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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2월 4일 수요일[(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2월 4일 수요일[(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사제 학자

입당송

하바 2,3; 1코린 4,5 참조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오시어, 어둠 속에 숨은 것을 밝히시고, 모든 민족들 앞에 당신을 드러내시리라.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의 권능으로 저희가 마음을 가다듬어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고
성자께서 베푸시는 천상 잔치에 들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5,6-10ㄱ
그날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3(22),1-3ㄱ.3ㄴㄷ-4.5.6(◎ 6ㄷㄹ)
◎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29-37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예물을 정성껏 봉헌하며 비오니
주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신비의 거행으로
저희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이사 40,10; 35,5 참조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스트 프리스코의 반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본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것도 기쁨이지만, 반 모임에서 만나는 것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다섯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했습니다. 저를 포함 11명이 복음을 읽고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자매님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정재가 이런 대사를 하였습니다. “내가 해방될 줄 알았으면 친일파로 살았겠나!”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살았던 사람은 대한민국이 그리 쉽게 독립할 줄 몰랐습니다. 자매님은 암살 이야기를 하면서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산 사람도 이렇게 말할 거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가 있는 줄 알았으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을 텐데!”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믿기에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복음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형제님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말씀을 나누면서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학생 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충격받았다고 했습니다. 책은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명이라고 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이고,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형제님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작년에 세례받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사제가 세례 대상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청합니까?’ 그러면 세례 대상자는 대답합니다. ‘신앙을 청합니다.’ 사제는 또 묻습니다. ‘신앙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그러면 세례 대상자는 대답합니다.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세례받았을 때 응답했던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날과 그 시간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고통을 느낀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고, 당신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면 인간입니다. 당신이 믿는 종교를 타인에게 설명하기보다는 당신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믿는 종교를 이해하게 하십시오.’ 톨스토이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함께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과거는 지금 하는 일이 쌓인 것이고, 미래는 지금 하는 일들로 채워지기에 인생에서 중요한 건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니 지난 일 때문에 후회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상태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라고 말했습니다. 11명이 복음 말씀을 나누니 말씀의 식탁이 풍요로워졌습니다. 반장님이 본당 소식을 전하고, 실천 사항을 정하면서 복음 나누기를 마쳤습니다. 복음 말씀이 살아 있는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장애인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저도 반 모임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며,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반 모임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사야 25,6-10ㄱ

마태오 15,29-37

 

이사야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는 크게 전례의 성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1월 28일~12월 16일까지가 전반전이라고 할 수 있고,

12월 17일~24일까지가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의 전례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깨어 기도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반면 후반전의 전례는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전반기 매일 미사 첫 번째 독서는 이사야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자 중의 예언자, ‘예언자들의 왕’으로 손꼽히는 이사야는 기원전 765년에 태어나,

742년에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으며, 700년대 신앙과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던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동과 우여곡절의 시절, 갈팡질팡하던 백성들에게

희망과 격려의 언어로 위로했던 참 예언자였습니다.

 

40여 년간 예언자로서 백성들의 영적생활을 동반했던 그의 메시지 핵심주제는 주님을 향한 백성들의 불충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결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듣기 좋은 말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 힘든데, 가슴을 후벼 파는 ‘지적질’과 듣기 싫은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니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언어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를 가장 세밀하고 밝히고 계시한 예언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조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를 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메시지가 얼마나 참되고 강렬했으면 예수님께서도 즐겨 읽으셨고 인용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안에서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인생 드라마 각본의 원본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각본에 따라 당신의 인생을 장엄하게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은 너무나 신랄하고 강렬해서 청중들의 가슴을 칼로 후벼 파는 느낌을 줄 때가 많았는데,

다른 한편 마냥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백성들을 달래고 격려하며 신속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가 그렇습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야서 25장 6~8절)

 

보시다시피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강렬한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건드렸고, 삶을 변화시키도록 자극하였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사야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구름 위의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이 삶의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아파했고 살았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언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언어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이자 동료 인간으로서 건네는 희망과 생명의 언어, 위로와 격려의 언어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분의 말씀에는 허점이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을 실제 삶에서 살고 계시니

그 말씀에 힘과 생명력이 넘칩니다.

