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2월 24일 화요일[(자) 12월 24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보라, 이제 때가 차,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다.
본기도
지체하시지 말고 어서 오시어
주님의 사랑을 믿는 저희를 위로하여 주소서.
주님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7,1-5.8ㄷ-12.14ㄱ.16
다윗 1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2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3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4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8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
○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
○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
복음 환호송
○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7-79
그때에 요한의 67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께 봉헌하는 이 예물을 인자로이 받아들이시어
이 거룩한 제물을 받아 모시는 저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성자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기다리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놀라운 이 성사로 생기를 되찾고 비오니
마땅히 경배하올 성자의 성탄 축일을 정성껏 준비하여
기쁜 마음으로 영원한 선물을 받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12월24일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 복음에서 읽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묵상하는 노래입니다. 오늘은 구원의 역사에서 즈카리야의 노래가 지니는 신학적인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즈카리야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에 대한 찬미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셨음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도록 격려합니다. 노래는 하느님께서 다윗의 집에서 "권능의 구세주"를 일으키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완성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메시아의 도래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의 궁극적 성취임을 설명하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일깨웁니다. 즈카리야는 구원이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물리적 해방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한 내적 해방임을 언급합니다. 구원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행위임을 강조하며, 회개와 자비의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이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구원자임을 설명하며, 예수님의 빛을 따라 살도록 독려합니다. 즈카리야는 자기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을 위한 길을 준비할 것임을 노래합니다. 우리들 역시 요한처럼 자기의 삶에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고,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래는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로 끝맺습니다. 이는 구원이 단순한 개인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공동체적,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됨을 암시합니다. 우리들 역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 자비를 세상에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몸’을 얻는 것은 아닐까! 몸을 얻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보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있기에 영혼이 가지는 자유와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또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늙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우리에게는 축복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을 얻으시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오시지만 영적인 자유와 순수함을 이야기 하십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멍에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옳은 일을 추구하면서, 용서를 하면서 다가온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몸에 속해있지만 이미 영혼의 자유와 순수함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몸의 틀을 벗어버리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예전에 있던 본당에서는 성탄 트리에 카드를 달아 놓았습니다. 카드에는 예수님께 드리는 성탄 선물이 적혀있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 부모님 심부름하기, 성당 청소하기와 같은 선행을 적어 놓았습니다. 교우분들은 기쁜 마음으로 카드를 가져가셨고, 예수님께 마음을 담아 성탄 선물을 드렸습니다.
아직 아기 예수님을 위한 성탄 선물을 마련하지 못하셨다면 오늘 하루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위해서 먼 길을 떠나왔던 동방박사도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렸던 목동들도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2. 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
(2024. 12. 24. 화)(루카 2,1-14)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메시아입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4-14)”
1) 여기서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은, 방을 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베들레헴 주민들
가운데에도 산모를 위해서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이 없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출산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했을
것이고, 여관비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이 여관방을 모두 차지했고,
아무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차가운 세상으로 오신 것이고, 그때부터 이미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그 상황에 대해서 혹시라도, “만일에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요셉과 마리아를 위해서
나의 방을, 아니, 나의 집 전체를 내주었을 것이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큰소리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다음 말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지금 내 곁에 있는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이고,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입니다.
2)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배척만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맞아들여서, 비록 방은 아니고 외양간이었지만,
어떻든 출산을 위한 장소를 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도 8절에 나오는
‘목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에 그 지역의 외양간은 주로 동굴이었는데,
외양간 역할도 하고, 목자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숙소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기꺼이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노숙을 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는 우리나라 외양간의
여물통과는 다르고, 양을 먹이는 건초를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아기를 눕히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몰랐고,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인줄도 몰랐지만, 그들은 메시아를 맞아들인
‘마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에서 ‘손님’은 요셉과 마리아처럼 딱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그네를 뜻하고, ‘천사들’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딱한 처지에 놓인 성가정을 접대하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 하느님’을 접대한 의인들입니다.
3)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말은,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8-29).”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계셨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3. 이영근 신부님
성탄 밤미사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
오늘 독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화답송 역시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시 89,5)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환호합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 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찬양 드리는 노래입니다.
곧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에 해당합니다.
