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2월 22일 주일[(자) 대림 제4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본기도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
○ 만군의 하느님, 어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손이 심으신 나뭇가지를, 당신 위해 키우신 아들을 찾아오소서. ◎
○ 당신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 위해 키우신 인간의 아들에게 손을 얹으소서. 저희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오리다. 저희를 살려 주소서. 당신 이름을 부르오리다. ◎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0,5-10
형제 여러분, 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보소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희망이신 주님, 성탄을 기다리는 교회와 함께하시어,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서 삶의 기쁨과 희망의 복음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분단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희 민족을 굽어살피시어, 이해와 용서로 지난 아픔을 씻어 내고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화해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3.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몸소 함께하시어, 그들의 고통을 줄여 주시고, 그들이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게 하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고대하는 저희 지역 사회를 이끌어 주시어, 모든 이가 차분한 마음으로 성탄의 참뜻을 묵상하고 마음 깊이 새기며, 참으로 이웃에게 필요한 것을 살피고 나누게 하소서.
예물기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성자를 잉태하게 하셨으니
제대 위의 이 예물도 성령의 힘으로 거룩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영원한 구원의 보증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구원의 축제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 성탄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도록 도와주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4주일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는 도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묵주’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자동차 안에 ‘묵주’를 걸어 놓기도 합니다.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기도 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주해를 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꾸르실료 교육의 봉사자들도 늘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면서 봉사합니다. 저도 손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지순례를 할 때면, 버스 안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의 전구로 안전한 성지순례가 될 수 있도록 청하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묵주기도의 신비"라는 회칙을 발표하며 "빛의 신비"를 추가하였습니다. 이제 묵주기도는 20개의 신비(환희, 빛, 고통, 영광)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2027년 세계 청년대회를 위해서 묵주기도 10억 단을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3주간 대림 시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신앙인은 두 가지 차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우주의 역사는 150억 년,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남입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사람은 성별, 이념, 세대, 피부색, 계층으로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이, 가장 헐벗은 이, 가장 아픈 이, 감옥에 갇힌 이에게 사랑을 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 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지위도, 능력도, 업적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만, 욕심, 허영, 이기심이라는 언덕과 산을 깎아내려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나눔, 헌신, 희생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또 다른 말은 ‘공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이유는 바로 ‘죄, 악,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공감의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대림 제4주일: 다해
복음: 루카 1,39-45: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엘리사벳의 이 말은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느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의 전례는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복음 전 노래를 부른다.
이 마음의 자세는 새로운 강생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자세이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이 성탄은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가서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의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가 아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뛰었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29절)은 나자렛에서 150km 이상 되는
예루살렘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Ain-Karim)이다.
마리아가 이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 준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해서거나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S. Ambrosius, In Lucam 2,19).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 이 먼 여행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마리아를 만났을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그리고 성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구약의 계약의 궤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벳은 자기 집으로 그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큰 소리로 마리아께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42절) 분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렇게 위대하게 된 것은 그녀의 신적인 모성(母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으로 ‘계약의 궤’가 되었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최초로 축복의 인사를 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아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언자를 거쳐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이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하신 대로’(루카 1,38)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알고 또 그렇게 실천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당신을 아버지께 의탁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하셨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뜻을 항구히 아버지께 봉헌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희생을 실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이 희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곧 다가오는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강생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파스카 신비에 정향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부활 날 다시금
그 몸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즉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이웃으로 향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여정이 험하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즉 사랑을 낳아줄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신비와 파스카의 기쁨도 아울러 충만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께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아 주실 수 있었던 그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님
대림 제4주일: 다해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
대림 제4주일입니다.
성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오실 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어떻게 오시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오실 분’에 대한 네 가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분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에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오신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해산하는 여인의 아기”(미카 5,2)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셋째는 “목자로 나서리라.”(미카 5,3)는 것, 곧 그분께서 백성을 인도하고 먹여주고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넷째는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4)는 것, 곧 그분께서는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평화이신 당신을 건네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시는 분’이 짐승의 피로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놓으실 ‘대제사장’으로 오실 것이요, 그것은 ‘당신의 뜻’이며 바로 그 뜻을 이루러 왔다(히브 10,7)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2독서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라는 말씀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에 다 같이 들어있는 말은 “이루다”는 단어인데, 앞 문장에서는 능동형으로, 뒤 문장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오시는 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리고'“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안에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일하시도록 수락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주인이 되시어 일하시도록 허용해드리는 일이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극치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고 이해하고 명확하게 알고서 응답하려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그것에 응답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마음이 불신에 가려졌거나, 그 뜻을 알아야 하는 자신을 앞세우거나, 자신이 그 뜻을 이루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의 불확실성을 탓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동시에 신비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뜻’(마태 11,26; 루카 10,21)을 지니신 주님의 사랑과 호의에 의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영성 안내자로 살아가고 있는 존 캐버너가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캘커타에 봉사활동 하러 갔을 때에, 수녀님께서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존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 되물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이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우리가 이끌려가게 될 곳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목적지를 알려주거나 지도를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떠나라”라고 하셨고, 그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신뢰로 믿음의 길을 갔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믿음의 길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의 동행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었던 샤를르 푸고의 기도를 함께 드려 봅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제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알고 이해하기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할 때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밝혀주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어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저를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21.12월21일 아가2,8-14 루카1,39-45
하느님 중심의 삶
“주님과 우정의 여정, 그리고 형제들과 우정의 여정”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요,
정의의 태양이시요.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오늘 동지날인 12월21일의 '오후렴'도 참 아름답고 황홀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연인이시고 도반이자 주님인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혼자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반드시 더불어의 삶이요 구원입니다.
