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2월 8일 주일[(자)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오늘날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일깨우려는 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한국 교회가 정한 인권 주일이고 사회 교리 주간의 시작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사회를 보는 올바른 눈을 가지게 하는 사회 교리를 배우고 익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입당송
보라, 시온 백성아. 주님이 민족들을 구원하러 오신다. 주님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너희 마음은 기쁨에 넘치리라.
본기도
저희가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성자를 맞이하여
천상의 지혜로 성자와 하나 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제1독서
▥ 바룩서의 말씀입니다.5,1-9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2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3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4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5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네 자녀들이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을 보아라.
6 그들은 원수들에게 끌려 너에게서 맨발로 떠나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왕좌처럼 영광스럽게 들어 올려 너에게 데려오신다.
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8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늘을 드리우리라.
9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1,4-6.8-11
형제 여러분, 나는
4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8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9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구원자이신 주님,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교회에 힘을 주시어,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 길을 곧게 내라고 외친 세례자 요한처럼 회개의 세례를 힘차게 선포하게 하소서.
2. 인권 주일을 맞아,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창조주이신 주님, 주님의 모습으로 지어진 저희를 굽어살피시어, 저희가 편견과 차별을 허물고,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는 데 연대하며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3.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경제 발전으로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도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굽어살피시어, 건강을 지켜 주시고, 모든 이가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힘을 모으고 나눔을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사회 교리 주간을 시작하는 저희 본당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어, 사회 교리에 비추어 현실을 성찰하고 판단하며 정의로운 본당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하소서.
예물기도
비천한 저희가 드리는 기도와 제물을 굽어보시어
아무런 공덕이 없는 저희를 너그러이 보호하시며 도와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하느님에게서 너에게 오는 기쁨을 바라보아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세례자 요한.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어릴 때입니다.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져갔습니다. 크레파스는 12색, 24색이 있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이 있습니다. 검은색, 흰색, 연두색, 갈색, 분홍색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 색을 중심으로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피부의 색으로 이름을 부르던 크레파스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살색’ 크레파스입니다. 그 살색은 백인의 피부를 뜻하는 하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흑인의 피부를 뜻하는 검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황인의 피부를 뜻하는 누런색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크레파스는 살색 크레파스가 아니라, 누런색 크레파스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크레파스의 색을 통해서도 어쩌면 인종을 차별하는 교육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서 캐나다 토론토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했습니다. 체크인하는 중에 착오가 있었는지 보안요원이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저의 외모가 범죄 용의자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시간은 늦었습니다. 저를 조사하는 요원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외모와 피부색 때문에 인종차별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 주일입니다. 인권 주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은 성별, 나이별, 피부의 색으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슬프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의 역사입니다. 인권 차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슴 벅차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을 극복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쉰들러 리스트’를 제작했습니다. 폴란드에서 사업하던 독일인 쉰들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쉰들러는 자기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죽음의 수용소로 가야 했던 유대인들을 구했습니다. 쉰들러의 선행으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후손이 매년 쉰들러의 무덤을 찾아 경의를 표한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뉴튼 수도원에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마리너스 수사님은 한국전쟁 당시 화물을 운송하는 선장이었습니다. 흥남 부두에서 화물 선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남쪽으로 피난하려는 피난민을 보았습니다. 선장님은 배에 있던 화물을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그렇게 배에 오른 14,000명의 피난민은 성탄절인 12월 25일에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4명의 아이가 출생했습니다. 마리너스 선장은 하느님의 섭리를 알았고, 수사가 되어서 평생 뉴튼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도 그 배에 있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을 참배하였고, 기념식수를 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
대림 제2주일
루카 3,1-6
자발적 광야의 삶을 사는 이가 존경스럽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만나게
해 주는 길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뇌엔 ‘망상활성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가 있습니다.
망상활성계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뇌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를 다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면세점에서
무언가를 사려 집중할 때는 공항 방송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 출발시간이
지난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몇 분째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셨는데, 어떤 이들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였고 어떤 이들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는 마치 망상활성계가 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분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들만 보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무엇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까요? ‘뜻’입니다.