 

교황님께서 매일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종을 울려 삶을 변화시키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시대 여타 수많은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빈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 대한민국 사회는 어쩌면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시절과 비슷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또 다시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깜’도 안 되는 이, 정말 파렴치한 이, 어쩌면 그렇게 얼굴 두꺼운 이까지 나서서

스스로를 향해 적임자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서슬 퍼랬던 이사야 예언자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우리나라입니다.

사심이나 자신의 안위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는 사람, 그저 이 나라 이 백성이 삶의 전부인

그런 지도자의 등장이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우리 가운데 '빵'이 있다는 사실>

 

대림시기는 자신의 ‘간절한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고 어두웠던 암흑의 군사독재 시절에 ‘김지하’ 시인은 그 간절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 '금관의 예수'

오늘 복음에는 ‘간절한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 곧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참조)  

이들은 자신의 갈망을 품고, 더러는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다가왔지만,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군중은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곧 우리 가운데 빵이 있다는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빵 '일곱 개'는 완전함의 숫자요, 거기에 더하여 ‘물고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도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찰'(마태 15,37)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진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를 ‘찾는 사람’, 곧 '참된 빵'이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순례자요 대림의 길을 걷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이미 찾은’, ‘이미 와 있는’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 군중이 가엾구나.”

(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안에 당신이 새겨준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3.화요일 성 하비에르 사제(1506-1552) 기념일       

                                                                                                               이사11,1-10 루카10,21-24

 

                                                            관상의 행복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복음 환호송)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관상의 행복을 누리는데 좋은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흔들렸다면 한 걸음 물러서 자신을 바라보라. 그것만으로도 어지러움이 잦아질 것이다.”<다산>

“손괘의 상풀이에서 말했다. ‘산 아래에 못이 있는 것은 덜어냄이니 군자는 이를 통해 화를 누르고

욕심을 막는다.”<주역>

새삼 적절한 때 ‘물러남’과 ‘덜어냄’이 참 좋은 분별의 지혜이자 관상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11장 1절부터 10절까지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에 대한 이사야의 꿈과 희망,

비전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과 영감을 줍니다.

마침내 대림시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이런 평화의 왕국을 꿈꾸는 우리들이요,

오늘 이 말씀을 12월25일 성탄대축일 밤미사중 독서의 기도중 독서자는 노래합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통해 평화의 왕국이 바야흐로 시작됐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은, 그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은 바로 탄생하실 메시아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가톨릭교회는 여기 여섯에다 자비의 영을 덧붙여 성령의 일곱가지 은사라 칭하곤 합니다.

성령칠은으로 충만한 메시아 예수님이요 이어지는 고백도 고무적입니다.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이어 평화의 꿈이 완전히 실현된 유토피아 공동체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무수한 혁명의 예언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참 놀랍고 아름다운 예언같은 시詩입니다. 

세상 어디서 이렇게 깊고 아름다운 글을 볼 수 있을런지요!

 

“늑대가 새끼 양과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넘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한 것이기 때문이다.”(이사11.6-9)

 

그대로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꿈꿨던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받으실 때 세상 들짐승들과 누리던 평화로운 공존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성령의 인도하에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광야 세상의 들짐승들과 함께 평화를 누렸던 예수님이야 말로

영원한 평화의 모델입니다.

여기에 가장 근접한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1,13)

 

바로 이런 지상 천국의 평화의 실현을 꿈꾸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여기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 공동체의 수도형제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마침내 실현되기 시작한 하느님의 평화의 꿈입니다.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며 희구한 이사야 예언자요 그를 닮은 예수님인지요!

