는 잘못된 두 믿음의 결합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두려워하면 두려운 일이 생기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하나만 뽑으라 하면 저는 이것을 뽑고 싶습니다.

이 원칙은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법칙을 믿지 않습니다.

 

아마 윤 대통령이 많이 갖지 못했을 때는 그만큼 두려움도 적었을 것입니다.

감사원장, 서울 지검장 탄핵 결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는 대통령 관저와 김건희 여사와 직결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사실 예산안에 대한 것은

거의 700조에 가까운데 심의에서 4~5조 조정안에 관련된 것이라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설사 이유가 된다고 해도 국회에서 예산안 심의 하는 것을 가지고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포할 사유는 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람은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때는 아무것도 가질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이번 계엄은 대다수 전문가가 볼 때 국가 혼란 상태는 아니었다는 결론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는 대로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일까요? 오늘 두 소경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할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디까지 믿어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은 나를 창조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곳에 흔들다리를 만들고 유리로 아래가 보이게 하는 관광지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국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즐깁니다.

놀이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가끔 사고도 나지만, 교통사고 날 확률보다 적기 때문에

그런 것을 즐깁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만든 이가 바로 인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녀도 탈 수 있는 놀이기구를 위험하게 만들 리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과 온 세상의 창조자를 믿기 전까지는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두려우면 두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긍정적인 믿음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바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망가지면 고치실 수 있고

죽으면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을수록

우리는 평화를 얻고 그 평화가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하며 결국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창조자를 믿어서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3. 이영근 신부

 

2024년 다해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며 깨어나고, 눈을 감으며 잠에 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뜨고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있고, 눈을 감고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눈 먼 이들의 눈도 암흑과 어둠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이사 29,17)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

그리고 복음은 ‘눈 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비록 눈은 멀었어도 믿음으로 이미 눈 뜬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눈 먼 이가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마태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이 믿음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대시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믿고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눈 먼 이들은 건강하게 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했던 것입니다.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믿음으로 걸어가지만, 그날이 오면 그분의 집안에서 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시편 27,1, 화답송 후렴)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5.대림 제1주간 목요일                                                                

 이사26,1-6 마태7,21.24-27

 

슬기로운 삶

반석 위에 인생집 짓기

 

오늘 새벽에 읽은 슬기로운 교황님의 강론에 대한 충고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강론은 하나의 견해(one idea), 하나의 정서(one sentiment),

하나의 행동으로의 초대(one invitation to action)이다.

복음은 성령을 통하여 선포되어야 한다. 최대한 10분이다.

8분이 지나면 강론은 산만해지고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강론은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결코 10분 이상 넘지 마라. 언제나!(Never go over 10 minutes, ever!)’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5분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10분은 인간의 말이며, 15분은 마귀의 말이라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정말 긴 강론은 고문입니다. 삶이 진실하고 절실하면 강론도 짧고 순수합니다.

 

다음 현자의 말씀도 문제는 나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삶의 가장 큰 걸림돌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내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다산>

이래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회개가 슬기로운 삶의 지름길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부단한 선택의 과정이 인생입니다. 무수한 선택으로 이루어져가는 인생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인생집 짓기입니다.

제가 70대 넘어 주로 읽는 책은 자서전이나 평전, 회고록입니다.

위인들의 인생집이 어떠했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760쪽에 달하는 “앙겔라 메르켈, 자유”란 메르켈 전 총리의 회고록입니다.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2006-2021까지 무려 16년간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로 16년간 재임했던 분입니다.

54년생이니 현재 70세입니다. 얼마나 충실한 삶이었는지 거대한 나무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충실한, 참으로 한결같이 노력한 삶이었음을 봅니다. 언젠가 갑자가 잘 지어지는 인생집은 없습니다.

결코 우연이나 요행의 집짓기는 없습니다. 모든 위인들의 책을 읽을 때 마다 깨닫는 진리입니다.

 

나무는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보이지 않게 성장합니다.

사람역시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인생집 짓기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내 고유의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둘중 하나를 선택하여 평생 짓는 인생집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은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슬기로운 삶이냐 어리석은 삶이냐 둘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반석 위에 평생 인생집을 지어가는 이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하루 아침에 며칠만에 지어지는 날림집 같은 인생집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최선을 다해 짓는 인생집입니다.

방법은 단 하나 주님의 진리 말씀을 사랑하고 실행하는 수행자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시작하면 언제든 늦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주님 반석 위에 회개와 더불어 말씀을 공부하고

실행함으로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저 역시 하루하루 인생집을 짓는 마음으로 평생 쓰는 강론입니다.

이런 주님을 사랑하고 찾으며 인생집 짓기에 전념하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슬기로운 이들의 고백이

더욱 우리를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한결같이, 길이길이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 말씀을 실행함으로 하느님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이런 슬기로운 삶을 선택하여 하느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집짓기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집은 기초와 과정이 튼튼하기에 웬만한 폭풍우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어리석은 사람의 인생집입니다.

결코 이런 인생집을 선택하는 이는 없을 것이나, 주님을 떠나 말씀공부와 실행에 소홀하면

이런 사상누각沙上樓閣될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그러나 나의 이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이런 모래 위에 지어지는 어리석은 이들의 인생집도 많을 것입니다.

폭풍우의 시련과 고난이 왔을 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인생집이라면 대책이 없습니다.

인생집을 짓는데 요행이나 우연, 비약이나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하루하루 우직할 정도의 말씀 실행의 한결같은 노력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12/6(금)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바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망가지면 고치실 수 있고

죽으면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을수록

우리는 평화를 얻고 그 평화가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하며 결국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창조자를 믿어서 손해 볼 게 없습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슬기로운 삶을 선택하여 하느님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집짓기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집은 기초와 과정이 튼튼하기에 웬만한 폭풍우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수철 신부)

 

12/6(금)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제 168-38기도

 

복음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6일(금) 5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