‘착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나에게 이웃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다면 예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생기고 예쁘고 돈 많고 인기 많은 아이돌을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아이에게 구유에 뉘어진 예수님이 매력이 있을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광야를 산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세례자 요한을 주윤발이나 워런 버핏, 일론 머스크, 척 피니와 같은 인물들을 들고
싶습니다. 이들은 인기 있는 세계의 거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 살았던 세례자 요한과
비교하느냐고요? 먼저 돈에 대해 말해볼까요? 이런 사람들은 모두 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실제로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고 기부할 약속을 한 이들입니다.
그래도 잘 먹지 않았겠느냐고요? 워런 버핏은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자동차로 맥도날드에서
4달러도 안 되는 햄버거로 식사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자기 집도 없이 6천 만 원짜리 조립식
주택에 거주합니다. 그래도 명예를 추구했다고요?
워런 버핏은 나이가 들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성공한 것이라 말합니다.
척 피니는 자기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도 나라에서 조사받기 전까지
그가 기부하는 사람인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보인다면 착한 뜻이 들어온 것입니다. 착한 뜻은 이웃을
사랑하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기에 그런 이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착한 뜻을 가지면 자발적으로 광야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고 쾌락을 찾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만났느냐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서 만났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이휘재나 욘사마와 같은 같은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가난하고 절제되고 멸시받는 삶이 부러워졌던 것입니다.
이는 그 책이 저의 시선을 바꿔놓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젠 내가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성체에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주일학교 교사 중에 어떤 자매가 수박을 먹는데
빨간 부위가 하나도 없이 갉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저래? 맛있으라고 먹는 건데
저 흰 부분까지 먹다니. 누가 알아준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책을 읽는 동안 시선이 바뀌었는데, ‘지금 나는 저렇게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신앙이 우리를 광야로 나가게 하여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하게 하는 문입니다. 착한 뜻을 가져야 인간이 되신 착한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발적 광야를 사는 이들을 존경하게 만들어줄 환경에 자신을 먼저 살게 하십시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3. 송영진 모세 신부
<대림 제2주일 강론>(2024. 12. 8.)(루카 3,1-6)
<회개는 ‘온 삶’의 변화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은
서기 27년-28년경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시기는 서기 27년경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당시의 로마제국 통치자들의 이름과 시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인간 세상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이고, 대사제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인간 세상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버지의 뜻이 구체적으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린 것은,
요한이 광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에 관해서 1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80).”
성경에서 광야는 시련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하고,
은총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은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내렸다는 말은,
요한이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셨고 뽑으신 사람이었는데(루카 1,12-17),
그를 부르신 때는 그의 나이 서른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3절에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회개를
선포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을 보면,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2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라는
말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라고, 또 회개했다는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2)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는 ‘탐욕’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는 ‘교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물들어 있는 생활을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즉 하느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메시아의 구원에는 민족, 인종, 신분, 직업, 남녀 등의
차별이 없습니다.
3) 세례자 요한은 뒤의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루카 3,11-14).
말로만, 또 생각으로만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한다면 ‘온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는 한 번 한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도 회개이고, 그 길을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평생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4)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쳤습니다(마태 27,3-5).
그러나 그런 뉘우침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를 뉘우쳤다면 보속도 해야 하고,
주님에게로 돌아가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모두 합한 것이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자살을 한 것은(마태 27,5)
회개하기를 포기한 것이고, 구원받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살은 배반보다 더 큰 죄입니다.
<스스로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절망하는 것’과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4.12.7.토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340-397) 기념일
이사30,19-21.23-26 마태9,35-10,1.6-8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위로자이며 스승이요 치유자이신 연민의 하느님>
"주님을 기대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이사30,18)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참으로 가까이 계시어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위로자 하느님이심을 천명하십니다.
이어 위로자이자 동시에 스승이신 주님이심을 밝히십니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스승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도 우리 마음의 귀가 닫혀 있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이 스승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까 생각하면 순전히 우리 책임임을 통감합니다.