어제 나눴던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라는 감동적인 말씀도 떠오릅니다. 

 

오늘 복음은 선교 파견되었던 일흔 두제자의 성공적 귀환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격에 벅차 고백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관상의 행복을, 그 절정의 행복을 보여주는 주님의 감사찬미기도요 공관복음에서 유일합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늘 일치되어 관상적 행복을 사셨던 삼위일체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철부지 제자들을 통해 대우(大愚)가 대지(大智)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이런 관상의 행복을 체험한 열정과 열망의 주님의 제자가 주님의 사도와 선교사로 파견되니

그대로 감사의 응답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예수회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입니다.

인도와 일본에 최초로 가톨릭을 전한 인도와 일본의 사도, 동양의 사도로 불리며,

성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선교사로 손꼽히는 성인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신자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 함께 예수회의 창립일원이 되었고, 인도 선교 활동차 1541년 4월7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1542년 5월6일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1548년까지 인도반도 연안, 세일론섬, 말라카,

물루카제도에까지 정력적으로 포교 여행에 오르니 그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불가사의입니다.

이어 성인은 인도를 떠나 폭풍우를 뚫고 1549년 일본 선교활동에 오릅니다. 

 

그는 유럽에서 입는 사제복 대신 일본 승려들이 입는 납의와 가사를 입었는데,

이는 같은 예수회 선교사인 마태오 리치가 중국의 명나라에서 사제복대신 유학자의 도포를 입고

유교 교리에 맞추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명해가며 전도하려한 일종의 현지화 전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그의 기술을 통해 일본의 실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단히 예의가 바른 사람들인데, 잘 사는 것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남자는 14세가 되면 항상 칼을 차고 다닙니다.

사무라이는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무기를 항상 갖고 다니며,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선비와 붓의 나라인 평화의 조선과 사무라이와 칼의 나라인 전쟁을 좋아하는 일본과의 대비가

너무 극명합니다.

일본은 영원히 경계해야할 이웃이자 적국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니 유구한 역사중 양국의 관계가

이를 증명합니다. 

지칠줄 모르는 선교 열정을 지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1년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해 출발했지만

진입하지 못하고 광동항 앞의 상천도(上川島) 외딴 섬의 한 천막에서 1552년 12월20일밤 열병으로 쓰러진후

객사하니 향년 46세입니다. 

 

불꽃같은 생애로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 온힘을 다해 노력한 불굴의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622년 시성되며,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평화의 꿈을 실현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의 주님 평화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ㄴㄷ). 아멘.


12/4(수) [(자)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도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장애인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저도 반 모임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며,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반 모임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조재형 신부)

 

2. 40여 년간 예언자로서 백성들의 영적생활을 동반했던 그의 메시지 핵심주제는 주님을 향한 백성들의 불충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결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듣기 좋은 말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 힘든데, 가슴을 후벼 파는 ‘지적질’과 듣기 싫은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니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언어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저 군중이 가엾구나.”

(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안에 당신이 새겨준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복음은 선교 파견되었던 일흔 두제자의 성공적 귀환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격에 벅차 고백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관상의 행복을, 그 절정의 행복을 보여주는 주님의 감사찬미기도요 공관복음에서 유일합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늘 일치되어 관상적 행복을 사셨던 삼위일체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철부지 제자들을 통해 대우(大愚)가 대지(大智)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이런 관상의 행복을 체험한 열정과 열망의 주님의 제자가 주님의 사도와 선교사로 파견되니

그대로 감사의 응답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예수회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입니다.

인도와 일본에 최초로 가톨릭을 전한 인도와 일본의 사도, 동양의 사도로 불리며,

성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선교사로 손꼽히는 성인입니다.(이수철 신부)

 

12/4(수) [(자)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제 166-36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오늘의 말·샘 기도>

 

“저 군중이 가엾구나.”

(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안에 당신이 새겨준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4일(수) 6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