곧 태어날 아기가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줍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카 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는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
(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리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리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저를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리이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23. 12월23일 말라3,1-4.23-24 루카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아이들>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오,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하느님!”
오늘은 12월23일 마지막 "오후렴" 역시 장엄하고 감동적입니다.
예나 이제나 구세주 예수님 오심을 갈망하는 인류의 염원은 여전합니다.
특히 요즘의 혼란한 시국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모두가 길을, 빛을 찾습니다.
궁극의 길이자 빛은 우리를 찾아 오시는 구세주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예수님 탄생 하시어 오실 날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4개의 영롱하게 타오르는 대림촛불이 예수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립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우리의 감수성을 늘 새로이 할 것을, 늘 대림의 희망과 기쁨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모든 것은 세월이 지나면 때가 타고 닳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잘못 길을 들이면 헐거워지고 바스라진다.”<다산>
“사람들이 선량한 마음을 놓아버려 마치 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 같으니, 날마다 베어버리면 어찌 아름답겠는가.”<맹자>
선물같은 일상을 소중히 여겨 한결같은 새로움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세월 흘러 몸은 노쇠해가도 신망애(信望愛)만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탄생에 앞서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일화를 보여줍니다.
요즘 계속되는 미사중 독서들이 예수님 탄생에 앞서 하느님의 만반의 준비과정을 보여줍니다.
우연적 탄생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섭리 과정의 참 좋은 선물이 아이의 탄생임을 보여줍니다.
하나하나 그 고유의 사명을 지닌 귀한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은 온 마을의 축제요 기쁨이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예전 어렸을 적 아이를 낳은 집 대문앞에 숯과 고추가 달린 금줄을 달아 놓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20대 젊은 시절 존경했던 개신교 저명한 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당신이 어머니가 되어 한 번 아기를 갖고 낳는 체험을 하고 싶다는 고백이며 임신한 분의 특별 허락을 얻어
불룩한 배를 만져보며 생명의 신비에 감동했다는 고백의 내용이 50여년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난 47차 코르시카 해외 사목 여정후 귀국시 기내에서 대동한 67명 언론인들과
짧은 인터뷰 대목의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너희들은 여기서 많은 아이들을 보았느냐?
이곳은 아이들을 가진 땅이다.
앞서의 방문지인 동티모르 와 여기서, 나는 아이들을 가진 이들을 보는 것이 참 행복했다.
이것이 미래다(This is the the future)!”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걷는 모습에 감동했음이 분명합니다.
요즘은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걷는 모습을 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두 분은 우리의 영원한 현재이자 미래임을 깨닫습니다.
칼린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란 글중 한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들인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소중히 키워야 함을 배웁니다.
교황님이 늘 사랑하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아이들입니다.
더불어 어린시절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참으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함을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듯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이미 아득한 옛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예고 되어 있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가 엘리야의 재림임을 믿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보라, 내가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구약성서 맨마지막 말라기서의 맨끝부분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사명이 예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니 예사로울 수가 없습니다.
작명과정에서 하느님의 개입이 드러납니다.
아기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자 즉각적인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의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반발하자, 이웃과 친척들은 잠시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의 반응을 묻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판에 씁니다.
참고로 요한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합니다.
그러자 즈카르야는 즉시 혀가 풀려 말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 유명한 즈카르야 찬미가는 내일 복음에 소개될 것입니다.
온마을의 기쁨이자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기쁨이 된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마지막 유다의 온 산악지방 주민들의 심정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는 다음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손길은 요한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도 돌보고 계십니다.
요한 대신 나를 넣어, “대체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물으며
화두로 지니고 살아야 할 말마디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나와 더불어 이웃 형제자매를 귀히 아끼고
돌보고 살피며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25,4-5ㄱㄴ). 아멘.
12/24(화)[(자) 12월24일], 되새김 구절
1. 아직 아기 예수님을 위한 성탄 선물을 마련하지 못하셨다면 오늘 하루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위해서 먼 길을 떠나왔던 동방박사도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렸던 목동들도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말은,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송영진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
(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리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리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저를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리이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25,4-5ㄱㄴ). 아멘.
(이수철 신부)
12/24(화)[(자) 12월24일],제 185-55일 기도
복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
(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리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리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저를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리이다.
아멘.
- 2024년 12월24일(화) 6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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