침묵중에 깨어 경청하는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 영적자세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삶의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임을,
하느님은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자 치유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으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얼마나 부지런히 우리를 살리시고 치유해주시는 치유자 하느님이신지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말해 언제나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살게 하시고 치유하시는
연민의 하느님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대림시기는 오시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이런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새로 임명된 교황청의 설교가 파솔리니 신부의 대림 첫 강론은 주제는 “하느님의 새로움의 기적에 우리 마음을
열라(Open our hearts to wonder of God’s newness)”였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살리시고 치유하시는 연민의 하느님의 늘 새로운 기적에
활짝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주님은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시며 전방위적으로 활약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수확할 밭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라 하시고 당신 친히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그들을 당신 능력으로 충전시킨후 파견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주님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허약하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며, 3.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4.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느니 거져 주어라.”
당대의 예수님 열두제자들은 물론 오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은 인간들의 불행한 현실입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문제투성이, 무지의 인간에 대한 답은 주님과의 일치뿐이 없습니다.
주님을 떠남으로 자초한 온갖 죄와 병이요 불행에 비극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일치로 영혼의 치유와 건강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제 아무리 첨단 문명의 인공지능 시대라 하지만 인간의 가련하고 불쌍하고 병든 무지의 현실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아니 인간의 정신력은 영성은 날로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고갈되는 지구의 자원과 더불어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탐욕과 야만의 총체적 위기시대입니다.
언제나 인간이 문제입니다. 해방 80년이 되가는데 우리의 정치현실은 좌우의 극단적 대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인간성의, 영성의 진보가 참 미미해보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단 하나, 주님을 철저히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암브로시오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성인은 340년경 현재 독일의 트리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갈리아 지방 로마 제국 출신 장관이었습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교황 그레고리오 더불어 서방의 사대교부에 속합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암브로시오 이름뜻은 ‘불멸’을 뜻합니다.
태어날 때 꿀벌들이 날아와 그의 입술을 지식의 단물로 축였다고 전해오며 이런 은총으로
후세에 뛰어난 설교자로 추앙받게 됩니다. 374년 11월30일 세례를 받고 일주일후 주교로 임명되며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가가 됩니다.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는 신념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사회선교에도 충실했으며
서방교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가 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들 매일같이 그의 들으려고 찾아왔으며,
그는 겸손한 태도로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입니다.
“그는 방문자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아주 짧은 시간뿐이었습니다),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도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되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아갔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소리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제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기로 하자면 그가 무척 한가했어야 하는데 그가 그런 여유가 있는 경우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백성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그의 말씀을 주일마다
들을 뿐이었습니다.”<고백록, 성염역주,203-204쪽)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내용이라 자주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그와 황제와의 대립시 승리일화도 유명합니다.
390년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한 책임을 물어 테오드시우스 1세 황제에게 회개를 명했고,
그가 주교에게 항복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받았을 때 성찬례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후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됩니다.
이를 상징하는 듯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은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책 제목에
최초로 표지 사진은 황제가 아닌 ‘성 암브로시오' 사진이 나옵니다.
397년 4월4일 향년 57세로 선종할 때 성인의 임종어도 감동적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다는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얼마나 고단한 분투의 노력을 다한 삶이었는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저는 이룬 일도 없이 부끄럽게 성인보다 무려 18년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더욱 분발하게 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는"
무욕의 초연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은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아멘.
12/8(일) [(자)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되새김 구절
1.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가난하고 절제되고 멸시받는 삶이 부러워졌던 것입니다.
이는 그 책이 저의 시선을 바꿔놓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젠 내가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3.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는 ‘탐욕’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는 ‘교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물들어 있는 생활을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즉 하느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송영진 모세 신부)
4.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암브로시오 이름뜻은 ‘불멸’을 뜻합니다.
태어날 때 꿀벌들이 날아와 그의 입술을 지식의 단물로 축였다고 전해오며 이런 은총으로
후세에 뛰어난 설교자로 추앙받게 됩니다. 374년 11월30일 세례를 받고 일주일후 주교로 임명되며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가가 됩니다.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는 신념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사회선교에도 충실했으며
서방교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가 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들 매일같이 그의 들으려고 찾아왔으며,
그는 겸손한 태도로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입니다.
(이수철 신부)
12/8(일) [(자)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제 170-40일 기도
복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멘.
- 2024년 12월8일(일) 3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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