더불어와 홀로이지 더불어 없는 홀로는 불가능합니다.
10년전 2014년 삶의 여정의 압축과도 같았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통해 절감했던 진리입니다.
삶의 여정은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라는 네 요소로 압축되었고, 함께 하는 도반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참 깊이 깨달았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보이는 형제 도반들과
우정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것이 공동체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르는 그동안 참 많이도 나눴던 “하늘과 산”이라는 대표적 자작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 주님이라면 우리 각자는 산이고, 네가 하늘이라면 나는 산일수도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물론 서로간에도 상호보완 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모두가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들 서로간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이 두 분의 우정에 앞서 각자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깊었던 지요!
오늘 동지날 두분의 만남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두분의 만남과 동시에 태중의 아들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 답게, 성모님을 통해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자 요한을 찾아 겸손히 찾아 나선 태중의 예수님입니다.
아마도 곤경에 처한 마리아가 즉시 떠올렸던 참 좋은 도반이 엘리사벳 사촌 언니였을 것입니다.
두 자매간 역시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간의 우정도 참으로 깊었음을 봅니다.
엘리사벳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엘리사벳 태 안의 아기가 반갑고 기쁨에 뛰놀았고,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은
기뻐 외칩니다. 루가복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에 속할 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단숨에 읽혀지는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고백입니다.
주님 안에서 두분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고 서로의 내적상처도 완전히 치유되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두분의 태교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태중에 모신 마리아가 흡사 살아있는 “주님의 감실”같고, 그 앞에서 기뻐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는 흡사 주님의 계약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다윗을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주님을 중심에 둔 두 어머니들의 우정이요, 태중의 예수님과
요한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형제자매들 상호간의 우정에 앞서 공동체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절대적입니다.
이런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신비적 사랑의 체험을 제1독서 아가서가 잘 보여줍니다.
교회의 신비가들이 참 사랑했던 아가서요, 아가서가 있음으로 성서는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애인의 감미롭고 아름다운 고백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엘리사벳은 물론 그 태중의 아기 요한의 고백같기도 하고, 미사에 참석해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주님의 애인인 우리의 고백같기도 합니다.
평생 “진리의 연인”이 되어 살았던 성 아우구스티노, 또 주님과 깊은 연정을 나눴던 신비가 십자가의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도 생각납니다.
교회의 신비가들에게 삶의 중심인 주님은 모두의 연인이었고 도반이였고
그들과 주님과의 연정과 우정도 함께 갔음을 봅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신비가들은 물론 우리 영혼들 역시 주님의 애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의 애인들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 공동체 삶의 중심인 주님과의 깊어지는 연정, 우정과 더불어 깊어지는 형제자매들
상호간의 연정과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의 공통적 연인이자 도반이신 주님께서 우리 형제들 상호간의 연정도 우정도 보호해 주십니다.
아니 진리이신 주님 사랑 안에서 연정도 애정도 부단히 우정으로 승화됨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깊은 우정은 연정과 애정을 뛰어넘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의 우정이 성서의 다윗과 요나단, 마리아와 엘리사벳이요, 우리 조상들중에는
조선시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를 꼽고 싶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진리안에서 영혼들이 깊은 일치를 이뤘던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자기보다 상대방 도반의 영혼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함께 가는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주고,
더불어 주님을 중심으로 형제들 상호간의 우정도 깊이해 줍니다. 아멘.
- 12/22(일)[(자)대림 제4주일],되새김 구절
1.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또 다른 말은 ‘공감’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조재형 신부)
2.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부활 날 다시금
그 몸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즉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이웃으로 향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여정이 험하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즉 사랑을 낳아줄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신비와 파스카의 기쁨도 아울러 충만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께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아 주실 수 있었던 그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저를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참으로 깊은 우정은 연정과 애정을 뛰어넘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의 우정이 성서의 다윗과 요나단, 마리아와 엘리사벳이요, 우리 조상들중에는
조선시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를 꼽고 싶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진리안에서 영혼들이 깊은 일치를 이뤘던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자기보다 상대방 도반의 영혼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2/22(일)[(자)대림 제4주일],제 183-53일 기도
-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저를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 2024년 12월22일(일) 5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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